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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화 〉44국 - 작은 도전 (46/75)



〈 46화 〉44국 - 작은 도전

오늘의 바둑 공부를 마치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김수정은 익숙한 광고를 보며 정도찬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거 스승님이 나가는 대회 맞죠?”

김수정의 말을 들은 정도찬은 잠시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TV 광고를 유심히 바라봤다.

TH칼텍스배 전국 기전의 광고였다.

“응 맞아.”
“우와아….”

김수정은 이제야 자신의 스승이 프로바둑기사라는 것을 실감했다.

정도찬이 알았다면 크게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생각이었지만 김수정은 김수정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김수정은 지금까지 정도찬이 프로바둑기사로서 활동하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정도찬이입단하고 출전한 대회가 초단 대회뿐이었고, 그마저도 김수정은 정도찬이 대국을 진행하고 있을 때 학교에 가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제동행전은 애초에 일종의 이벤트 대회였으니까 별생각 없었고.

그 외에는 바둑 예능이나 인터뷰, 행사 등의 활동이었는데 이런 일을 하는 정도찬을 보며프로바둑기사임을 실감하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애초에 저런 활동들은 해설자로 일할때도 했었으니까 더더욱….

그런데 그런 정도찬이 말 그대로 TV에서나 보던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니 이제야 정도찬이 프로바둑기사라는 게 실감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김수정은 정도찬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스승님 대단해!’

갑자기 자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김수정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정도찬이 말했다.

“수정이 너도 참가는 가능해.”

정도찬의 말에 김수정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제가요? 정말요?”
“그래, 예선만 통과하면 가능하지.”
“......?”

김수정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자 정도찬은 설명을 이어갔다.

“시드권자 8명, 예선전 진출자 24명 이렇게 32명이 본선에 진출하는데 예선전 자체는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거든.”
“그럼 스승님도 예선전에 나가시는 거예요?”
“아니, 나는 시드가 있으니까 32강부터 시작해.”

8장의 시드권은 전년도 대회의 4강 진출자들이 4장의 시드권을 가져가고, 한국 기원의 연구생 시드가 2장, 와일드카드 시드가 2장 이런 식으로 분배가 되었다.

그리고 정도찬은 초단 대회 우승자로서 와일드카드 시드를 신청할 자격이 있었고 운이 좋아 한 장의 와일드카드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만약 와일드카드 신청자가 셋 이상이었다면 와일드카드전을 따로 치러야 했으리라.

‘말 그대로 운이 좋았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도찬을 보며 김수정은 손을 들며 말했다.

“저도! 저도! 예선전 나가고싶어요!”

자신이 TV로만 보던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김수정은 상당히 들떠있었다.

그런 김수정의 모습을 본 정도찬은 고민에 빠졌다.

‘괜찮으려나….’

정도찬마저 시드권에 목을 맬 정도로TH칼텍스배 전국 기전의 예선전은 복마전이 따로 없었다.

TH칼텍스배 전국 기전의 개최 시기가 문제였는데, 1월에 시작하여 3월에 끝나는 이 기전은 바둑 리그 선수들이 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메이저 기전이었기 때문이다.

바둑 리그는 12월에 포스트시즌이 끝나고, 4월에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니까….

 시즌이 끝나 백수가 된 바둑 리그 선수들이 대거 참전하는 게 바로  TH칼텍스배 전국 기전이었고, 이런 바둑 리그 선수들 대부분은 시드권이 없으므로 예선전에 참가한다.

대국 한 번에 몇백만 원을 받는 1티어 바둑 기사들이 예선전에 득실득실해지는 것이다.

매년 [충격! 갑조리그 누구누구 예선 탈락!]과 같은 기사가 일상적으로 올라오는 지옥이 바로 TH칼텍스배 예선전이었으니….

그런 곳에 김수정을출전시킨다?

‘아…. 그건 좀….’

1회전 탈락하고 우울해하는 김수정의 모습이 벌써 보이는듯한 느낌이었다.

정도찬은 필사적으로 김수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음…. 수정아, 사실 이 대회 예선전이 많이 힘들거든…. 다른 대회를 알아보는 게 어떨까?”

김수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2월에 괜찮은 아마추어 대회가 하나 있는데 그건 어때?”
“시러요!”

김수정은 팔짱을 끼고 입을  닫았다.

자신은 무조건 TH칼텍스배 예선전에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김수정을 보며 정도찬은 골치가 아파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정도찬은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그럼 앞으로 포석 공부시간 3배!”
“흐에?”

청천벽력같은 정도찬의 말에 김수정은 너무하다는  정도찬을 쳐다봤다.

하루  시간도 지옥인데 갑자기 그걸  배로 늘려버리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스승은 악마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안 하겠다고 하면 허락 안 해주실 것 같은데….’
.
포석 공부시간을 3시간으로 늘리고 예선전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예선전을 포기하고 포석 공부시간을 1시간으로 유지할 것인가.

