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5국 - 제목은 라면으로 하겠습니다. 근데 이제 지옥을 곁들인...
평소와 같이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려던 정도찬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지독한 탈력감.
단순히 잠에 취해 움직이기 싫은 것과는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하자 쑤시고, 나른한 느낌이 들었으며 보일러는 확실히 켜져 있는데 정도찬 자신은 춥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살감기임이 분명했다.
‘역시 어제 너무 무리했던 건가.’
정도찬은 어제 있었던 행사를 떠올렸다.
그저 흔하디흔한 다면기 대국 행사였다.
하지만 규모가너무 컸던지라 행사가 야외에서 진행되었던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한겨울이라 추운데, 드문드문눈까지 내리고 있었으니….
정도찬은 이런 날씨에 야외에서 행사하는 게 말이 되냐며 항의하고 한소율에게도 연락했다.
행사장의 상황을 전해 받은 한소율은 정도찬의 건강이 염려되어 위약금은 걱정하지 말고 행사를 취소하고 돌아오라고 했지만 정도찬은 차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자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며 그 추운 곳에서꿋꿋이 버티고 있던 팬들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도찬은 정해진 행사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도 남아서 사인과 사진 등의 팬서비스까지 마치고 기원에 돌아왔다.
결국, 정도찬은 그 추운 곳에서 몇 시간 동안 눈을 맞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아무리 정도찬이 신체 건강한 20대 중반 남성이라고는 하지만 철완 아톰이나 터미네이터 같은 초인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무모함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난리 났네….’
당장 사흘 후가 8강전인데 몸 상태가 이래서야….
정도찬은 할 수만 있다면 어제로 되돌아가 어제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몸을 함부로 쓰는것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고 하던가.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온몸이 쑤시고, 무겁고, 무기력하다.
시야는 흐릿하고, 정신은 멍했다.
도저히 바둑을 둘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다.
정도찬은 지금 김수정과 바둑을 두면 완벽하게 질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기권해야 할지도….’
이 상태로 억지로 출전하면 분명 개망신을 당할 것이다.
물론 프로바둑기사가 중요한 기전을 앞두고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것부터가 망신이긴 했지만….
‘미치겠다….’
다른 기전도 아니고 메이저 기전의 8강전이 코 앞인데 이게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몸 상태가 나빠지자 생각도 나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정도찬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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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일찍 일어나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공부방에서 정도찬을 기다리던 김수정은 시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정도찬이 아침 공부에 늦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어제, 밤새셨나?’
김수정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착한 제자가 스승님을 깨워주는 수밖에!
김수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정도찬의 방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정도찬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김수정은 슬슬 이상함을 느꼈다.
정도찬이 주변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노크만 해도 귀신같이 소리를 듣고 일어났을 텐데?
무슨 일 있는 건가?
김수정은 정도찬의방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큰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짓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실례합니다아…….”
오랜만에 보는 정도찬의 방 모습에 김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와아아...’
확 풍겨오는 책 내음.
사방이 책과 기보로 가득했다.
어디에 눈을 둬도 바둑, 바둑, 바둑이다.
김수정은 이 방에 자주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들어올 때마다 이 풍경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방이 마치 정도찬의 바둑에 대한 집념을 뭉쳐놓은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정도찬의 방에 발을 내디딘 김수정은 정도찬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익숙한 포석 책들을 괜히 째려봤다.
어디서 이렇게 포석책들이 나오나 싶었는데 다 여기 있었구나!
마치 원수의 본거지를 찾아낸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잠시 포석 책들과 눈싸움을 하던 김수정은 자신이 정도찬의 방에 들어온 목적을 깨닫고 정도찬의 침대로 향했다.
“스승님! 아침이에요! 일어나세…. 스승님?”
정도찬을 흔들어 깨우려던 김수정은 정도찬의 체온이 너무 높아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깜짝 놀란 김수정이 정도찬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얼굴도 창백한 것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직 복잡한 건 잘 모르는 김수정이었지만 그런 그녀가 보더라도 심각해 보일 정도로 정도찬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은 바로 자신의 방에 뛰어들어가 핸드폰으로 신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지, 신세연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소리가 들리자마자 김수정이 다급하게 말했다.
“언니! 스승님이…. 스승님이!”
김수정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신세연은 김수정을 진정시켰다.
-수정아,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천천히 말해줄 수 있겠니?
