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7국 - 2차전
이루아의 장점은 초반에 구축해놓은 두터움을 기반으로단단하고 정밀한 바둑을 둔다는 것이다.
둘이 처음 대국을 할 때, 포석에 대한 이해도가 한없이 낮았던 김수정은 포석의 우위를 기반으로 자신의 성을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이루아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꾸준한 공부로 포석에 대한 감을 잡아가고 있는 지금의 김수정은 달랐다.
‘포석 공부 열심히 하길 잘했어!’
열심이라기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수정에게는 그 시간이 영겁의 시간에 가까웠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현재 흑 세력과 백 세력은 비등, 둘의 첫 대국 때 이루아의 세력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했던 것을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라이벌과의 대국에서 김수정은 전에는 느끼지 못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자신이 선수를 잡은 상황!
김수정은 지금까지 갈고 닦은 그녀의 검을 휘둘렀다.
하변의 백 돌을 짓누르는 한 수, 그 수를 본 이루아는 생각했다.
‘달라진 게 포석뿐만이 아니었어.’
이루아가 기억하는 김수정은 날카로운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삼류 무인이었다.
이 공격에 상대가 당하면 좋고, 아니면 다른 곳을 공격하고.
그렇게 사방을 흩뜨려놓고 난장판을 만들며 난전을 유도한다.
하지만 지금의 하변을 누르는 수는 뭔가 달랐다.
삼류 무인이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 형과 식을 익히고, 제대로 된 방법과 방향으로 휘두르는, 날카로운 공격.
단 한 수였지만 이루아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루아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스승은 다름 아닌 한세빛.
전투 바둑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 정도는 스승님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매일 한세빛과 지도 대국을 두는 이루아는 이런 식의 공격은 신물이 날 정도로 당해왔다.
한세빛의 공격은 김수정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날카로워서, 성벽으로 막으려 하면 성벽이 무너지고, 방패로 막으려 하면 방패째로 잘려나간다.
그런 그녀의 스승에 비하면 김수정의 공격은 어린아이의 장난에 가까웠다.
김수정이 수 싸움을 걸어왔을 때 자신이 읽은 수에 확신이 없어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린 이루아는 이제 없었다.
이루아는 김수정이 휘두른 날카로운 칼날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응시하고, 유연하게 받아넘겼다.
미꾸라지처럼 중원으로 빠져나가는 하변의 백 돌을 보며 김수정 역시 이루아의 성장을 직감했다.
김수정이 아는 이루아라면 우하귀로 빠져나가 3선 세력을 챙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수는 어느 정도의 세력을 포기하고 중원으로의 진출을 준비하는 한 수.
‘유연해졌어.’
세력과 단단함에 집착하던 이루아는 유연함을 배웠다.
그리고 그 유연함은 정교함과 만나 파괴력이 배가되었다.
김수정은 여기저기를 찌르고 들여다보며 난전을 유도했지만 이루아는 그 공격들을 부드럽게 넘겼다.
그러면서도 국면 전체를 바라보며 자신의 세력을 정교하게 조율했다.
그래 이 모습은 마치 김수정 그녀의 스승을 닮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스승님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지금도 지도 대국을 둘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정도찬의 세력을 공격하는 것은칼로 물을 베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배어도 흠집 하나 남지 않고, 자신은 분명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져 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런 불가해의 위치에 있는 그녀의 스승에 비하면 이루아에게는 확실하게 공격이 들어가는 감각이 있었다.
‘이길 수 있어.’
두 소녀는 같은 생각을 품었다.
수순이 이어졌고 국면이 조금씩 복잡해졌다.
초반의 다섯 집 차이와 중반의 다섯 집 차이는 느낌이 다른 법이다.
그저 당연한 곳에 두어도 별 타격이 없었던 초반의 국면과는 다르게, 이제 제대로 수를 읽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국면이 되었다.
60초라는 제한시간이 점점 큰 압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로 가진 제한시간은 같았지만, 더 큰 압박을 느끼는 건 이루아였다.
김수정은 정도찬마저도 감탄한 천부적인 수읽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다.
그런 김수정에게 1분은 짧지만, 집중력만 유지하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교한 바둑을 두려 하는 이루아에게 1분은 터무니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몇 초 남았지?’
이루아는 계시기로 향하는 눈길을 필사적으로 바둑판에 묶어놨다.
남은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되면 계시원이 초읽기를 할 터.
괜히 계시기를 힐끔거릴 시간에 한 수라도 더 확인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10초 남았습니다. 10, 9, 8, 7….”
따악-
시간에 쫓겨 둔 것 같은 한 수.
