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3국 - 대잔치
바둑 대잔치.
바둑계의 올스타전이라고 불리는, 매년 연말마다 열리는 이벤트이다.
그해의 타이틀 홀더들과 메이저 대회 우승자들, 그리고 인기투표로 뽑힌 프로바둑기사들이 모여 여러 종류의 대국을 하는 이 이벤트는 참가 자체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할 정도로 바둑기사들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막 입단한 정도찬도 마찬가지.
정도찬 역시 바둑 대잔치에 참가할 수만 있다면 참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온갖 화제를 이끌며 이름을 알리고, 여성 팬들의 표 중 상당 부분을 가져왔다고는 하지만 역시 아직 탑티어 바둑기사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던 정도찬은 아쉽게 바둑 대잔치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도수 없는 안경을 낀 정도찬은 나오미와 인사를 나눴다.
“도찬 씨!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아, 저번에는 고마웠어요.”
정도찬은 오랜만에 만난 니시카와 나오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신세연과 함께 일본에 갔을 때 온천을 추천해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였다.
“에이, 별거 아닌걸요.”
“아니에요.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정도찬의 말을 들은 나오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큰 도우움? 젊은 남녀 둘이 같이 혼욕 온천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큰 도움이라고 하시는 걸까요오?”
“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말 궁금한걸요오? 남녀둘이 단둘이서 무슨 일을 했을까아?”
나오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정도찬을 바라봤다.
마치 젊은 커플을 놀리는 아저씨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도찬이 당황할 거라는 나오미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온천이니까…. 그냥 목욕했는데요?”
“......넹?”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에 나오미는 고민했다.
과연 이게 고도의 포커페이스일까 아니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하긴 도찬 씨도, 신 사범님도 프로니까….’
심지어 정도찬은 하윤서와의 스캔들로 기자들에게 시달려본 경험까지 있지 않은가?
나오미는 정도찬이 일부로 아무 일도 없던 척하는 것이라는 걸 반쯤 확신했다.
“저한테까지숨기실 필요는 없어요.”
“네? 뭘요?”
“......?”
그 순간 니시카와 나오미는 깨달았다.
이 남자는 ‘진짜’라는걸.
‘아니, 남녀 단둘이 일본 여행에 혼욕탕까지 들어가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정말?’
나오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나오미는 이 자리에 없는 신세연에게 애도를 표했다.
‘힘내세요. 신 사범님….’
어쩌다가 저런 남자를….
그런 나오미의 생각은 알 길이 없는 정도찬은 그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같이 해설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비록 정도찬이 프로바둑기사로서는 바둑 대잔치의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지만, 그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가장 보고 싶은 해설 콤비’ 투표에서 정도찬과 니시카와 나오미가 1위를 차지했고, 그 덕분에 프로바둑기사가 아닌 해설자로서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좀 아쉽지만 이게 어디야.’
정도찬은 이렇게라도 바둑 대잔치에 참가할 수 있는게 어디냐며 기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엄마…. 아빠…. 애들아…. 사장님…. 꼭 무사히 돌아갈게요….’
나오미는 투표의 결과를 본 순간부터 모종의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나오미는 정도찬을 사적으로는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적으로는, 즉 해설자 정도찬은 상당히 꺼렸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입만 열었다 하면 폭탄이 펑펑 터지는데 좋아할 수가 없지 않은가!
보는 사람으로서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옆에서 수습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나오미가 주소록에 저장해둔 정도찬의 애칭이 ‘재앙의 주둥아리’ 였을까.
나오미가 보는 해설자 정도찬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낫겠지.’
하지만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웬만한 프로기사들은 도전권도 못 따낸다는 타이틀 홀더들에, 수많은 바둑기사를 꺾고 실력을 증명한 메이저 대회 우승자들, 그리고 둘째가라면 서러운 팬들이 고르고 고른 실력자들이 모이는 곳 아니겠는가.
덕분에 니시카와 나오미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아무리 정도찬이어도 저런 사람들의 대국에서 깽판을 놓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도찬 씨! 제발…. 오늘은 사고 치지 마요!”
정도찬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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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대잔치는 모두가 웃고 떠드는 화목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정도찬 역시 이런 분위기에 초를 칠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대국들의 수준이 괜찮아서 정도찬의 눈에 거슬리는 수도 얼마 없었고.
문제는 대국 하나하나의 수준이 너무 좋다 보니 정도찬의 텐션이 끝도 없이 상승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이 자리가 맛이 좋죠? 여길 두겠죠…? 그렇지!”
“아하하…. 역시 정도찬 해설위원도 이 수가 좋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 좋죠, 엄청 좋죠.”
