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막간 - 바둑人사이드
퇴근하는 길 서점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의 바둑 잡지 ‘월간 바둑’ 12월호를 사 들고 집에 돌아온 한소율은 표지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나왔네.”
표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도찬이었다.
한소율이 한 일은 월간 바둑의 에디터에게 이번 달 잡지에 정도찬의 인터뷰를 추가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에 불과했는데.
정도찬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인터뷰가 잘 뽑힌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 좋아서 그냥 수록하기에는 아까웠던 것인지. 무려 표지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잠시 잡지를 뒤적거리던 한소율은 정도찬의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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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人사이드 12월의 인물 : 정도찬 2단
[정도찬 사진]
“AI의 시대 최고의 가치는 인간”
요즘 바둑 관련 신문, 뉴스를 보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정도찬 2단이다.
해설자로 데뷔, 전례 없는 연맹 협회 동시 입단, 초단 대회에서의 하윤서 초단과의 스캔들, 사석의 묘로 유명한 한세빛 국수와의 페어 바둑 결승전까지.
이것이 이제 고작 입단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신예 기사의 행보가 맞긴 한 것일까.
이번 달 바둑人사이드에서는 가는 곳마다 폭풍우를 몰고 다니는 ‘폭풍의 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정도찬 2단의 심층 인터뷰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정도찬이 의자에 앉아있는사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초단 대회 우승 축하한다.
“감사하다. 사실 초단 대회 우승 축하는 별로 못 들어봐서 정말 기쁘다.”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주지 않았나?
“초단 대회에서 워낙 큰 사고가 있었다. 다들 그것에만 신경 써서 막상 축하는별로 못 받은 것 같다.”
-워낙 큰 사고면 하윤서 초단과의 스캔들을 말하는 것인가?
“맞다. 단순한 해프닝이었는데 일이 너무 커졌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자세한 상황 설명이 가능한가?
“나도 너무 놀라서 자세한 기억이 나진 않는다.”
-노련하게 잘 빠져나가는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웃음)”
[정도찬이 멋쩍게 웃는 사진]
[스캔들 기사 일부]
바둑 팬 중에서 초단 대회 스캔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이는 초단 대회 4강전 2국 이후 복기 시간에 하윤서 초단이 정도찬 2단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건을 말한다.
어째서 하윤서 초단이 정도찬 2단에게 고백을 했는가.
그것은 하윤서 초단이 그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고 있지 않기에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부분이었다.
-이 질문은 더 해봐야 의미 없을 것 같으니 넘어가겠다. 입단하기 전에 해설자로 데뷔를 했었는데, 어쩌다 해설자로 데뷔하게 된 것인가?
“한소율 연맹장의 강권이 있었다. 나도 그 당시에 바둑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바둑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바둑을 포기했다고 했는데, 혹시 그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바둑이 안 이겨지더라.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고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아직 트라우마의 잔재들이 조금씩 남아있다. 내가 해설자로 활동을 할 때 좋지 못한 수를 보면 화를 내던 것도 이런 트라우마의 잔재 중의 하나였다.”
-매운맛 해설로 유명했는데, 그게 트라우마 때문이었나?
“맞다. 그때 내가 할 말 못 할 말다 한 것 같은데 대국자들에게는 몇 번을 사과해도 부족한 것 같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한 계기가 있었나?
“반년전쯤에 내제자를 한 명 들였다. 이름은김수정인데 나와 함께 사제동행전에 출전한 그 아이가 맞다. 재능이 아주 출중해서 언젠가는 한국 바둑계에 큰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수정이는 수읽기에 아주 능한데 이 감각을….”
[김수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정도찬2단 즐거워 보인다.]
[사제동행전에 출전한 정도찬과 김수정의 사진]
그 후로도 정도찬 2단은 무려 30분 동안 제자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딸을 자랑하는 팔불출 딸 바보 아버지의 모습과 같았다.
그는 필자에게 이 부분은 편집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만약 그가 그의제자에 대해서 한 말 모두를 수록한다면 잡지 전체를 사용해도 지면이 부족할 것이 뻔했기에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적당한 부분에서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극복한 계기는 무엇인가?
“어느 날 한세빛 국수의 제자인 이루아가 기원에 찾아온 적이 있다. 그날 수정이와 루아가 대국했는데 수정이가 졌다. 수정이가 지고 분해하는 걸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게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최초의 계기라면 다른 일도 있었다는 말로 들린다.
"맞다. 한소율 연맹장에게 소개를 받은 상담사에게 ‘제대로 지는 것부터 시작해라’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에 우연히 만난 한세빛 국수에게 대국을 신청했다."
-한세빛 국수 말인가? 내가 아는 그 사람?
