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2국 - 결심
한참을 어색하게 있던 정도찬과 신세연은 결국 온천을 즐기는 척 눈을 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서야 둘은 온전히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따스한 온천수가 몸을 감싸 스며들고 추운 겨울의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이래서 사람들이 온천 온천 하는구나….”
“그러게….”
두 사람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온천을 즐겼다.
말 그대로 피로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세연이었다.
“이 근처에 온천이 그렇게 많다며.”
“나오미 씨가 그러는데 시청이 공인한 온천만 100개가 넘는다는데?”
“100개?”
“그래, 많지?”
깜짝 놀란 신세연이 잠시 눈을 떠 정도찬을 바라보려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몸도 마음도 나른한 지금 정도찬을 의식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자신도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그냥 지금 확 사고 쳐버려?’
잠시 발칙한 상상을 한 신세연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서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이럴 때는 정도찬쪽에서 조금만 먼저 다가와 주면 좋으련만….
저 바보 같은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유유자적 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렇게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자기는 아주 여유롭다 이거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신세연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중에 은퇴하면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넌 이런 데서 사는 거 어때?”
그래 봤자 개미 눈물만큼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뿐이었지만.
신세연으로서는 나름 용기를 낸 결과였다.
“평생 살기에는 너무 조용한 동네 아닌가?”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좋지 않겠어?”
“하긴….바둑 둘 때 방해받을 일은 없겠네.”
신세연은 준비하고 있던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나중에 이런 데서 같이 살래?”
그 말에 정도찬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네.”
“뭐…. 뭐?”
“왜 그렇게 놀라 자기가 먼저 말해놓고.”
정도찬의 대답에 신세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일이 자연스럽게 풀린다고?’
신세연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용한 시골에 도장 차려서…. 우리 도장 식구들이랑 다 같이 살면 좋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수정이도 다 컸을 테고.”
“아….”
그럼 그렇지.
그렇게 당해놓고 또 기대한 자신이 바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렇게 사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신세연은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 그냥 해본 말이야.”
“나도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거든?”
“바보.”
신세연은 괜히 정도찬이 원망스러웠다.
가끔보면 정도찬은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신세연은 몰래 이를 악물었다.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거면 한 짝은 터질 각오 하고 있어라….’
정도찬이 들었다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신세연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바보는 자신의 앞에서 ‘결혼하자!’라고 말해도 ‘에이아니겠지~’ 하고 넘기는 목석 중의 목석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멀리 갈 필요 없이 당장 하윤서만 봐도 그랬지 않았는가?
그 일은 신세연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정도찬의 공략 난이도를 실감하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에둘러 말하는 것도 안 되고, 직접 말하는 것도 안 되고.’
그냥 머리끄덩이 잡고 키스라도 해야 알아주려나 싶었지만 아쉽게도 신세연에게는 맨정신으로 그렇게까지 할 용기는 없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술기운의 힘을 빌려 덮쳐도 이 인간이라면 ‘아 얘가 많이 취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겠지.
난공불락.
공격하기가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바둑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사람.
정도찬은 그런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신세연은 오히려 궁금해졌다.
정도찬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바둑을 좋아하는 것인가.
“넌 왜 바둑을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물어보면 안 돼?”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도찬은 당황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바둑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재미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정도찬은 포석을 좋아했다.
어렸을 적의 정도찬은 별을 구경하고, 별자리를 잇는 것을 좋아했는데.
포석을 두는 것이 마치 별자리를 수놓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다음의 이유는 ‘부모님이 좋아해서.’
정도찬의 부모님은 바둑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찬에게 바둑에 재능이 있음을 기뻐했고, 정도찬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지해줬다.
그러면 그다음은?
트라우마로 고생하고, 바둑을 그만두는 일로 부모님과 다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바둑을 둬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고민한 정도찬은 드디어 대답을 찾아냈다.
“그냥.”
그냥 바둑이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구나….”
신세연은 그런 정도찬을 단번에 이해했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정도찬이 그냥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신세연은 드디어 용기를 짜낼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온천에 들어와 있던 탓인지 정신이 살짝 몽롱해 오히려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고백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신세연은 입을 열었다.
“난 여류 명인이 될 거야.”
“아까부터 대화 주제가 너무 빨리 바뀌는 거 아냐?”
“시끄러우니까 그냥 들어!”
“넹….”
신세연은 눈을 뜨고 정도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넌 언젠가 명인이 되겠지.”
정도찬은 이번에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언젠가는명인 타이틀을 가져올 생각이었으니까.
명인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그만큼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여류 명인이고네가 명인이 되는 거잖아?”
앞으로 한 마디.
앞으로 한 마디만 더 말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럼…. 그때가 오면…. 나랑!”
신세연은 최후의 용기를짜냈다.
하지만….
“아니.”
정도찬도 눈을 뜨고 신세연을 바라봤다.
“난 너랑 명인전에서 만나고 싶어.”
‘아….’
그렇게 말하는 정도찬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온몸에 들어갔던 긴장감이 탁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이 바보가….’
순간 그녀가 보는세상이 빙글 돌았다.
그게 그녀의 혼욕 노천탕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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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연이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었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그리고 머리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뭐라고 형용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편안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을 정도로.
그런 그녀를 방해한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힘들면 중간에 나오지 뭘 그렇게 버티고 있었어.”
정도찬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니 눈앞에정도찬의 얼굴이 보였다.
‘뭐지, 꿈인가?’
그도 그럴 것이 시야가 좀 이상했다.
정도찬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몽롱했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자 신세연은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정도찬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뭐야 꿈 맞네.”
“뭔 헛소리야?”
“됐어, 꿈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신세연은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정도찬은 반쯤 포기한 듯 말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차가운 얼음주머니라도 올려놓은 것인지 이마는 시원했고, 무릎 베게는 따스했다. 그리고 눈을 뜨면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이게 천국이지.’
신세연은 눈을 감은 체 그대로 그 상황을 즐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꿈이라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신세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거 진짜 꿈 아니야?”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나비가 되는 꿈이라도 꿨어?”
“아니 그건 아닌데….”
‘오히려 좋아….’
꿈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점점 현실감을 회복하고 있자니 슬슬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용기를 내서 고백하려는데, 그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막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 났다.
어쩌면 일생일대의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신세연은 이를 악물었다.
“명인전에서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나 좀 들어보자.”
‘별 이유 아니면 각오해라….’
신세연은 어딜 꼬집어야지 정도찬이 최대의 고통을 느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별 시답잖은 이유였다면 바로 응징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야…. 난 네가 생각하는것보다 네가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짧은 대답이었고,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대답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정도찬의 대답을 들은 신세연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오늘은…. 오늘은 봐준다.”
“뭘?”
“있어 그런 게.”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명인전에서 보자.
신세연 자신이 입신의 경지라는 9단에 이를 수 있을지, 9단이 되는 데 성공하더라도 명인전에 진출할 수 있을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모든 일이 잘 풀려 명인전에서 정도찬을 만나게 된다면….
‘밟아버릴 거야.’
그리고 정도찬의 면전에 대고 말할 것이다.
너와 어울리는 여자가 이 자리에 있노라고.
다음 주.
성황리에 개최된 세계 여자바둑 최강자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참가자 중에서도 최약체로 손꼽히던 한 명.
신세연의 우승이었다.
신세연 협회 6단.
특별 승단 규정으로 인해 7단 승단.
그녀의 목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