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51국 - 내전
아무리 정도찬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H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도찬의 실력에 대한 의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은 묘수를 보여주고, 뛰어난 강자를 꺾었다고 해도 한순간에 모든 사람에게서 강자로 인정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정도찬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고, 누군가는 이택윤의 몸 상태가 나빴다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공식전 대국 기록이 얼마 없는 정도찬이 유리한 싸움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력의 증명이라는 것이 그렇다.
프로바둑기사라면 아니, 프로바둑기사가 아니라 대중에게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증명하고 평가받으며 살아가는 법이다.
어려서부터 그의 스승인 신창연의 고뇌와 고충을 보고 자란 정도찬에게 있어 이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시간이해결해 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 정도찬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저기 저 사람 정도찬 아니야?”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니 맞다니까?”
잠시 볼일이 있어 집 근처에 나온 정도찬은 자신을 힐끔거리며 다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두 여자를 보며 한숨 쉬었다.
‘차라리 와서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여기서 ‘내가 정도찬 맞는 데 무슨 용무라도 있습니까?’라며 물어보자니 모양새가 우스웠고,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모른척하자니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결국, 정도찬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답답한 척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보여줬고 그제야 정도찬임을 확신한 두 여자에게 팬서비스를 선사할 수 있었다.
‘이게 은근히 지치는 일이구나….’
역시 메이저 기전은 뭔가 달라도 다른 것인지 32강전 이후 정도찬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지고 있었다.
물론 나왔다 하면 거리의 모두가 알아봐 난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기는 힘든 정도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정도찬을 알아본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으면 ‘뭐지 유명한 사람인가?’ 싶어서 분위기에 휩쓸려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고….
덕분에 조금 지친 몸을 이끌고 기원에 돌아온 정도찬은 그의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도찬: 요즘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음.
도찬: 농담이 아니라 동네 마트 다녀오는 것도 힘들다.
잠시 후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휘운: ㅋㅋㅋ
휘운: ㅋㅋㅋㅋㅋㅋ
휘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찬: 아니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왜 웃음
재영: 이새끼 이거 월클병 걸렸네.
재영: 월클병에는 약도 없는데
세연: [분홍색 토끼가 외면하는 이모티콘]
휘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찬: 아니 나 진지하다고….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정도찬을 놀리던 셋은 정도찬이 최후통첩을 날리자 조금 진지한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휘운: 일단 동네 주변 다니는 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임
재영: 저거 ㄹㅇ임 처음 봤을 때나 좀 신기하지
재영: 자주 보면 그냥 동네 주민1이야.
휘운: 하다못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동네 마트는 다닐 텐데
휘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동네 마트도 못 다녀온다는 건 좀 추하지 않냐?
세연: [노란 병아리가 해롱해롱하는 이모티콘]
휘운: 오랜만에 ㅈㄴ웃었네 ㅋㅋㅋㅋㅋㅋ
재영: 월클병도 적당히 걸려야지
재영: 메이저 기전 한번 나가더니
재영: 아주 지가 국수인 줄 알아.
도찬: 알았으니까 그만해 이것들아….
‘결국,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인가….’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불편하더라도 이렇게 다니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세연: 팬서비스는 중요하니까 잘 신경 써야 하는 거 알지?
재영: 뭐야 쟤가 웬일로 채팅을 다 치냐?
휘운: 속보) 신세연 혼신의 독수리타법중
세연: [노란색 오리가 화내는 이모티콘]
세연: [초록색 오리가 스마트폰을 던지는 이모티콘]
도찬: 그러고 보니까 니들은 팬서비스 어떻게 함?
재영: 난 평범한데…. 정휘운 저 새끼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걸.
재영: 한번 정휘운 팬서비스 괴담이라고 검색해봐.
도찬: ???
도찬: 뭔 짓을 했길래 괴담 소리가 나와?
휘운: 몰라
휘운: 난 하던 대로 했는데?
휘운: 그러니까 다 좋아하던데?
정도찬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정휘운 팬서비스 괴담’을 검색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게시글을 확인했다.
[5시간 동안 지도 바둑 둔 썰 푼다.]
얼마 전에 내가 다니는 바둑학원에 정휘운 6단이 온 적이 있음.
여기 바둑학원 원장님이랑 아는 사이여서 잠시 왔다고 함.
어쨌든 갑조리그 프로바둑기사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ㅈㄴ신기하더라.
뭔가 바둑계 엘리트라서 깐깐하거나 진지충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 친절하고 착했음.
원생들 다 일일이 이름 물어보면서 사인도 해주고, 원하는 사람은 같이 사진도 찍고는 돌아가나 싶더니.
갑자기 이렇게 가는 건 아쉬우니 딱 한 명만 지도 대국 둬준다기에 갑조리거랑 바둑둘 기회니까 바로 손들었지.
내가 제일 빨랐다고 나 지목해주더라
ㅈㄴ 신나서 바로 7점 깔고 지도 대국 시작했는데
ㅅㅂ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한 수 둘 때마다 거의 2~3분씩 이야기함.
