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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52국 - 약점 (54/75)



〈 54화 〉52국 - 약점

오늘도 스케줄을 위해 방송국에 온 정도찬은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연맹장님?”
“도찬 씨?”

한소율 연맹장이었다.

요즘 매일 바쁘다고 하루걸러 하루씩 불평하더니 드디어 어느 정도 일 처리가 끝난 것인지 방송국의 망령이 부활한 것이다.

정도찬은 반갑게 인사했다.

“요즘 바쁘시다더니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이제 괜찮아요. 이제 좀 여유가 있는 시기거든요.”

하긴…. 1월은 거의 모든이슈가 TH 칼텍스  전국기전에 집중되는 달이었다. 온갖 이벤트 기전과 행사로 점철된 12월에 비하면 일이 없을 수밖에.

정도찬이 한소율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한소율이 물었다.

“괜찮아요?”
“네, 별문제 없어요.”

주어가 없었지만 이해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요즘 들어 정도찬이 부쩍 많이 듣는 소리가 바로 저 ‘괜찮냐?’ 였으니까.

정휘운과의 창연도장 내전 성사 이후 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괜찮냐?’고 물어왔다.

당장 당사자인 정도찬과 정휘운은 별생각 없이 16강을 준비 중인데 주변이 더 난리였다.

정휘운과의 16강전이 확정되었지만 정도찬의 일상은 그대로였다.

아침에는 수정이와 포석 공부, 예능과 인터뷰 등의 각종 스케줄 소화, 시간이 남으면 인공지능 정석을 연구하고 인공지능과 대국을 한다.

바둑으로 시작해서 바둑으로 끝나는 하루.

굳이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겨울방학을 맞이한 김수정이 종일 기원에 찹쌀떡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다는  정도일까?

어쨌든 정도찬은 평소처럼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고 있었다.

정휘운이 그의 친구라고 해서 더 신경 쓰거나, 덜 신경 쓰는 일은 없었다.

상대로 만났을 때는 그저 한 명의 바둑기사로 대한다.

그것이 정도찬이 생각하는 바둑기사 정휘운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한소율은 조금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트라우마…. 괜찮으려나.’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도찬에게는 아직 무의식적인 트라우마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예를 들면 아직도창연도장에는 자주 방문하려고 하지 않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수를 보면 답답해하는 등의 사소한 문제들.

한소율은 이 사소한 문제가 트리거가 되어 정도찬의 트라우마가 재발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이번 정휘운과의 대국은 정도찬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당사자들은 별 신경 안 쓰니 뭐니 해도 일단 과거 창연 도장에서 동문수학하던 사람과 대국을 하는 거였으니까.

유사한 행위로 인한 트라우마의 재발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이걸 말하면 오히려  의식하게 될지도 모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소율은 그저 속만 태우고 있었다.

물론  와중에도 정도찬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도록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정도찬은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몰라주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방송국 돌아다니는 게 의미가 있긴 있어요?”

한소율은 황당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 당신이랑  방송국에서 만났거든요?”
“아 맞다.”

한소율은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정도찬을 째려보고는 말했다.

“그리고 니시카와 씨도 여기서 만났어요.”
“나오미 씨를요? 한 번도 제대로 된 활동은 못 해봤다고 들었는데….”
“워낙 일이 없고, 팀은 해체도 거의 확정적이니까 매니저도 도망가서 직접 일을 따러 돌아다녔던 모양이에요.”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네요….”
“애초에 아이돌이되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정도로 결단력 있는 사람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한소율은 정도찬에게 아까부터 거슬리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니시카와 씨를 ‘나오미 씨’라고 하네요?”
“네…. 나오미 씨가 그렇게 부르라고 하던데요?”
“도찬 씨…. 일본인들은 서로 친한 사이만 이름을 불러요.”
“저 나오미 씨랑 친한데요?”
“아….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도찬을 보며 한소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부터 생각이지만 정도찬이라는 인간은 말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절대로 캐치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답답한 사람이라니까 정말.’

오히려 그런 모습이 가끔 귀엽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답답함은 어쩔 수 없었다.

하윤서의 공개 고백으로 다급해진 것은 신세연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크리스마스라는 중요한 기념일을 바빠서 통째로 날려 먹은 한소율로서는 정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진도를 빼고 싶었다.

