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48국 - 죽음의 조
정도찬의 주변인 중에서 예선전 탈락의 쓴맛을 본 것은 김수정만이 아니었다.
대진운이 좋았던 정휘운은 어찌어찌 살아남아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대진운이 더럽게도 없었던 이재영은 4회전에서 같은 갑조리거를 만나 패배해 광탈의 아픔을 맛본 것이다.
사실 TH 칼텍스 배 예선전에서 떨어지는 프로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까뉴스거리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 것은 진 것이고, 탈락한 것은 탈락한 것이었다.
이재영의 탈락 소식을 들은 정도찬은 정휘운과 함께 이재영의 집에 찾아갔다.
빠른 탈락에 상심했을 이재영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정도찬이 생각하는 위로라는 것은 어떤 마음을 어떻게 진심을 담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이재영이 상처받지 않도록 정도찬은 진정성 있는 위로를 던졌다.
“야 너 3회전에서발렸다며?”
“씨발련아.”
“뭐어라고? 예선전 광탈한사람 말이라 안 들리는 데에?”
정도찬과 함께 온 정휘운도 질세라 한몫 거들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바둑의 달인 광탈 이재영 선생아니신가.”
“이새끼들이 진짜.”
“에베벱 꼬우면 본선 진출하시던가.”
“너도 아직 진출한 건 아니잖아!”
“응 난 그래도 지금 떨어져도 체면치레 정도는 했어.~”
“돌겠네! 진짜.”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이재영은 얌전히 둘을 집에 들였다.
원수 같은 놈들이지만 일단 손님은 손님이라는 것인지 이재영은 차를 한잔 내왔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셋은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도찬이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3회전 탈락이면 이번 바둑리그 지명에도 영향이 있는 거 아냐?”
이재영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난 벌써 지명 들어왔어.”
“벌써?”
“하위 지명권으로 나만큼 밥값 하는 사람도 얼마 없잖냐.”
갑조 리그 선수로서의 이재영의 이미지는 일단 하위 지명권하나를 소모해서 뽑아놓기만 하면 적어도 1인분은 꾸준히 해주는 가성비 좋은 든든한 픽이었다.
승률 80% 90%를 찍으며 리그를 학살하고 다니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 급의 상대랑 붙으면 이겨주겠지?’라는 기대에는 항상 부응하는.
소위 말하는 ‘계산이 서는’ 선수인 이재영은 감독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이재영의 말을 들은 정휘운이 살짝 감탄했다.
“이야…. 3회전 광탈한애를 대체 뭘 보고 데려갔대?”
“개새끼야.”
“여억시 국밥 재영, 든든하구먼!”
“진짜 뒤지고 싶어? 어?”
이재영은갑조리그 신입생 시절 그를 지명한 감독이 한 ‘이재영은 마치 국밥같이 든든한 픽.’이라는 인터뷰 덕분에 한동안 바둑팬들 사이에서 국밥 재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재영이 이길 때마다 ‘역시 든든하구먼’이라는 글이 바둑 커뮤니티에 도배되는 것은 덤이었고.
괴상한 별명이라는 게 다 그렇지만 이재영 역시 이 이상한 별명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정도찬이 아직도 정공지능이라는 별명을 들을 때마다 움찔움찔 하는 것처럼 말이다.
별명 이야기를 해봤자 좋을 것이 없었던 정도찬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복기나 좀 할까?”
정도찬의 제안에 이재영은 군말 없이 바둑판과 바둑알을 가져왔다.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낫고, 둘이 하는 것보다는 셋이 하는 것이 낫다.
원래 복기라는 것이 그렇다.
게다가 이재영 자신의 대국 복기이기도 했지만 이건 나중에 32강에서 정도찬이나 정휘운과 같은 조가 될 수 있는 사람의 기풍을 미리 파악할 기회이기도 했다.
‘어휴…. 이것들도 친구라고.’
잠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이재영은 자신의 대국 상대였던 이택윤 협회 8단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휘운이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택윤 협회 8단은 보기 드문 극단적 비관파….”
세 사람은 언제 서로 장난치고 놀았냐는 듯 바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이재영도 탈락의 아픔을 잊고 복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택윤 협회 8단의 기풍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재영을 두고 정도찬과 정휘운은 눈을 마주쳤다.
작전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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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열흘에 걸친 예선전이 드디어 끝나고 TH 칼텍스 배 전국 기전의 본선 진출자들이확정되었다.
TH 칼텍스 배 전국 기전의 32강은 4명씩 여덟 개의 조를 짜 조별 더블 엘리미네이션으로 16강 진출자들을 결정하는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2명씩 짝지어 1대국과 2대국을 치르고. 각 대국의 승자가 승자전에 진출, 이 승자전에서 이긴 사람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반면 1대국과 2대국의 패자들은 패자전을 치르고, 이 패자전에서 이긴 사람이 승자전의 패자와 최종전을 치러 이긴 사람이 조2위로 16강에 진출하는 것이다.