신세연의 그 차분함에 김수정도 스스로가 약간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스승님이 막 열도 나고, 얼굴도 하얘요….”
-어제 무리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몸살감기인가 보네.
“감기요?”
정도찬이 많이 아파 보여서 TV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큰 병이면 어쩌지 싶었는데 감기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 김수정이었다.
-일단 언니 방 침대 아래에 구급약 통이 있거든? 거기에서 아스피린이라고 쓰여 있는 약…. 아니다. 일단 아침부터 먹여야 하는데…. 수정아 혹시 죽 같은 거 끓일 줄 아니?
“아니요오….”
김수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요리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면 손조차 대지 않는 것은 쏙 빼닮은 것이다.
-어쩌지…. 일단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고 약을 먹는 게 좋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신세연은 말을 이었다.
-언니가 지금 일하고 있어서 기원에 가려면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거든? 일단 도찬이 옆에 있다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면 바로 119 불러줘 알겠지?
“네!”
전화를 끊은 김수정은 다시 정도찬의 방에 들어가 정도찬의 간호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파하는 정도찬을 계속 보고만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아스피린이라는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지?’
요리를 해본 적 없는 김수정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침이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번뜩였다.
‘라면!’
아무리 요리를 해본 적 없는 김수정이지만 물 끓이고 라면만 넣으면 되는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할 리가없었다.
김수정은 바로 주방으로 도도도도 달려가 냄비에 물을 한가득 부었다.
그리고 잠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가 라면과 라면스프를 넣었다.
그런데….
‘물이 좀 많은 것 같은데?’
김수정은 지금이라도 물을 줄일까 고민하다가 그냥 뒀다.
‘물이 많으면 양도 많아지는 거니까 좋은 거지!’
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집밥의 달인 백 선생님이 들으면 극대노할 생각을 하던 김수정은 가만히 끓고 있는 라면을 바라보다가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스승님이 끓여주신 라면은 이렇게 심심하지가 않았는데?’
정도찬은 라면을 자주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없을 때는 가끔 끓여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도찬이 끓여준 라면은 뭔가 이것보다 많이 들어가 있고풍성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은 이내 허전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파하고 달걀이 없구나!’
‘어쩌면 난 요리의 천재일지도?’라는 생각을 하며 김수정은 냉장고를 열어 대파와 달걀을 찾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달걀은 쉽게 찾았지만, 대파처럼 보이는 초록색 채소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일생일대의 난제 앞에서 김수정은 혼란스러웠다.
김수정은 과감하게 대파처럼 보이는 채소 하나를 꺼냈다.
김수정은 그 채소가 정도찬이 나중에 포테이토 스프를 해 먹기 위해 큰맘 먹고 산 릭(LEEK)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김수정은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그런데 어떻게 자르지?’
요리를 해본 적 없는 김수정이 식칼을 잘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은 대파(아님)를 정성스럽게 손으로 일일이 꺾어서 잘랐다.
그렇게 (김수정의 눈에는) 적당히 한입 크기로 잘린 대파(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파 아님)를 냄비에 투하한 김수정은 이번에는 달걀을 노려봤다.
지금까지 요리된 걸 먹기만 할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막상 자신의 손으로 달걀을 깬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몰려온 것이다.
‘병아리야 미안해!’
물론 백날 천날을 기다려도 무정란에서 병아리가 태어날 일은 없었지만….
어쨌든 김수정은 병아리에게 연신 사과하고 달걀을 냄비에 툭 툭 치며 깨뜨렸다.
물론 그렇게 깨진 달걀이 깔끔하게 냄비에 들어갈 리가 없었고.
김수정은 달걀 껍데기 반쪽이 냄비에 퐁당 다이브를 하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젓가락으로 달걀 껍데기를 빼냈다.
‘휴…. 다행이다….’
김수정은 뿌듯하게 라면이 끓고 있는 냄비를 바라봤다.
처음 하는 것치고 이 정도면 잘 하는 거지!
하지만 그런 김수정의 자만은 라면을 한 입 맛본 순간 사라졌으니….
‘으엑…. 너무 밍밍해.’
평소에 먹던 라면과는 너무 다른 맛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김수정은 ‘국물이 싱거울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검색했다.
-국이 싱거우면 소금을 넣으면 됩니다!
‘소금! 소금이구나!’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니!
김수정은 선반 위에서 하얀색 가루가 든 통을 두 개 발견했다.
