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1국 - 휴식
신세연은 맞은편에 앉아 바둑판에 집중하고 있는 정도찬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사실 신세연도 이렇게 정도찬과 같이 일본에 왔다고 해서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일본에 온 지 벌써 2일째.
놀랍도록 아무일도 없었다!
한창때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여행…. 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행 비슷한 걸 왔는데.
정말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정도찬 주변에 이상한 여자들이 꼬여서 심란하던 신세연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까지 대가며 정도찬과단둘이서 일본에 오는 초강수까지 뒀는데.
정말 진짜로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신세연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도찬은 멍하니 앉아있는 신세연을 보며 물었다.
“뭐해?”
“......아무것도 아니야.”
정도찬이 답답한 인간인 건 알고 있었고, 각오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신세연은
정도찬은 나쁘지 않다.
그냥 신세연 자신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고 있는 것뿐이니까.
진짜 답답한 건 신세연 자신이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바둑이나두고 있는 자신이 바보이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온 기회인데 이걸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신세연은 남아있던 마지막 용기를 짜내 말했다.
“바람이나 좀 쐬러 다녀올까?”
결연한 표정으로 어딜 다녀오자고 말하는 신세연을 보며 정도찬은 생각했다.
‘얘가 요즘 왜 이러지?’
정도찬이 아는 신세연은 기전을 고작며칠 앞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고, 혹시 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 날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승부욕이 강한 신세연인데.
“당장 다음 주가 기전인데 지금 놀러 나가자고?”
“뭐…. 그냥 기분 전환 삼아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신세연을 보며 정도찬은 당황했다.
신경도 안 쓰던 현지 적응을 한답시고 일주일이나 빨리 출발하더니, 이젠 기분 전환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한다.
‘진짜 긴장이라도 한 건가?’
하긴 이번 기전이 지금까지 신세연이 진출한 세계 기전중에 가장 규모가 큰 기전이기는 했다.
정도찬은 신세연의 긴장을 풀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나오미 씨랑 잠깐통화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니시카와 씨? 그 사람은 왜?”
“우리 둘 다 일본어는 한마디도 못 하는데 뭐라도 좀 물어보고 나가야지.”
정도찬의 말을 들은 신세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상 승낙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흐, 흠…. 빨리 통화하고 와 난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신세연에서 나와 바로 옆인 자신의 방에 들어간 정도찬은 나오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스케줄이 없었던 건지 나오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나오미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오... 급 떨어지는 아이돌 니시카와 나오미에요...
“아하하…. 또 어디서 악플이라도 읽으셨어요?”
-네에...
“좀 괜찮아요?”
-그래도 아예 관심도 못 받을때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러고 보니까 바둑 해설자로 데뷔하기 전에는 제대로 된 활동 한번 못했다고 했던가.’
정도찬은 아이돌 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바둑계만큼, 아니 어쩌면 바둑계보다더 승자독식이 심한 바닥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설자로 데뷔하고, 거의 매번 정도찬이 사고를 치는 걸 수습하는 과정을겪으면서 능력과 인지도 양쪽이 급상승한 덕분에 요즘은 나름대로 일이 들어오고 있었고. 덕분에 그룹 해체도 보류되었으니.
니시카와 나오미는 나름대로 정도찬에게 고마운 감정이 있었다.
물론 같이 해설을하던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기겁을 하겠지만.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일본인데 뭐 좀 물어보고 싶어서요.”
-네? 도찬 씨 지금 일본이에요? 정말요? 왜요?
“네, 일본이고요, 정말이고요, 세연이 기전 도와주러 왔어요.”
-세연이... 아 신 사범님 말하는 거구나…. 흐음….
둔해 빠진 누구와는 다르게 니시카와 나오미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어디예요?
“여기가…. 오이타라고 들었어요.”
-오이타? 우와…. 엄청 좋은 데 갔네요. 부럽다아…. 나도 온천 가고싶다아….
“온천이요?”
-네 오이타가 온천 도시로 유명하거든요. 유후인도 있고, 벳푸도 있고 칸나와도 있고.
‘온천이라….’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긴장 푸는데 몸을 뜨거운 물에 푹 담그는 것보다 좋은 게 뭐가 있을까.
“간다면 어디 온천이 좋을까요?”
