〈 58화 〉56국 - 친구는 인터넷 친구가 있어요...
마치 바둑계에 핵폭탄이 터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TH 칼텍스 배 8강 B조. 정도찬 2단 vs 차윤석 9단 충격의 3대0 셧아웃!]
[정도찬 2단 “단급은 숫자에 불과하다.” 4강 진출!]
[정도찬 2단 대국 후 인터뷰 ‘거품? 실력은 우승으로 증명하겠다.’]
ㄴ뭐임? 정도찬이 이김? 바빠서 못 봤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거임?
ㄴ와 진짜 이택윤 지명할때부터 미친놈인 건 알았는데 미친놈이었네….
ㄴ뭐가 다른 건데 ㅋㅋㅋㅋㅋ
ㄴ미친놈 ㅋㅋㅋㅋㅋ 이랑 미친놈... 의 차이지
ㄴ이게 한글의 위대함?
ㄴ올려치기 그만 좀 해 미친놈들아 어차피 이거 다 거품임
ㄴㄹㅇ ㅋㅋ 벌써 스물여섯인데 앞으로 1~2년 반짝하면 다행이지
강력한 우승 후보가 정도찬과의 5번기에서 0:3 셧아웃을 당하자 예전과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무수한 시선이 정도찬에게 집중되었다.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갈 신인의 등장인가, 아니면 최초이자 최후의 전성기를 맞이한 반짝스타인가.
여론은 이리저리 갈렸지만 정도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이는 정도찬의 인지도 상승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바둑계의 태풍의 눈이라고 불리는 정도찬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에잇!”
뿅-
그의 제자인 김수정에게 뿅 망치로 얻어맞고 있었다!
그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하윤서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거예요?”
수능이 끝난 고3이자 겨울 방학을 맞이해 종일 인터넷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하윤서는 정도찬이 도움을 요청하자 얼씨구나 하고 한걸음에 기원으로 달려왔다.
기회를 봐서 정도찬과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할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온 하윤서였지만...
정도찬이 김수정에게 ‘바둑에만 집중하면 자신을 때려라’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순간 오늘도 글렀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기류를 만들 수가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으니까!
정도찬 역시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라도 해 봐야지요….”
어찌어찌 4강에는 진출했으나 약점은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상대를 계속 의식하려고 노력했으나 국면이 조금이라도 복잡해지는 순간 모든 의식이 반상 위로 집중되는 것이다.
집중력이 좋은 것이 오히려 방해되다니….
정도찬으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결국,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할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정도찬은 백수나 다름없다는 겨울 방학을 맞이한 고3인 하윤서와 겨울방학을 맞이해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김수정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수정아 아까부터 뿅 망치가 점점 아파지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지?”
김수정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했다.
“네! 착각이에요!”
“그래…. 수정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같은 곳을 계속 맞아서 아프게 느껴지는 건가?
정도찬은 괜히 맞은 곳을 문지르고는 다시 대국에 집중했다.
그리고 너무 집중했다.
김수정은 속으로 60초를 샐 때까지 정도찬이 하윤서를 쳐다보지 않자 사정없이 뿅 망치를 휘둘렀다.
“에잇!”
뿅!
“하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윤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물론 이렇게라도 정도찬과 함께 바둑을 둘 수 있어 좋긴 했지만!
그래도 좀 더 진지하게 두고 싶었다.
이왕이면 옆의 거슬리는 꼬맹이도 좀 빠지고!
하지만 정도찬은 그가 말하는 ‘약점’을 고치기 전에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도 이렇게 흐지부지 지나가는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하윤서는 하윤서 나름대로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중요한 건 도찬 오빠가 바둑을 두면서 제 생각을 하면 되는 거죠?”
바둑을 두며 자신을 생각한다니….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로맨틱한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다른 쪽으로 튀어나가려는 생각을 다잡은 하윤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 대국 도중 저를 쳐다보려고 하는 거고요.”
잠시 고민하던 정도찬은 긍정했다.
“음…. 비슷해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대의 의도를읽는 연습을 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제가 벗을까요?”
“......네?”
지금 저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순간 정도찬의 사고가 멈췄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윤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말을 이었다.
“오빠도 남자인데 야하게 입은 여자가 눈앞에서 바둑두고 있으면 힐끔힐끔 쳐다보겠죠. 뭐.”