-아니 왜 네가 좋아하는데 ㅋㅋㅋㅋㅋ
-정도찬 저 새끼 해설자가 아니라 관전자 아니냐 ㅋㅋㅋㅋㅋ
-아 ㅋㅋㅋ 골때리네 진짜.
-아 ㅋㅋ 프리미엄 석에서 관람 중이라고~
물론 정도찬의 폭탄 발언이 없다는 거였지 돌발 행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오미의 고생은 여전했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급발진 빈도가 줄은 건 사실이었고.
정도찬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기에 나오미가 은근슬쩍 계속 눈치를 주자 정도찬도 곧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해설을 시작했다.
“여기서 이 수를 뒀다는 건 살아나갈 자신이 있다는 거거든요? 아무래도 이렇게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이렇게 두들겼다는 건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한번 싸우겠네요.”
“여기 이 수가 선수로 보여도 이렇게 두면 사실 후수거든요? 이걸 잘 읽었네요.”
제정신인 상태에서 침착하게 해설을하는 정도찬의 해설은 그 대국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이 당황할 정도로 퀄리티가 좋았다.
-정도찬 오늘은 좀 얌전하네?
ᄂ 프로 입단하더니 몸 사리는 건가?
ᄂ 몸을 사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잘 두니까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거잖아.
ᄂ 그러고 보니까 정도찬 해설 짬이 안돼서 조팝들 대국만 해설했었구나.
ᄂ 심지어 연맹 소속이었으니까 ㅋㅋㅋ
-그런데 정도찬 해설 왜 이렇게 잘함? 거의 족집게인데?
ᄂ 급발진 때문에 저평가돼서 그렇지 해설은 원래 잘했어.
-오늘 정도찬 왜 이렇게 순한 맛이냐
ᄂ ㄹㅇ ㅋㅋ 급발진으로 시작해서 급발진으로 끝나는 게 정도찬식 해설인데 뭔가 아쉬움.
-이런 걸 원하고 뽑은 건 아닌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
ᄂ나도급발진하는 거 보고 싶어서 투표했는데 생각보다멀쩡해서 놀라는 중.
ᄂ 농담이 아니라 웬만한 해설자들 싸대기 후릴 정도로 해설이 깔끔한 듯.
그렇게 정도찬의 해설 실력이 점점 재평가되고 있었다.
그렇게 남녀 혼성 페어 대국, 일색 대국, 맹기바둑, 사활전, 묘수풀이 등의 이벤트성 대국들이 하나하나씩 끝나가고 결국 모두가 기다리던 마지막 대국이 시작되었다.
국수 한세빛과 기왕 김덕수의 대장전.
사실상 이번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국이었다.
마이크가 꺼진 것을 확인한 나오미가 정도찬에게 속삭였다.
“도찬 씨, 이거 제대로 해설할 수 있겠어요?”
유진화 해설위원이 한세빛 국수의 대국을 해설할 때마다 놀림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오미는 정도찬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찬은 태평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시험 하루 전날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며 공부에서 완전히 손을 뗀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나오미는 태평한 정도찬을 보며 살짝 속이 탔지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대국이 시작되고 몇십 분 뒤….
‘모르겠당….’
나오미는 이 대국을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했다.
기력이 약한 그녀로서는 둘이 대체 무슨 수를 읽고 있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으니까.
‘도찬 씨는 괜찮으려나?’
자신이야 어차피 실력파 같은 단어랑은 거리가 먼 해설자이고, 청자에 가까운 해설자이긴 하지만 정도찬은 다르다.
해설자로서 이 자리에 서 있긴 했지만, 그는 엄연한 프로바둑기사였으니까.
대국을 못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도찬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옳다구나 하고 그를 욕하겠지.
그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나오미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실전에서 이런 수를 보죠?”
“무슨 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도찬은 한참 동안 두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국면을 원하는지, 왜 이런 수를 뒀는지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나오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명료한 해설이었다.
한판의 명국이 나오기 위해서는 바둑 두는 사람 둘과 해설하는 사람 하나, 합쳐서 세 명의 고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높은 수준의 대국에 훌륭한 해설이 곁들여지자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한 명국이 탄생했다.
둘의 대국은 대국은 역시나 한세빛의 승리로 끝났지만, 엉뚱하게도 이번 바둑 대잔치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해설자로서 참가한 정도찬이었다.
해설자로서 완벽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재밌는 해설을 하는 해설자.’에서 ‘훌륭한 해설을 하는 해설자.’로 이미지가 바뀐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재평가 대상자인 정도찬은 이 이상 해설에 시간을 쏟을생각이 없었다.
이제 곧 1월, TH 칼텍스배 전국기전이 다가온다.
쉬는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다시 달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