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31국 - 꿈
좌불안석이라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일까.
잠시 기원에 돌아가 수업에 사용할 만한 자료를 들고 온 나는 아이들의 방과 시간에 맞춰 학교로 돌아왔다.
유창준을 만나려 했다면 진작 만날 수 있었을 태지만 그를 만나는 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룬 것은 겁이 나서겠지.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하지만 방과 후 수업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더는 도망칠 핑계는 없었다.
이젠 정말 유창준을 만나야 할 시간이 찾아온다.
과연 나를 본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인가.
자신이 바둑을 포기하게 만든 원흉이 프로바둑기사가 된 모습을 모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계는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었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바둑반 교무실의 문이 열렸다.
금테 안경을 코에 걸친, 조금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
내 기억 속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 입니다. 선배님.”
그 역시 나를 알아본 것인지, 아니면 신문기사의 사진 등을 통해서 내 얼굴을 알고 있었던 건지, 그는 단번에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둑 그만둔 지가 10년이 지났는데 선배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선배야?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 네. 창준 형님….”
“거 참,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내가 그렇게 어려워?”
‘네 엄청 어려워요.’
라고 말할 뻔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씹어 삼켰다.
“나도 여기저기서 소식 들었는데 요즘 잘 나가더라?”
“아뇨…. 아직 그 정도는…….”
“짜식 어울리지도 않게 겸손은.”
겸손이 어울리지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뭘 해도 자신감 넘치던 어린 시절에는 자주 듣던 말이었는데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까.
하지만 의외인 점은 유창준은 딱히 나에 대한 적의를 들어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저 태도는 오래전 알고 지낸 동생을 오랜만에 만난 태도가 아닌가.
아무리 봐도 그는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혹시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말? 딱히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오늘 거의 무급으로 도와주는 거라며? 고맙다.”
“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요즘 프로바둑기사들 몸값이 얼만데.”
“아뇨, 그래도 수정이도 있고 하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니겠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유창준은 이 말이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나중에 밥 한 끼 같이 하자는 말이라며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내 핸드폰 번호를 반쯤 강탈해갔다.
그는 지금까지 긴장하고 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는 용기를 내 물었다.
“그…. 저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사실 저는 나쁜 말을 들을 줄 알았거든요….”
내 말을 들은 유창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왜 나쁜 말을 해?”
“네? 하지만 선배…. 아니 형님이 바둑을 그만두게 된 게 저 때문이었으니까….”
“뭐?”
내 말에 유창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오히려 너하고 스승님이 고마운데.”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고 유창준을 쳐다보고만 있자 그는 말을 이었다.
“물론 졌을 때는 분했지, 포기했을 때도 슬펐어, 하지만 결국 그때 포기할 수 있어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거 아니겠어?”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유창준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게 애매한 재능이라고들 하잖아. 내가 딱 그런 경우였지, 여기가 내 한계라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었어.”
나도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오랫동안 간헐적으로 오는 트라우마 발작을 이 악물고 견디며,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바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드디어 바둑을 포기할 결심을 했을 때 깨달았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 역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평생을 바둑만 보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바둑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는 너희들은 바둑을 포기한 내가 불쌍해 보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난 그 어렵다는 임용고시를 통과해서 선생님이라는 번듯한 직업을 얻었고, 다음 달에는 거의 5년 가까이 연애한 여자친구랑 결혼할 거야.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한 인생 아니겠어?”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더 늦기 전에 바둑을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이래도 내가 아직 불쌍해 보여?”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모든 것을 내 기준으로 바라보며 멋대로 바둑을 포기한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내가 그랬으니까.
바둑을 포기한 후 나는 하루하루 의미 없이 한 명의 기원 사장으로 살아왔으니까.
TV에서 보는 프로바둑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항상 부러워했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창준은 자신은 충분히 만족한 삶을 살고 있고, 그것이 내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유창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아직도 나를 미워하며 바둑을 포기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사람이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가슴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단단한 응어리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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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강의는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기본적으로 바둑반을 선택한 아이들은 바둑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현직 프로바둑기사인 정도찬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김수정은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저 사람이 내 스승님이야!’라며 아이들에게 자랑했고,
그 모습을 보던 정도찬은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제자에게 무심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반성했다.
어쨌든 그렇게 특별 강의가 끝나고 정도찬은 유창준과 인사를 나눴다.
“그럼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그때 보자.”
“네 형 다음에 봐요.”
유창준이 조금은 편해진 것인지, 정도찬은 어느새 그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청첩장 보낼 테니까 꼭와라.”
“축의금은 두둑하게 챙겨갈게요.”
정도찬은 김수정과 함께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유창준은 그 모습을 보며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자신이 여자친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금연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럴 땐 딱 한 대만 태우면 안 되나.’
과거의 인연을 본 유창준의 마음도 복잡했다.
부러움, 질투심, 후회….
지금까지는 그저 잊고 있었을 뿐, 막상 정도찬을 보니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십 년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스승님은 잘 지내시려나….”
추운 겨울, 유창준의 한숨이 담배 연기처럼 피어올라 사그라들었다.
마치 그의 꿈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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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났지만, 나는 내 목적을 잊지 않았다.
학교에서 나온 나와 수정이는 수정이가 신세를 졌던 보육원으로 향했다.
보육원 역시 학교에서 가까웠는데, 수정이의 말을 들어보니 기원에서 살게 된 지금도 가끔 보육원을 방문하는 모양이었다.
난 왜 모르고 있었지?
어쨌든 보육원은 수정이에게 있어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보육원에 들고 갈 과자나 과일들의 먹거리를 한아름 안고 있는 수정이는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신난 것인지 콧노래를흥얼거렸다.
보육원에 가져가고 싶은 걸 마음껏 사라고 했더니 정말 마음껏 사더라….
심지어 그걸 또 낑낑거리며 들고 가는데 아무리 봐도 무거워 보여서 내가 들고 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꼭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자기가 좋다니 괜찮은 거겠지 뭐….
어쨌든 우리는 보육원에 도착했고, 수정이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이들 사이에 파묻혔다.
그 아이들 모두가 진심으로 수정이를 환영하는 것 같아서 평소에 수정이가 ‘저는 가족이 많아요.’라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아이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원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미국의 대통령이 사람의 나이가 마흔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이들의 보육에 힘써 보육유공자로서 국민훈장까지 받은 보육원장님은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잠시 보육원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내가 자리에 앉자 그가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수정이가 도찬 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뭘 제대로 해주지도 못했는걸요…. 부끄럽습니다.”
나는 보육원장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한탄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한정된 예산, 늘어나는 아이들,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은 입양.
18살이 되면 정착지원금 500만 원을 받고 사회에 던져지는 아이들.
그마저도 질 나쁜 원장을 만난 아이는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결국 나쁜 길로 빠져든다는 이야기까지.
가만히 그 말을 경청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었다.
매월 일정 금액을 보육원에 후원하기로 덜컥 약속한 것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갈고 닦은 화술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표를 달성한 보육원장님은 수정이의 이야기를 꺼냈다.
수정이가 보육원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며 창연도장에 처음 방문했을 때 스승님에게 내제자로 받아달라며 부탁한 이야기
하루라도 빨리 TV에 나오는 대단한 프로바둑기사가 되어서 보육원에 도움을 주겠다는 이야기.
아이가 진로를 빨리 정한 것은 다행이나 너무 조급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나 역시 수정이의 일기를 본의 아니게(진짜로) 읽은 적이 있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정이의 기풍이 어째서 이렇게 공격적인가.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