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36국 - 배려 (37/75)



〈 37화 〉36국 - 배려

김덕수 기왕이 시간이 다 되었다며 떠나고, 김수정과 이루아가 아직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확인한 정도찬은 한세빛에게 물었다.

“김덕수 기왕은 어떤 사람인가요?”

한세빛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곰의 탈을  여우 같은 사람이지.”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김덕수라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이것만큼 적당한 말이 없었다.

김덕수를 처음 만난 사람은 그의 덩치와 성격을 보고 그의 성미가 급하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는 사실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한 바둑을 두는 사람이었다.

구석에 숨어있는 최후의 반집까지도 찾아내는 모습에 한세빛도 김덕수에게 호기심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김덕수는 성격과 기풍이 정반대로 보이는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한세빛은 그의 기풍이  그렇게 정착되었는지 본인에게 들은 적 있지만 정도찬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함부로 남에게 알려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세빛의 말을 들은 정도찬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정도찬이 한세빛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그가 기보에서 본 김덕수라는 사람과 실제로 만난 김덕수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으니까.

정도찬은 다시 물었다.

“저와 기왕,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한세빛은 이상한 것을 물어본다는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프로바둑의 세계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는 9단이 뜬금없이 막 입단한 초단에게 거꾸러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니까.

“하지만 둘의 대국은 꼭 보고 싶다네. 재미있을 것 같거든.”
“아예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라는 건가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듯한 정도찬의 말에 한세빛은 살짝 답답함을 느꼈다.

‘아직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정도찬의 실력과 경험의 불균형은 기형적이었다.

트라우마 때문에 사람과의 대국은 극단적으로 피한 탓에 자신의 실력을 다른 사람과 직접 비교해볼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인공지능과의 대국을 무한히 반복하며 실력을 쌓아 올렸으니.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 정도찬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하던 한세빛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수많은 프로바둑기사와 대국하고, 수백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깨달아가겠지.

이는 오로지 정도찬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세빛은 애써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수정이는  어떤가?”
“매일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긴, 저 나잇대의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기 마련이지. 우리 루아도 실력이 어찌나 빨리 늘던지…. 내가 다 무서울 정도라네.”
“그러고 보니까 수정이랑 루아는 친한  같은데 막상 대국할 기회는 없었네요.”

정도찬의 말을 들은 한세빛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아닐세,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

잠시 후 누군가에게서  메시지를 확인한 한세빛은 정도찬에게 말했다.

“자네 나랑 일 하나 같이  생각 없나?”

#

올해의 사제동행전은 여덟 팀 규모의 작은 대회였고  수당 1분이라는 초속기로 진행되기 때문에 하루 만에 끝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도찬과 김수정은 한세빛과 다른 블록에 배정되었다.

한세빛과 이루아의 팀을 만나려면 결승까지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도찬과 김수정의 첫 상대는 최윤성 협회 7단과 그의 제자인 김진성.

최윤성은 정도찬보다 단급이 높았고, 김진성 역시 김수정보다 경력이 길었다.

관전자들은  대국은 당연히 최윤성과 김진성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고, 그들은 이런 결과가 정해져 있는 대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대국은 제대로 중계되지도 않았고, 방송국은 한세빛의 대국만을 계속 송출했다.

그래서 정도찬과 김수정이4강에 진출했다는 장내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뭐? 누가 이겼다고?”

“최윤성 협회 7단이 졌어? 상대가 누구였는데?”

“아니 그것보다 벌써 4강 진출이라고?”

자막으로 정도찬의 승리 소식을 보게  시청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미친련들아 중계 똑바로 하라고!!!

-이렇게 한꺼번에 대국 진행할 거면 인터넷 중계라도 했어야지 뭐하냐 대체

-님들 그런데 정도찬 2단따리 아님? 최윤성 왜 짐?
ᄂ방송국 병1신들이 중계를 똑바로 안 해서 아무도 모름
ᄂ이게…. 수신료의 가치? 지금까지 내가 낸 수신료는 대체?