하지만 앞에서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도 Love가 아닌 Like로 해석하고 천연덕스럽게 ‘네 저도요.’라고 말할 인간이  인간이었다.

정도찬은 가파른 산 위에 우뚝 솟아있는 대체 어떻게 지었나 싶은 난공불락의 산성과도 같은 남자인 것이다.

물론 이는 한소율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때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나도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크리스마스는 어영부영 넘어가 버렸고….

애초에 지금까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아무런 명분도 없이 친해지자며 다가서는 건 난도가 너무 높았다.

‘밸런타인데이가 언제였더라….’

평소라면 상술이자 마케팅에 불과하다며 단순한 하루라고 치부하고 넘겼던 날이 왜 이렇게 기다려지는 걸까….

한소율은 자신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새 2명의 8강 진출자들이 정해졌고, 16강 C조의 대국 날이 다가왔다.

16강은 단판 승부였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3번기로 진행이 되었는데.

첫날에 1국과 2국을 두고, 승부가 나지 않는다면 다음날에 3국을 두는 식이었다.

하루 만에 끝장 승부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시청자들도 많았지만, 방송국으로서는 가장 주목도가 높을 것이 뻔한 3국의 시간이 너무 늦은 저녁으로 밀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에 이런 구조가 된 것이었다.

평소처럼 일찍 출발해 스튜디오에 일찍 도착한 정도찬은 자신보다 먼저 대기실에 와있는 정휘운을 보며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이 드디어 이 형님이 너한테 세상의 쓴맛을 보여주는  아니겠냐? 너무 기대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뭐지?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가?”
“정신이 나갔다니 말이 심하네. 미쳤다고 해줄래?”
“......?”

정도찬은 정휘운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고,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도찬이 입을 열었다.

“우리 둘이 제대로 된 대국을 둬 본지가 얼마나 됐지?”
“연습하거나, 복기하거나, 연구한 거 제외하면 10년은 훌쩍 넘지 않을까?”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시절의 정도찬은 사람과의 대국을 꺼렸고, 정휘운을 비롯한 정도찬의 친구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정도찬과 친한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정도찬과 대국을 둬 볼 기회가 없었다.

정도찬이 트라우마를 극복한 이후에도 서로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았고. 결국, 진짜대국이라고  만한 대국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시간이 없었다는 것도 핑계지.’

바둑 한판 둘 시간 따위는 만들면 만들어지는 법이다.

정도찬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도 했고, 프로에 입단까지 했으니 이제 언제든지 서로 원할 때 제대로 붙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굳이 찾아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니, 사실 이마저도 핑계이다.

정휘운은 은연중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과정도찬의 실력이 이제 어떻게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날까봐.

자신이 아무것도 못 하고 정도찬에게 질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정휘운은 아직도 자신이 정도찬에게 처음 패배한 날을 기억한다.

바둑에 입문한 지 4년이나 되었던 자신이 바둑을 배운지 막 1년이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정도찬에게 처음으로 진 날을.

그날 이후로 정도찬은 쭉 정휘운의 목표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갑조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입신의 경지(9단)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혹시?’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32강전의 기보를 보며 산산이 조각났다.

자신은 어렵게 상대하는 갑조 리그의 강자를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쉽게 꺾어버리는 모습을 보자 기가 질린 것이다.

트라우마 때문에 제대로 바둑공부를 못  인간이 어떻게 저런 바둑을 둘  있는단 말인가.

그 날, 정도찬의 기보를 공부하며 정휘운은 다시금 실감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재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정휘운은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내가 이긴다.’

집요하게 정도찬의 기보를 분석한 덕분에 정휘운은 정도찬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도찬이라면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는 순간 약점을 보완하기 시작하겠지….

정휘운이 아는 정도찬은 그런 괴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딱 하루, 정도찬이 아직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단 대회 이후 급격하게 바뀐 기풍에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빈틈이자.

한세빛이 정도찬을 보고 ‘과도기’라고 생각한 이유.

수많은 분석 끝에  미묘한 빈틈을 파악한 정휘운은, 지금 이 순간 정도찬의 약점을확실하게 찌를  있는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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