지도대국 한 판 두는데 5시간 걸렸는데.
그 5시간동안 정휘운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됐다.
농담이 아니라 싫어도 그렇게 된다.
애초에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거여서 도저히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음.
그냥 온갖 이야기 다 하더니 그때부터 내 바둑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ㅅㅂ 이게 또 쓸데없이 ㅈㄴ 도움 됨.
나도 모르게 몇 시간 동안 그냥 경청하면서 배웠음.
그때 배우고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실력 ㅈㄴ 늘더니 지금은 인터넷 바둑 9단 찍었다.
어쨌든 니들도 정휘운 6단이랑 지도 대국 둘 일 있으면 조심해라.
지도 대국 효과는 끝내주는데 지도 대국을 안 끝내주니까….
ㄴ아니 무슨 정신과 시간의 방이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정신과 시간의 방(못나옴)
ㄴ정휘운 팬서비스 유명하잖아 ㅋㅋㅋㅋㅋ
ㄴ‘끝나지 않는 지도 대국’ 괴담 ㅋㅋㅋㅋㅋㅋ
ㄴ우리 아빠 길거리에서 정휘운 아는척했다가 바로 납치당해서 같이 술 한잔했잖아 ㅋㅋㅋ
ㄴ납치라고 하지 말라고 ㅋㅋㅋㅋㅋㅋ
ㄴ아니 다른 프로였으면 100퍼 구라썰인데 정휘운이라니까 신빙성 생기는 거 실화냐 ㅋㅋㅋㅋ
‘미친 친목질 마스터 새끼….’
어쩐지 만나는 사람마다 정휘운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니….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었다.
도찬: 이거 완전 미친련아냐...
휘운: 미친련이라니 말넘심...
휘운: 그러고 보니까 우리 16강 대진표 언제 나오냐?
도찬: 그거 오늘 나오는 거 아님?
재영: 우리라고 하지 마라….
재영: 아무튼 하지 마라….
세연: [복숭아가 비웃는 이모티콘]
재영: 야!!
정도찬은 말이 나온 김에 한국 기원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대진표가 올라왔는지 확인했다.
각 조 1위는 자신의 조를 제외한 다른 조의 2위들과 매치되기 때문에 조 2위 진출자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정휘운이 조 2위 진출자라는 점.
운이 나쁘다면 정도찬과 정휘운이 16강에서 맞붙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둘 다 애써 언급은 안 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이왕 만날 거 더 높은 곳에서…. 그러니까 이왕이면 결승에서 만나는 게 더 좋지 않은가.
정도찬이 16강에서 정휘운을 만날 확률은 1/7
어찌 보면 높고, 어찌 보면 낮은 애매한 확률이었기에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확률이 낮았다면 지금보다는 덜 신경 썼을 것이고, 아예 확률이 높았다면 진작 마음을 편하게 먹었을 터인데….
‘차라리 빨리 대진표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심정으로 아무런 의미 없이 멍하니 한국 기원의 홈페이지를 새로 고치던 정도찬은 순간 공지사항에 새로운 글이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TH 칼텍스 배 전국 기전 16강 대진표.
“떴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정도찬은 깜짝 놀란 김수정에게 괜찮다며 손짓하고는 공지사항 탭에 들어가 대진표를 내려받았다.
마침 정휘운도 대진표를 확인한 것인지 정도찬의 핸드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저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까.
조금 불안했다.
정도찬은 대진표를 열어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16강 C조 그의 상대는….
정휘운 7단.
그의 친구였다.
‘이게 이렇게 되네….’
정도찬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휘운: 아 ㅋㅋ 이게 이렇게 되네
휘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휘운: 인기가 너무 많아서 동네 마트도 못 가는 인기스타 정 사범님
휘운: 한번 잘 해 봅시다.
재영: 뭐야 16강에서 둘이 붙어?
세연: [깜짝 놀라는 분홍색 토끼 이모티콘]
휘운: 그렇게 됐다.
재영: 괜찮아?
휘운: 뭐 어쩌겠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해봐야지
휘운: 어차피 같은 대회 참가하는 한 언젠간 붙을 거였어.
휘운: 내가 내 친구랑 16강에서 대국해야 한다니 ;ㅅ;
휘운: 이러고있을 수는 없잖냐.
재영: 상상만 해도 엿 같으니까.
재영: 하지 마라...
메시지를 읽은 정도찬은 피식 실소를 지었다.
어차피 다 같이 프로바둑기사로서 활동을 하는 이상 언젠가는 마주칠 일이었다.
도찬: 내가 내 친구랑 16강에서 대국해야한다니 ;ㅅ;
도찬: 힝 ;ㅅ;
재영: 돌겠네 진짜
세연: [분홍색 토끼가 토하는 이모티콘]
어쨌든 그렇게 정도찬대 정휘운. 창연기원의 내전이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