결국, 16강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딱 두 번 이기면 되고, 그마저도 한번 패배하는 것 정도는 허용이 되는.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편한 방식이었지만. 모든 대국이 단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단판 승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와일드카드 2번이자 전체8번 시드인 정도찬은 자연스럽게 H조에 배정되었고.
시드권자의 권리로 이미 다른 조에 지명된 7명을 제외한 본선 진출자들 중 한 명을 지명하여 자신의 조에 넣을 수 있었다.
정도찬은 대회 주최 측에서 보내온 남은 본선 진출자들의 리스트를 보며 고민했다.
‘누구를 지명해야 할까?’
가장 무난한 것은 이 사람들 중 가장 기력이 낮은 사람을 뽑아 첫 승을 챙길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2승을 얻으면 16강에 진출하는데 그중 1승을 비교적 쉽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은 큰 메리트였으니까.
문제는 정말 누가 봐도 이 사람은 기력이 낮다 싶은 사람은 앞 순번의 시드권자들이 이미 뽑아간 상태였다는 것이다.
사실상 실력순으로 밑에서 7명이 뽑힌 상황이나 다름없었으니….
정도찬은 우선 남은 17명 중에서 검증된 실력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갑조리거 12명을 뺐다.
이제 남은 5명의 기보를 분석해서 기력이 가장 낮아 보이는 사람 한 명을 뽑으면 되는데….
‘왜 자꾸 저쪽으로 시선이 가지?’
이택윤 협회 8단.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으로 지명하는 것은 피할 갑조리거의 실력자.
그리고 예선 3회전에서 이재영을 이기고 올라온 장본인.
정도찬이 딱히 복수 같은 거창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바둑계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승부의 세계였고, 내가 아는 누군가가 졌다고 복수를 하겠다고 한다면 프로바둑기사 거의 전원이 복수 대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정도찬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상위권 갑조리거와 자신의 실력 차이가 어떻게되는지.
‘아닌가? 내가너무 오바하는건가?’
어차피 16강이든 8강이든 올라가다 보면 점점 강한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의 대회이다.
굳이 이렇게 지명해서까지 알아보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한소율이 그에게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정도찬은 다시 미리 빼둔 다섯 명으로 시선을 돌렸다.
‘팬들이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추어.’
정도찬은 리스트에서 다섯 명의 이름을 과감히 삭제했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은 프로.’
정도찬은 리스트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고 단 한 명의 이름만 남겼다.
‘그리고 팬들의 기대 이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스타다.’
리스트에 남은 사람은 이택윤 협회 8단.
정도찬은 자신의 손으로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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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찬의 지명을 마지막으로 남은 16명은 무작위 추첨으로 각 조에 2명씩 들어가게 되고 여덟 개의 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조가 발표되자 기다렸다는 듯 모든 관심이 이 여덟 개의 조와 본선 진출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정도찬이 속한 H조였다.
[시드권자 전원 지명 완료, 드디어 본선이다!]
[H조 정도찬(시드) - 이택윤 – 유은우 – 한예준]
[전원이 우승 경험자인 죽음의 조 탄생! H조 집중조명]
ᄂ정도찬은 2단따리인데 무슨 우승 경험자야.
ᄂ아 ㅋㅋ 아무튼 초단대회 우승했다고~
ᄂ요즘은 제한 기전 우승도 우승이라고 쳐줌?
ᄂ나 뉴비라 잘 모르는데 다른 애들은 어디 우승한 거야?
ᄂ딱 정리해준다 정도찬 2단 – 초단대회, 이택윤 8단– 갑조리그, 유은우 9단 – 한중최강자전, 한예준 9단 – LC배
-다른 건 모르겠는데 H조 꼬라지 보니까 정도찬이 진짜 미친놈인 건 확실하다.
ᄂㄹㅇ ㅋㅋ 정도찬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택윤 지명한 거냐 ㅋㅋㅋㅋㅋ
ᄂ이택윤 지명 안 했어도 광탈인데 이택윤 지명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ᄂ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거지.
ᄂ고마워 형! 앞으로 택윤신 사는 곳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 절할게!
-이택윤 지명한 건 둘째치고 하필 무작위 배정 두 명이 유은우하고 한예준 ㅋㅋㅋㅋ
ᄂ진짜 이건 하늘이 정도찬을 버린 거다.
ᄂ그래도 저 둘이 전성기가 지난 지가 언젠데
ᄂㅇㄱㄹㅇ 실제 기력은 잘 쳐 줘봐야 7단 정도임.
ᄂ그건 너무 내려친 거 아니냐?
-내가 딱 말해준다. 일단 이택윤이조1위고 유은우나 한예준 둘 중 한 명이 조 2위로 올라간다.
ᄂ우리 집 개새끼도 그런 예상은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도찬의 2패 탈락을 예상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아마추어’ 정도찬은.
스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