김수정은 짧은 10살 평생 처음 마주한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정도찬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하는 김수정을 보며 생각했다.

‘엄청 참가하고 싶긴 하나 보네….’

포석 공부시간 3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기겁을 하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고민하는 것을 보니 정도찬도 슬슬 고민이 됐다.

어쩌면 한 번쯤은 경험 삼아서 참가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시작한 것이다.

결국, 거듭된 고민에 뇌가 반쯤 정지된 김수정이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을 때 즈음 정도찬은 결단을 내렸다.

“생각해보니까 3시간은 너무 길고 2시간으로 하자.”

순간 김수정의 마음속 양팔 저울이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네!”

김수정에게는 포석 공부 2시간도 길었지만, 예전에 LC배 아마추어 대회 때 한번 경험해본 적이 있었으니 어떻게든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계산에는 큰 오류가 있었으니….

“그럼 예선전이 1월 10일이니까 그때까지 힘내보자!”
“네!”

라고 힘차게 대답한 김수정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월…. 10일이요?”
“그날이 예선전 첫날이니까 더 걸릴 수도 있고.”

김수정은 현실을 부정하듯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죠?”
“12월 22일.”
“저 그냥 안 할래요.”
“이미 늦었단다.”
“힝….”

LC배 아마추어 대회 때 단 일주일간 포석 공부를 2배로 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거의 3주 동안 포석 공부시간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니!

김수정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도찬도 이번에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고작 포석 공부시간을 늘리는 거로 김수정의 실력이 쑥쑥 늘어서 본선에 진출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비록 김수정이 그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을 만나 지게 되더라도 잘 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때 지더라도 그 패배를 통해 무엇이라도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기를.

정도찬은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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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식사 도중 김수정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했다.

“왜 우리 학교 겨울 방학은 27일부터인 걸까요?”

그건 정도찬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말이었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은 정도찬에게 ‘방학’이란 단어는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곧 김수정의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지 못하고 있던 정도찬은 순간 당황했지만,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글쎄, 그건 교장 선생님 마음이 아닐까?”

김수정은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치만…. 오늘이 방학식이었으면 크리스마스이브부터  휴일이었는걸요.”

3일만 더 일찍 방학을 시작했다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한 번 더 등교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학사 일정을 짰냐는 것이 김수정의 주장이었다.

듣다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정도찬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인가….’

작년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더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냥 평범한 하루였다.

기원의 죽돌이들…. 아니 손님들도 크리스마스만큼은 밖에서 놀고싶었던 건지 손님도 별로 없어 한적했다는 기억만 있었을 뿐.

아주 평범하게 아침에 기원을 열고, 저녁에 신세연이 찾아와 크리스마스 선물이랍시고 케이크 하나 사다 줘서 같이 먹고.

딱 그 정도인 하루였다.

‘올해는 크리스마스파티 같은 거라도 해야 하나….’

정도찬은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올해만큼은 김수정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어린애니까 산타 같은  믿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것이 무서워졌다.

지금이라도 산타 분장을 구해봐야 하나?

선물은 뭘 준비해야 하지?

갑자기 정도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정도찬은 김수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올해도 산타 할아버지가 오실까?”
“......?”

김수정은 정도찬이 이상하다는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세상에 산타가 어디 있어요?”
“그래, 그렇지…. 산타는 없지….”

요즘 애들은 조숙하구나….

참고로 정도찬은 창연도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산타의 존재를 믿고있었다.

산타가 아니라면 정도찬이 다른 사람에게 단 한 번도 말한  없는 그가 원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골라서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정도찬의 부모님이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마다 그의 일기를 몰래 읽어 정도찬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계셨던 것이었지만….

어쨌든 정도찬과는 다르게김수정은 제대로 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 정도찬은 김수정에게 직접 물어봤다.

“수정이 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받고 싶어?”
“비밀이에요.”
“아…. 그래…. 비밀이구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는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애초에 선물을 주고받는데 ‘난 이게 필요하니까 이걸 선물로 줘!’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건 그러네….”

‘지금까지 이런걸 챙겨본 적이 있어야지….’

크리스마스선물은커녕 생일도 제대로 안 챙기는 정도찬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수정은 계속 열변을 토했다.

“선물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니 물론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그 선물을 고르는 마음과 생각 그리고 배려가 중요한 거라고요!”
“아…. 알았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잘 알아들으셨겠지?’

김수정은 정도찬이 신세연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데 참고하라고 조언을 건네고 있었다.

요즘 신세연이 부쩍 크리스마스를 의식하는듯한 메시지를 자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정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지….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나?’

당사자인 정도찬은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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