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7국 - 범인(凡人)과 천재(天才)
신재윤 연맹 5단은 생계형 프로바둑기사이다.
다른 사람처럼 인공지능을 이기겠다, 국수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바둑에 재능이 좀 있었고, 어쩌다 보니 프로바둑기사가 되어서 이 일로 먹고사는 생계형 프로바둑기사.
그에게 프로바둑기사란 말 그대로 직업이었으며, 바둑은 일이었다.
한국바둑리그 을조리그에만 소속돼도 대국료만으로 최소 4천만 원의 수입이 보장되고, 승률에 따라 1억이 넘는 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다.
일과 삶의 균형도 완벽하게 보장되는, 나쁘지 않은 직업.
신재윤 연맹 5단에게 있어서 프로바둑기사는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TH 칼텍스 배 전국기전은 일종의 이직 면접과도 같은 일이었다.
본선 진출은 꿈에도 꾸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낸다면 더 괜찮은 조건, 더 괜찮은 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대회.
그래서 예선전의 대진표를 확인한 신재윤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운이 좋군.”
그의 1회전 상대는 11살짜리 어린 아마추어 여자아이.
아무리 그가 먹고살기 바쁜 생계형 프로바둑기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마추어, 그것도 11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던 1회전 탈락은 확실하게 면했다.
‘올해는 대충 4회전까지는 올라갈 수 있겠네.’
본선 진출? 그런 건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갑조리거를 포함한 수백 명의 바둑기사들이 참가하는 이 예선전에서 단 24명에게만 허락된 자리가 본선이었다.
게다가 이 대진표대로 큰 이변이 없다면 4회전 상대는 갑조리거중 한 명이 되리라.
을조리그에서도 간당간당한다는소리를듣는 자신이 갑조리거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신재윤은 자신의 분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4회전이면 그래도 백수 신세는 면하려나….’
아마 작년이랑 비슷한 급의 팀에 작년과 비슷한 조건으로 취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승리수당 300만 원, 패배수당 150만 원. 보장수당 4천만 원.
그의 몸값이었다.
중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는 프로 중에서는 1승당 2천만 원, 3천만 원도 받아가는 사람도 있다던데….
‘애초에 나랑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재윤은 자신의 분수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저 올해도 을조리그의 지명을 기다리며 더 좋은 조건을 원하는 그저 그런….
생계형 프로바둑기사였다.
#
1월 10일. TH 칼텍스 배 전국기전 예선전 1일 차.
대회장에 도착한 신재윤은 언제봐도 압도되는듯한 대회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명의 인파.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참가자만 수백 명이 넘는 기전이다.
참가자가 워낙 많아 나눈다고 쳐도 만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단순히 새해의 첫 메이저 기전이었기에 구경을 온 사람들도 있고.
갑조리그의 인기 기사들이 참가하는 기전이었기에 그들을 보러 온 팬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날 알아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려나.’
그래도 나름 을조리그 터줏대감인 자신인데 한 두 명 정도는 알아보지 않을까?
귀찮아지면 어쩌지?
라는 생각은 몇 년 전에 버렸다.
사람들은 놀라울 만큼 신재윤에게 무관심했다.
매년 그래왔고 올해도 그랬다.
아마 내년도 그렇겠지.
신재윤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대회장의 입장했다.
그러자 아는 얼굴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다가왔다.
“신 프로, 오랜만이네?”
“아…. 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한시우 연맹 6단.
신재윤과 비슷한 처지의 프로기사였다.
아니 사실 저쪽이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
을조리그의 참가 제한은 5단까지.
6단부터는 좋든 싫든 갑조리그 이상의 리그에서활동해야 한다.
비교적 승단점수를 쌓기 쉬운 을조리그와는 달리 갑조리그는 지명을 받는 것부터가 문제다.
혹시 어쩌다가 지명을 받는다고 해도 그 정글과도 같은 곳에서 꾸준히 승리를 쌓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6단의 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말도 마라 죽겠다 죽겠어. 나 완전 백수야.”
한시우 6단은 지명 자체가 들어오지 않은 경우였다.
을조리그에서도 애매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애매하다는 말은 신재윤 자신도자주 듣는 말이었다.
지금의 한시우의 모습이 미래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
신재윤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었다.
“승단하기 싫다….”
애매한 실력을 갖춘 프로들의 딜레마 중 하나였다.
리그에서 버티다 보면 승단점수는 쌓이기 마련이고, 결국 언젠가는 6단으로 승단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6단으로 승단하기 싫다고 리그에 참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시우는 그런 신재윤을 보며 이해한다는 듯 어깨들 두드려주며 말했다.
“벌 수 있을 때 벌어놔. 작은 바둑학원 하나 정도는 차릴 돈은 있어야지.”
“요즘은 기원도 벌이가 나쁘지 않다더라고요.”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프로바둑기사인데 바둑 보급에 힘써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들은 신재윤은 생각했다.
‘바둑 보급이라….’
과거부터 바둑계의 생태계는 이렇게 돌아갔다.
6단의 벽을 넘어선 프로들은 계속 활동을 하고,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전국으로 퍼져 바둑 보급에 힘을 쏟는다.
