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0국 - 여행? 합숙?
12월, 겨울이 찾아왔다.
12월은 프로바둑기사들에게는 여러모로 바쁜 달이었다.
최정상급 프로기사들은 올해의 마지막 세계 기전을 준비해야 했고.
바둑 리그에 참가 중인 프로기사들은 포스트시즌을 맞이할 시기였다.
그리고포스트시즌이 끝나면 성탄절 기념 이벤트 대회나 특별 대국들이 열리고, 거기서 또 일주일이 지나면 연말이다.
커다란 대회들과 이벤트가 거의 매주 열리니….
괜히 12월이 바둑계의 최대 성수기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정도찬은 바람이라도 쐴 겸 잠시 밖에 나가서사 온 비싼 하겐x즈 아이스크림을 수정이에게 건네주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한가하지?’
그의 친구들은 매일 바빠 죽겠다며 곡소리를 내는데 자신은 하루하루가 너무 여유로웠다.
할 거 없다고 바람을 쐬러 간다며 수정이 간식거리를 사 올 정도로!
잠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 정도찬은 이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기전은 참가 자격도 없고.
바둑 리그는 지명조차 안 들어와 취업도 못 한 백수 상태고.
초단 대회 우승으로얻은 국내기전의 시드는 내년 1월의 TH 칼텍스배 기전에서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 정도 규모의 기전에서 우승해야 몽백합배 세계 기전의 예선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정도찬에게 들어오는 바둑 예능이나 지역 행사의 섭외도 뜸해졌다.
한소율 연맹장의 말로는 월간 바둑의 파급력이 생각보다 많이 세서 소위 말하는 ‘급’이 올라가가성비가 나빠져서 그렇다고 설명했지만.
정도찬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대충 자신의 몸값이 비싸졌다는 말로 이해했다.
실제로 틀리게 이해한 것도 아니었고.
어쨌든 결론은.
‘아…. 한가하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입단 대회 때부터 거의매일 정신없이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갑자기 멈춰선 기분.
너무 바빠 힘들어서 조금 쉬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쉬니 마음속 한쪽이 불안했다.
‘뭐라고 하고 싶은데….’
정도찬이 고민에 빠져있자 잠시 정도찬이 가져온 봉투를 뒤적거리던 김수정은 정도찬에게 봉투를 건네며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드실래요?”
“어? 그래, 고마워.”
정도찬은 별생각 없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냈고 김수정은 다시 봉투를 받아들고는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더니 쿠키 앤 크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김수정이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다음으로 좋아하는 맛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정도찬이 말했다.
“민트초코 맛으로 사 오려고 했는데 매진이더라고.”
평소에는 산더미만큼 쌓여있더니 하필 오늘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수정이 간식비가 민트초코로 버려지는건 용납할 수 없다는 누군가의 의지를 반영한 것처럼.
하지만 김수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인기 있고 맛있으니까요!”
먹을 거라면 안 가리고 다 먹는 정도찬은 딱히 뭐라도 반박 하고 싶지는 않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핸드폰 메시지를 보던 김수정이 정도찬에게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요즘은 별로 안 바쁘셔요?”
“그러게, 아마 1월까지는 한가할 것 같은데?”
김수정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월까지는 백수.
메시지를 보내는 상대가루아 아니면 다른 친구들이겠거니 싶었던 정도찬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김수정의 스승이었으나 제자의 사생활에까지 참견할 생각은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핸드폰 메시지를 보던 김수정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은 해외여행 가보신적 있어요?”
“어렸을 때 스승님이 세계 기전에 출전하셨을때 따라가 본 적은 있었어.”
“와! 어디 가셨었어요?”
“일본도 가보고 중국도 가봤지.”
“그럼 스승님은 여권 같은 거도 있는 거예요?”
“어렸을 때 만든 건 만료됐는데 입단하고 나서 다시 만들었어, 프로바둑기사는 해외 나갈 일이 많거든.”
“그렇군요.”
김수정은 다시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권 있음.
-최근에 만듦.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보니?”
김수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곧 겨울방학이니까 가족들이랑 해외여행 간다는 애들이 많아서요.”
“그렇구나….”
‘수정이도 해외여행이 가고 싶은 건가??’
정도찬은 언젠가 세계 기전에 진출하면 꼭 수정이를 데려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둘이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한가함을 즐기고 있을 때.