“그 한세빛 국수가 맞다. 한세빛 국수의 자택에 초대받아서 대국할 기회가 있었고, 완벽하게 졌다. 그렇게 지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여기까지 말한 정도찬 2단은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슨 그런 트라우마가 있냐?’라는 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서 마음의 병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연구생 시절의 정도찬 사진 확실히 지금보다 날카로운 인상이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 몰랐다. 그럼 그다음에 입단을 결심하게 된 건가?
"맞다. 동시 입단도 이때쯤에 결심했다."
-동시 입단이라는 유례없는 선택을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자세한 것은 비밀이다."
-비밀이라니 어쩔 수 없다. 입단 대회 때의 심정을 물어보고 싶은데 어땠는가?
“죽는 줄 알았다(웃음)”
-연맹과 협회 입단 대회를 거의 동시에 치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나?
“연맹에서 스케줄을 맞춰준 덕분이다. 대국 순번도 꼬이지 않도록 여러모로 신경 써줬다.”
-특혜 논란이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별생각 없다. 그저 내가 최초였을 뿐다른 사람도 도전하고자 하면 언제든지 도전 가능할 것이다."
[입단 대회 시상식에 참가한 정도찬의 사진]
정도찬 2단은 그렇게 말했지만 이틀 동안 최소 16국에서 24국까지 늘어날 수 있는 대국 스케줄을 극복할 수 있는 아마추어가 과연 존재하긴 할지 의문이었다.
과연 필자의 생전에 이런 식으로 입단을 하는 사람을 더 볼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이제 좀 아픈 기억을 꺼내야 할 것 같다. 사제동행전 결승전에서 ‘사석의 묘’에 당했을 때 무슨 기분이었나?
"백 대마가 죽은 걸 깨달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수정이도 1국에서 삼패 빅의 묘수를…."
필자는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정도찬 2단이 김수정 양을 자랑하는 것을 30분이나 더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1분의 제한시간의 압박을 이겨내고 삼패 빅의 묘수를 찾아내 1국을 무승부로 이끈 김수정 양의 실력은 분명 범상치 않은 것이 분명했으니까.
-정말…. 김수정 양의 미래가 기대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웃음)”
-그럼 혹시 앞으로의 목표를 알려줄 수 있겠나?
“단기적인 목표는 국내기전 우승이다. 장기적인 목표는 부끄러워서 말 못 하겠다.”
-많은 팬들이 정도찬 2단의 바둑 리그 참가를 기대하고 있는데 바둑 리그에 출전할 생각은 없나?
“나도 바둑 리그는 경험해보고 싶지만, 아직 지명을 못 받았다.”
-믿고 쓰는 창연 도장 출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명이 안 들어왔다니 의외다.
“생각보다 내가 그렇게 매력적인 매물로 보이진 않았나 보다. 아무래도 바둑을 포기한 기간도 길었고, 스물다섯이면 프로기사로서 적은 나이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이건 바둑人사이드의 공식 질문인데 정도찬 2단에게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언젠가는 넘어서야 하는 숙적이라고 생각한다.”
-정도찬 2단은 사람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바둑을 ‘정복’했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인공지능이 정말 바둑을 정복, 그러니까 Solved 라고 판단했다면. 체스처럼 선수가 필패해야 한다.”
-하지만 바둑은 덤이라는 룰이 있지 않은가?
“덤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여섯 집 반의 덤이 백을 유리하게 만든다면 백이 필승이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흑이 필승이어야 한다. 그래야 Solved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인공지능들의 자가 대국에서 아직 어느 한쪽이 필승이라는 데이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맞다. 아주 조금의 가능성이지만 분명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나 나의 제자 대에서 인공지능을 이기는 것은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한 연구를 하고, 지금보다 더 인공지능을 이해한다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인지 우공이산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정확하다. 중요한 것은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바둑은 이미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게임 중에 하나다. 나는 이런 바둑이 앞으로 천년이 더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닦고 싶다.”
-혹시 그게 아까 대답하지 않은 장기적인 목표인가?
“비슷하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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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은 한소율은 잡지를 덮어 버렸다.
‘이 정도면 괜찮네’
생각보다 질문도 부드러운 편이었고 걱정했던 짜깁기식의 악마의 편집도 없었다.
정도찬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인간적인 매력도 적당히 잘 드러난 것 같고.
이 인터뷰가 퍼지기 시작하면 정도찬에 대한 여론이 많이 좋아질 것 같았다.
‘물론 안티팬은 남겠지.’
모두가 사랑하는 스타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슈퍼스타라면 안티팬마저 미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소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소율은 더는 볼 일이 없는 잡지를 버리려다 잠시 표지를 빤히 쳐다보고는 책장에 꽂았다.
월간 바둑 12월호, 표지의 주인공은 정도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