그 와중에 기재가 있는 아이들이 발견되고 그 아이들은 조금 더 훌륭한 스승의 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프로바둑기사가 된다.
그렇게 프로바둑기사가 된 아이들 중에서도 6단의 벽을 넘는 아이와 못 넘는 아이가 갈리고.
그 이후로는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
바둑계의 재부흥 이후 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뿐이지 기본적으로는 이게 바둑계를 유지하는 핵심 생태계였다.
그래서 연맹이고 협회고 바둑 보급은 중대사로 다뤘고, 바둑학원의 원장들에 대한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돈벌이는 기원이 더 괜찮을지 몰라도 바둑학원을 차리면 최소한의 명예가 보장된다.
그것을 생각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재윤은 잠시 바둑학원의 원장이 된 자신을 상상했다.
어린아이들을 상대하는 건 힘들겠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미래인 것 같았다.
#
1회전 시작 시간이 되었다.
신재윤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바라봤다.
많이 추웠던 건지 검은색 코트에 붉은색 목도리와 벙어리장갑그리고 하얀색 귀도리로 중무장한 모습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벙어리장갑을 벗은 소녀, 김수정은 신재윤에게 인사했다.
아직 온풍기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아 추운 건 여전했는지 김수정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안녕하세요. 김수정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나중에 결혼해서 딸아이를 낳으면 이런 느낌일까.
신재윤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신재윤은 프로였고 김수정은 아마추어였다.
덕분에 누가 하수인지는 명확했고, 흑 돌은 김수정이 잡게 되었다.
입때까지만 해도 신재윤은 이번 대국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김수정이 그저 바둑을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고, 추억 삼아서 이 대회에 참가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운이 좋으면 유명 프로바둑기사에게 직접 배울 기회였으니 그것을 노리고 참가하는 아마추어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그저 간단한 지도 대국 한 판.
신재윤이 이 대국에 가지고 있는 인식은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포석 진행이 깔끔하네.’
누가 가르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본기가 괜찮다.
말 그대로 무난한 진행이었으나, 흑의 입장에서 포석을 무난하게 진행했다는 것은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렇게 우변과 하변에 거점을 만든김수정은 조금씩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걸벌써 찌르고 들어온다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공격.
실리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걸어오는 싸움.
하지만 마구잡이로 공격해오는 것은 아니었다.
공격하나하나에 확실한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를 파악해도 지금 당장 따라가지 않는다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신재윤은순수하게 감탄했다.
‘진짜 열한 살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수정은 수준 높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여유롭던 신재윤의 태도가 점점 진지해졌다.
지도 대국이라고 생각하며 방심하다가는 제대로 당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재능이지?’
신재윤은 김수정의 재능이 뛰어남을 인정했다.
어쩌면 몇 년, 아니 빠르면 올해나 내년에 입단할지도 모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딱 거기까지였다.
을조리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신재윤 자신을 이기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김수정이 이렇게밀어붙일 수 있는 건 그녀가 선수를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재윤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며 선수를 타개하고는 좌변에 성을 쌓고 문을 걸어 잠갔다.
프로다운 놀라운 실력의 축성술이었다.
백의 집이 순식간에 단단해지자김수정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저단단한 성벽을 두드리는 것은 무리였다.
자신의 돌을 험하게 다루는 편인 김수정이었지만 달걀로 바위를 깰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결국, 김수정은 흑 세력을 넓히는데 자신의 선수를 소모했다.
하지만 신재윤의 견고한 성에 비하면 모래성과 같은 세력이었고.
신재윤의 눈에는 그 모래성의 약점이 훤히 보였다.
공수가 역전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흑 세력은 계속 밀리고 집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때쯤 신재윤은 승리를 확신했다.
‘끝났네.’
아무리 봐도 뒤집을 구석이 없었다.
신재윤 자신이 저만큼 밀렸으면 바로 돌을 던졌을 정도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김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혼전을 만들어 신재윤의 실수를 유도했다.
그 유도라는 것이 신재윤과 같은 중견급 프로기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얕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신재윤은 바둑을 이어가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진심으로 이길 생각이었구나.’
김수정은진심으로 그를 이길 생각으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 저럴 수 있는 걸까?
자신과 실력 차가 크게 나는 사람을 상대하며 어떻게 진심으로이기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적어도 신재윤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눈에 갑조리거들은 높고 거대한 벽이었고,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계가 직전 김수정이 돌을 던져 신재윤 자신의 승리로 끝났지만.
신재윤은 대국이 끝난 후에도 계속 바둑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래전에 잊은 묘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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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어요….”
정도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무룩하게 걸어 나오는 김수정을 쓰다듬어줬다.
운이 나빴다.
6단승단을 목전에 둔 을조리그의 터줏대감이라니.
1회전부터 너무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것이다.
“수고했어.”
김수정은 잘 했다.
정도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바둑판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던 김수정은 몰랐지만, 밖에서 관전하고 있던 정도찬의 눈에는 신재윤이 이번 대국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중간에 바뀐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수정이 휘두른 칼이 6단을 목전에 둔 현역 프로를 확실하게 위협했다는 뜻과도 같았다.
어쩌면 김수정을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한 명의 프로바둑기사로서 대해야 할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먼 곳에서 조금씩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