정도찬과 한세빛은 이루아가 그 수를 두는 순간 동시에 다음 수가 승패를 가를 것을 직감했다.
김수정이 둬야 할 다음 수는 명백해 보였다.
김수정은 ‘나 잡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백돌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고 이루아가 더욱 더 시간에 쫓겨 압박을 느끼도록 바로 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한세빛의 착수 순, 한세빛은 이루아와 눈빛을 교환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맞느냐는 물음이었고, 이루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군.’
정도찬은 그 모습을 보며 이루아를 만난 첫날을 떠올렸다.
돌 가리기 도중 백 돌 두 개를 대놓고 보여줘 김수정을 도발해 흑을 쥐던 모습.
‘애가 영악한 구석이 있다니까 정말.’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김수정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손을 타고 올라옴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착점을 한 상황이었다.
바둑돌에서 손을 뗀 순간 선택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악-
이걸로 끝이라는 듯 바둑알을 놓는 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김수정이 읽고 있던 판세가 돌변했다.
안전한 줄로만 알았던 흑 대마가 반으로 갈라졌고, 위쪽으로 갈라진 흑 대마가 근처의 백 대마와 수상전을해야 할 상황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다시 보면 조금 전 김수정이 둔 수는 스스로의 살길을 메꾼 완벽한 자충수로 보였다.
‘함정이었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함정수였다.
이루아가 시간에 쫓겨 실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행동마저 함정이었다니.
조금 더 침착하게 뒀어야 했다.
‘어떻게 할까.’
정도찬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착수 순번은 정도찬 자신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도찬은 이렇게 얕은 함정수정도는 타개할 자신이 있었다.
이길 순 없지만 적어도 지지는 않는 길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수정이 이 수를 읽을 수 있을까?
잠시 김수정을 바라본 정도찬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의 제자가 대견했기 때문이다.
김수정은 자기가 언제 당황했냐는 듯 바둑판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제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도찬은 공배를 메꿨다.
자신의 다음 수가 힌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전혀 의미 없는 곳을 채운 것이다.
그 모습을 본이루아도 정도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공배를 메꿨다.
이루아는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김수정의 착수 순.
계시기가 제한시간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60초…. 50초….40초…. 30초….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으나 김수정은 마치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바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남은 시간은 20초.
정도찬은 반쯤 체념했다.
‘역시 너무 어려웠나.’
묘수라는 것이 그렇다.
묘수풀이 책에서 그 국면에 묘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묘수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전에서 절묘한 한 수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이 실전에서 나오는 묘수를 보고 감탄하는것이었고.
결국, 남은 시간이 10초가 되고 계시원이 초읽기를 시작했다.
“10초 남았습니다. 10, 9, 8, 7….”
그 순간에도 김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루아와의 첫 대국,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자신이 졌다고 지레짐작해 포기해버린 그 대국.
김수정은 그때의 실수를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날의 짙은 후회가 김수정의 등을 떠밀었고, 덕분에 김수정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을 수 있었다.
따악-
바둑알을 놓는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그 소리에 반쯤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이루아는 불안함을 느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바둑알을 놓는 소리만으로도 상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분 나쁠 정도로 청명한 소리는 자신의 수에 강한 확신을 가진 소리였다.
하지만 김수정의 수는 아무리 봐도 이상한 수였다.
‘어째서? 이렇게 두면 아래쪽의 대마도 죽는데?’
지금 국면에서 대마가 더 잡히면 끝이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수를 읽던 이루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건…. 설마?’
반으로 갈린 흑 대마, 그중 위쪽의 대마는 죽는 것이 확정적이었다.
하지만 아래쪽의 대마는?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었다.
이루아도 그것까지 잡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김수정은 오히려 스스로 아래쪽 대마의 수를 메꿨다.
살 수 있는 대마를 일부러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그리하여 나올 수 있게 된 구도.
‘삼패’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는 한 무한히 이어지는 순환패의 일종.
영원히 끝나지 않는 상황이 나온 이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끝나지 않는 바둑을 계속 두던가, 아니면 무승부임을 인정하거나.
이루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긴 줄 알았는데.’
하지만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수순이 이어지고 삼패가 모습을 드러내자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관전 매너를 잘 지키고 있던 관전자들이었지만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삼패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네 사람은 형식적으로 패를 교환하였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심판 둘이 양측의 의사를 물었다.
그리고 네 사람의 동의하에 심판은 결론을 내렸다.
흑 정도찬 김수정 백 한세빛 이루아
호선 덤 6집 반 제한시간 1분
152수 무승부
무승부가 되었기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대국이었지만.
두 소녀는 서로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던
스승들의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