정도찬의 핸드폰이 울렸다.
신세연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할 일 없지?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도찬은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한가하다고 하면 엄청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놀고 있으니 불안하지만, 막상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하니 귀찮은 것은 싫었다.
정도찬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엄청 바쁜데?”
-출전하는기전도 없고 바둑 리그도 안 나가는 백수가?
“바쁨, 아무튼 바쁨.”
-헛소리하지 말고, 안 바쁘면 나 좀 도와줘.
‘도와달라니?’
정도찬은 신세연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신세연이 일본에서 개최되는 세계여자바둑대회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시무룩해졌다.
“나만 일 없어….”
-헛소리하지 말고. 도와줄 수 있어?
“백수가 넘치는 게 시간이지 뭐….”
-고마워, 그럼 짐 싸고 있어 여권도 챙기고.
“뭐?”
정도찬은 황당했다.
짐을 싸라니? 여권을 챙기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란 말인가.
-내일 출국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뭔 소리야? 지금 나보고 일본을 가라고?”
-도와준다며?
“아니 난 그냥우리 기원이나 너희 도장에서 같이 연구나 좀 하자는 말인 줄 알았지.”
-당장 일주일 뒤가 대회인데 그럴 여유가 어딨어? 먼저 가서 적응하고 있어야지.
워낙 이쪽이 대국 한 번에 웃고 대국 한 번에 우는 퍽퍽한 승부의 세계인지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바뀌는 것에 예민해 강박에 시달리는 바둑 기사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국 바둑의 레전드인 이창한 9단만 보더라도 입단 초기에는 해외만 나가면 적응을 못 해 세계 기전 성적이 좋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그런 예민한 프로바둑기사 중에서는 대회 날 몇 주 전에 미리 출발해서 현지에 적응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니 신세연의 말이 맞는 말이긴 했다.
문제는….
“그런데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
-......
“예전에 청소년 세계 기전 때도 미리 가 있기 귀찮다고 하루 전에 출발했다가 늦어서 실격패 당할뻔했잖아.”
-......
잠시 침묵하던 신세연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이! 좀 바뀔 수도 있는 거지! 뭔말이 그렇게 많아!
“아니…. 내말은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알아들었으면 짐 싸고 있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되니까.
정도찬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변명을 생각해냈다.
“내가 일본 가버리면 수정이는 어떻게 하라고…. 수정이 아직 여권도 없어서 일본 못 데려간단 말이야.”
신세연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둘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김수정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오랜만에 보육원에서 자고 올게요!”
‘브루투스 너마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카이사르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정도찬의 변명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것 역시 사전에 짜인 각본 중 하나였으나 정도찬이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래도 일본까지 가는 건 너무 귀찮은데….’
잠시 고민하던 정도찬은 최후의 반항을 시도했다.
“아! 생각해보니까 나 여권 만료됐음.”
-바둑 기사가 여권이 없다고? 단팥빵에 단팥 없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겠다.
“아니, 진짜야 어렸을 때 만든 여권만료됐다니까?”
어렸을 때 만든 여권이 만료됐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만든 거니까.
‘그러니까 거짓말 아님, 아무튼 아님.’
정도찬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하지만 신세연은 이미 누군가에게 모종의 첩보를 받은 상황이었으니….
-지금 기원 가서 내가 찾아서 나오면 우리 아빠 네 장인어른.
“내일 몇 시까지 가면 될까?”
-10시 비행기니까 7시까지는 인천공항으로와.
“넹….”
정도찬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내일 일본에는 누구누구 가는 거야?”
-나, 너, 끝.
“.....?”
정도찬이 아무 말 없자 신세연이 변명하듯 말했다.
-다른 애들은 바쁘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짓은 조금 부족해 보여도 나름 한국 갑조리그의 일원인 정휘운과 이재영은 소속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되어 팀 대국실에서 반쯤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끔 전화할 때마다 정체불명의 괴성이 들리던데 바둑리그는 대체….’
어쨌든 그 둘이 바빠서 일본까지 따라갈 시간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내일 봐.
“넹….”
그렇게 정도찬과 신세연의 일본 여행…. 아니 신세연의 세계 기전대비 합숙이 결정되었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오밀조밀한 판짜기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