‘설탕하고 소금을 헷갈리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김수정은 양쪽 통의 내용물을 조금씩 덜어 맛봤다.
‘모야…. 둘 다 소금이잖아?’
스승님은 왜 같은 소금을 이렇게 나눠서 넣어놓은 거지?
굵은 소금과 얇은 소금을 나눠놓은 것이었지만 김수정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어쨌든 통 안에 들어있는 것이 소금이라는 것을 확인한 김수정은 라면에 소금을 털어 넣었다.
이 정도 넣었으면 맛있겠지!
김수정은 다시 한번 라면을 맛봤다.
‘...맛없써!’
김수정은 결국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을 검색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김수정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우유를 넣으면 라면이 맛있어져요!
‘우유를 넣으면 되는구나!’
김수정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냄비에 들이부었다.
하지만 아직도 맛이 이상했다.
-요즘 순두부 라면이 유행이라는데요~
‘순두부? 순두부는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김수정은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숟가락으로 잔뜩 퍼 넣었다.
이제 맛있겠지? 싶어 다시 맛을 봤더니 오히려 더 맛이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얼음을 넣으면 면이 쫄깃쫄깃해져요!
‘쫄깃쫄깃한 면은 중대사지!’
안 그래도 면이 다 불어 터져버린 것이 마음에 걸렸던 김수정은 냄비에 얼음을 잔뜩 넣었다.
하지만 얼음이 녹고 다시 맛봐도이미 불어터진 면이 다시 돌아오는 마법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라면이 더 맛없어진 느낌이었다.
“힝….”
다 거짓말쟁이들이야! 이렇게 하면 맛있어진다고 해서 믿었는데!
김수정은 끔찍한 몰골이 된 라면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이런 건 원장선생님한테 배워둘걸….’
라면이 맛 없는 게 속상한 게 아니었다.
라면 하나 제대로 못 끓이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수정이였네?”
주방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싶어,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나온 정도찬이었다.
기원 주방에서 사고 칠만한 사람은 신세연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수정이 요리를 하고 있다니, 정도찬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뭐 했니?”
“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도찬은 잠시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이건 라면 냄새인데…. 혹시 배고팠어?”
“아뇨…. 그게 아니라…. 세연 언니가 아침 먹고 약 먹으면 좋다고 해서….”
정도찬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망했구나….’
김수정 성격에 제대로 만들었다면 지금쯤 눈을 반짝이며 츄라이~ 츄라이~를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저렇게 숨기려고 하는 것을 보니 라면을 끓이다가 망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애가 이렇게까지 애썼는데…. 먹어야겠지?’
정도찬은 냄비 안에 무슨 풍경이 벌어져 있든 간에 놀라지 않기를 다짐하며 냄비 속을 확인했다.
김수정은 어떻게든 냄비를 가리려고 했지만, 김수정의 키로 냄비가 가려질 리가 없었다.
결국, 냄비 속을 확인한 정도찬은 생각했다.
‘이건…. 요리가 아니라 현대미술인데?’
물론 작품명은 ‘지옥’이었다.
“잘…. 끓였네…. 혹시 라면 끓일 때 뭐 넣었니?”
“그…. 라면하고요.. 스프하고요... 대파(아님)하고요…. 달걀, 소금, 두부, 우유…. 그리고 얼음 넣었어요.”
재료들을 확인한 정도찬은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들만 넣었구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잘 했네, 나도 가끔이렇게 끓여 먹어.”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물론 이렇게 한꺼번에 때려 넣지는 않지만….
정도찬의 말에 김수정은 ‘혹시 이거 맛있어진 걸지도!’라는 심정으로 냄비에 숟가락을 가져갔고, 정도찬은 ‘이렇게 맛있는 건 나만 먹을 거야’라며 필사적으로 김수정을 말렸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음식과 대치하게 된 정도찬은 저 물건의 맛이 도저히 예상이 안 가서 두려웠지만, 용기를 냈다.
그래도 그의 제자가 끓여준 라면이 아닌가….
‘두 눈 딱 감고 먹자….’
정도찬은 반쯤 정신을 놓고 김수정이 끓인 라면을 다 퍼먹었다.
그리고 어느새 김수정이 신세연의 방에서 가져온 아스피린을 삼키고 다시 자신의 방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김수정의 라면 때문에 기절했는지, 아스피린의 약효 때문에 잠든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진실은 정도찬만이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