-으음…. 제가 알기로 벳푸에만 온천이 100개가 넘어가는 거로 알고 있어서….
“온천이 100개가 넘는다고요?”
대체 어떻게 된 동네지?
-네 그것도 시청에서 공인한 온천만 100개가 넘는 거고 개인 주택에 있는 온천까지 합치면 수백 개는 넘어갈걸요?
“우와…. 진짜 말 그대로 온천 도시네요.”
-땅만 파면 온천수가 나와서 함부로 땅을 못 파게 했을 정도니까요.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간다 어쩐다 하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잠시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던 니시카와 나오미는 괜찮은 곳을 발견해 정도찬에게 전달했다.
-요즘 그쪽에 모리노유 온천이라고 유명한 곳이 새로 생겼네요. 혼욕도 가능하고. 평판도 좋고, 찾아가기도 쉽고.
정도찬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혼욕? 그러니까 남자랑 여자가 같이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괜히 사람들이 성진국성진국 하는 게 아니구나!
정도찬은 이상한 곳에서 문화충격을 느꼈다.
“그, 그런 곳을 어떻게 가요!”
-네? 왜요? 여기 좋아 보이는데.
“좋긴 좋겠죠! 좋긴 좋은데! 그 뭐냐…. 윤리적으로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든다고요!”
니시카와 나오미는 정도찬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요?”
-혼욕이라고 해서 다 벗고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옷 입고 들어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아….”
정도찬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아쉬워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도찬 씨 변태
“죄송합니다아….”
사실 아주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기적의 자기합리화였다.
-그래도 막상 들어가 보면 오히려 더 좋을걸요?
“네?”
-어쨌든 위치는 메시지로 보내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니시카와 나오미는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 쪽팔림이 다시 한번 몰려드는 기분이어서 정도찬은 베개에 머리를 박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20년 지기 친구를 상대로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신세연은 정도찬 자신을 믿고 기원에서 잠도 자고, 이렇게 일본에도 단둘이 같이 오자고 그러는데….
‘나는 쓰레기야….’
신세연이 들었다면 답답해서 속이 터질만한 생각이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진정된 정도찬은 대충 준비를 마치고 니시카와 나오미가 보내준 주소와 교통편을 확인한 후 신세연의 방으로 돌아갔다.
신세연은 이미 만전의 준비를 하고 정도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 오래 걸렸네?”
혼욕 소리 듣고 이상한 상상 했다가 쪽팔려 죽을뻔했다는 말은 때려죽여도 곧이곧대로 할 수 없던 정도찬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냥…. 좀 걸렸네, 그래도 괜찮은 온천 소개해주더라고.”
“온천?”
“응 모리노유 온천이라고 여기서유명한 온천이래. 여기서 가깝고, 평판도 좋고, 혼욕도 되고.”
신세연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호, 혼욕?’
그러니까 남자랑 여자가 같이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신세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갑자기 너무 진도가 빠른거아니야?’
그다음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습게도 ‘정도찬이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이었다.
이 목석같은 남자가 이렇게 뻔뻔하게 그런걸 권유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 혼욕이긴한데 옷은 다 입고 들어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정도찬의 말을 들은 신세연은 갑자기 기분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인간이 그럼 그렇지.’
상대는 정도찬이다 기대할 걸 기대했어야지….
그래도 온천은 나쁘지 않았다.
일본 드라마를 보면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온천욕을 즐기고, 탁구도 치고, 이것저것 하는 뭐 그런 거.
그건 그것 나름대로 좋은 데이트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신세연은 정도찬의제안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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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후.
모리노유 온천의 혼욕 노천탕.
평일의 점심 시간대였기 때문에 비교적 한산한 혼욕 노천탕에서 정도찬은 니시카와 나오미가
‘그래도 막상 들어가 보면 오히려 더 좋을걸요?’라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는 옷,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
옷을 입고 들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정도찬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온 카운터펀치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신세연의 상황도 별다를 건 없었다.
바둑기사에게 있어서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던 정도찬은 미친 듯이 몸을 키우진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빨래판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괜찮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신세연은 정도찬의 웃옷 너머로 살짝살짝 보이는 잔 근육들로 돌아가는 시선을 필사적으로 제어했다.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최대한 정면만 바라보며 가만히 있던 두 사람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