-정도찬 해설할 때도 보통 아니었음, 인공지능 일치율 60%가 넘는데
ᄂ해설이랑 직접 두는 거랑 같냐?
ᄂ그거 거르고 보더라도 초단대회 보면 ㅈㄴ압도적임
ᄂ초단따리들 양학한것가지고 ㅈㄴ 올려치네 ㅂㅅ
ᄂ정도찬 얼빠 ㅈㄴ많음 그래서 그럼

-그런데 이거 3선승 아니냐? 벌써4강 올라간 거면 2국 다 단명국이었다는 건데
ᄂ아니 정도찬 진짜 ㅈㄴ잘둔다니까?
ᄂ빨리 끝낸다고 잘 두는 거면 정도찬>>한세빛이냐?
ᄂ선넘네
ᄂ한세빛 국수님이 네 친구냐?

정도찬의 대국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지만 정도찬과 김수정의 4강전 대국이 송출되는 일은 없었다.

방송국으로서는 가장 주목도가 높은 한세빛의 대국을 송출하는 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대회는 속기 바둑이였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잠시 카메라를 돌릴 여유조차 없었고, 결국 4강전의 결과도 자막으로 통보되었다.

이에 다른 팀들의 대국이 궁금했던 ‘일부’의 시청자들은 열렬히 화답.

온갖 바둑 커뮤니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제동행전과 같은 이벤트성 대회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대회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정도찬과 김수정, 한세빛과 이루아의 대국은 페어 바둑치고는 역대급의 주목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도찬과 한세빛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결승전을 위해 마주 앉은 둘은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봤고, 그들의 제자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정도찬은 작은 목소리로 김수정에게 물었다.

“수정아, 떨리진 않아?”
“조명 때문에 더워서 답답해요.”
“괜찮아, 금방 익숙해질 거야.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김수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나한테 말 거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김수정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정도찬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스승님도 긴장하신 건가?’

8강이나 4강 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던 정도찬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이상했다.

‘하긴, 결승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김수정은 정도찬이 한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같은 시각, 한세빛도 이루아에게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루아야 오랜만에 수정이랑 대국하니까 어떠니?”

이루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그냥 그래요.”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며 김수정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루아는 아직도 김수정과의 대국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김수정이 읽은 수를 자신이 읽지 못했다는 사실도.

비록 김수정과의 일대일 대국이 아닌 각자의 스승과 함께하는 페어 바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기고 싶다, 아니 다시 한번 이길 것이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한세빛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국 도중에 소리 지르면  돼 알았지?”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

한세빛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스승님?”
“......”

한세빛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결승전 중계를 위한 준비가 끝났고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계시원의 감독하에 돌가리기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 정도찬과 김수정이 흑을 잡게 되었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착수 순번은 김수정 한세빛 정도찬 이루아.

김수정의 수에 한세빛이 응수할  있는 한세빛과 이루아에게 웃어주는 순번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한세빛 쪽이 전력상 우위인데 착수 순번까지 유리해진 것이다.

하지만 김수정은 주눅 들지 않았다.

’스승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말랬어!‘

김수정은 정도찬의 말을 되새기며 당차게 흑돌을 집어 우상귀 화점을 차지했다.

그렇게 착수 순번대로 수순이 이어지고, 포석 국면이 끝날 때가 되자 김수정과 이루아는 위화감을 느꼈다.

정도찬도 한세빛도 평소와는 다르게 정수만 골라서 두는 얌전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마치 이번 대국의 리드를 그녀들에게 맡기겠다는 듯.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건 김수정이었다.

’당황하지 말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이런 일이라면 미리 말해줘도 좋았을 것을.

김수정은 사양하지 않고 그녀가 찾을  있는 최선의 수를 찾는 것에 열중했다.

그녀의 스승이 그녀를 따라오지 못할 일은 없었으니까.

따악-

그렇게 두어진 너무나도 김수정다운 수를 보며 이루아는 상황을 파악했다.

’소리 지르면  된다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구나.‘

첫 대국의 리드를 온전히 이루아 자신과 김수정에게 맡긴다.

이건 분명히 대국, 아니 대회를 시작하기 전에 둘이 작당 모의를 마친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건 숨기지 말고 바로바로 이야기해달라고!‘

이루아는 아주 ’조금‘ 불만을느꼈고 대국이 끝나면 그녀의 스승에게 ’조금‘ 따질 생각이었지만 지금 당장 한세빛의 배려를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김수정과의 대결은 오히려 그녀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김수정, 정도찬 백 이루아 한세빛
호선 덤 6집 반
제한시간 1분

제자들을 위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난 스승들을 곁에 두고 김수정과 이루아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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