“아니…. 뭐…. 그런….”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정도찬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상식 범위 밖에서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어차피 저런 뿅 망치로 이렇게 해봤자 별 도움 안 되잖아요? 벌써 몇 시간째야 이게? 이 시간에 제대로 대국을 했으면 몇 판은 두고 복기까지 했을 텐데….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확실히 시간이 아깝긴 한데….”
정도찬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대답했다.
확실히 이런 식으로 대국하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8강전을 준비하는 내내 이런 식으로 연습했고, 지금도 이렇게 연습하고 있는데 아직 안 되는 건 정말 방법이 잘못돼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걸까?
하윤서가 제안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은 아닐까?
그래 생각해보면 정도찬 자신도 남자다.
잘 생각해보면 하윤서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정도찬은 설득돼버렸다!
하윤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게 무슨 떡인가 싶어 바로 교복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그 미친 현장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김수정이었다.
“순진한 우리 스승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김수정은 넥타이를 푸는 하윤서에게 말 그대로 사정없이 뿅 망치를 휘둘렀다.
뿅! 뿅! 뿅! 뿅! 뿅! 뿅! 뿅!
그 모습을 본 정도찬은 다행히도 정신을 차리고 하윤서에게 말했다.
“넥타이 다시 매요….”
냉정함을 되찾은 정도찬의 모습에 하윤서는 살짝 혀를 찼다.
“칫….”
저 꼬맹이는 대체 뭔데 사사건건 시비란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진도를 뺄 기회였는데!
하윤서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바둑이랑 엮어서 공략하니까 어느 정도 먹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 정도찬을 공략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커플 바둑이라도 두자고 해야지.’
그리고 그걸 핑계로 이런것도하고…. 저런것도하고! 다 해버릴 테다!
하윤서가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정도찬은 하윤서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교복 차림이에요? 겨울 방학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교복 입을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냥 입고 왔어요…. 싫어요?”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싫은 게 아니면 좋다는 거네요? 걱정하지 마요 교복은 잘 보관해둘 테니까. 나중에 교복 플레….”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정도찬은 위험한 수위를 넘나드는 하윤서의 말을 필사적으로 끊었다.
여러모로 위험했다.
특히 하윤서가 아직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더!
하윤서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뭐 어때요 결혼할 사람들끼리.”
“제발 그런 장난은 인제 그만 쳐요….”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정도찬의 정신에도, 김수정의 교육에도.
정말 여러모로….
하윤서는 하윤서 나름대로 섭섭했다.
‘장난 아닌데….’
하윤서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자신의 말을 장난 취급하는 정도찬이 그저 야속했다.
동시에 신세연 그 여자가 왜 아직도 정도찬의 옆에서 서성이고만 있는지 이해해버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만약 정도찬이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몇 년 전에 이미 끝나있었을 거고 하윤서 자신에게는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전에 돌입하면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초단 대회 때 정도찬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그런 적 없음) 한소율이라는 여자는 올해 스물아홉이고, 신세연 그 여자는 스물여섯이다.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조급해질 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떤가!
비록 지금은 고등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린아이 취급받고 있지만 몇 년 후에 자신이 스물셋, 스물넷이 되어도 자신을 그저 어린아이 취급할 수 있을까?
물론 중간에 이상한 여자들이 끼어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방면에서 하윤서는 신세연에게 묘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라면 정도찬에게 다가오는 날파리들을 알아서 잘 견제해주리라는 것을.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
‘이이제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거지!’
하윤서는 하윤서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었다.
나름의 계획이 있는 하윤서에게 정도찬이 물었다.
“그런데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면 어떻게 지낼 거에요?”
“......인터넷 바둑?”
“......?”
진로를 물었는데 왜 갑자기 인터넷 바둑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정도찬은 하윤서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도찬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하윤서는 말을 이었다.
“바둑기사가 바둑두는 거 말고 뭘 하겠어요!”
“공식전은 안 나가니까 대국료도 못 받잖아요?”
“바둑은…. 인터넷 바둑이 있어요….”
“하아….”
정도찬은 한숨을 쉬며 고졸 무직 백수(진) 하윤서를 바라봤다.
‘그 어렵다는 협회 입단에 성공한 애가왜 이러고 있는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