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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30국 - 인연 (31/75)



〈 31화 〉30국 - 인연

생각해보면 프로에 입단한  바쁘다는 핑계로 수정이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한  같다.

어쩌면 나는 아이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허울 좋은 말로 아이를 내버려 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와서 나의 자질이 어떻다느니, 내가 수정이를 맡을만한 사람이 아니니,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스승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나는 한 아이의 스승이다.

더는 그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로 하며 나는 앞으로 사제동행전까지 남은 5일을 온전히 수정이를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

다음 날.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아침밥을 차려 먹고 포석 공부.

오늘도 수정이는 포석 공부가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포석 책을 읽고 있었다.

평소라면 포석 공부는 싫어하지만 어쨌든 공부는하고 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째서 수정이는 이렇게까지 포석 공부를 싫어하는 걸까?

나는 내가 수정이에게 이 단순한 질문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대체반년이 지나도록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한소율 연맹장이 항상 내게 하는 말이 주변에 관심 좀 가지고 살라는 말인데 괜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어쨌든 나는 수정이에게 포석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수정아, 너는 포석 공부를 왜 싫어하는 거야?”

 물음에 수정이는 우물쭈물했다.

내가 자신을 혼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수정이를 안심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수정이는 아직 조금 불안해 보이는 눈치였지만 입을 열었다.

“재미가 없어서요오….”

그 말에 나는긴장감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재미는 중대사지.

이걸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래도 심각한 이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수정이가 포석을 더 쉽고 재미있게 접할 방법이 있을까.

한번 고민해봐야겠다.

이런 고민을 이제야 하는 내가 조금 한심했다.

#

어쨌든 그렇게 포석 공부를 마치고 수정이의 등교 시간.

평소라면 수정이 혼자서 등교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수정아 오늘은 내가 차로 데려다줄까?”
“넹?”

내 말이 의외였던 것인지 수정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잠시 그러더니 곧 고개를 세차게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필사적으로 나를 말리는 수정이를 보니 조금 충격이었다.

내가 학교에 데려다준다는 게 그렇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꺾일 내가 아니었다.

나는 꿋꿋하게 수정이를 차에 태우고 수정이가 다니는 초등학교까지의 길을 검색했다.

수정이의 학교까지 도보 5분.

가깝다 가깝다 말로만 들었는데 이 정도였어?

나는 수정이를 데리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

수정이가 그거 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수정이의 눈을 피했다.

#

수정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무려 1930년대에 설립된 오래된 초등학교였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온갖 괴담이 떠돌만한 폐교에 가까운 학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번에 걸쳐 리모델링을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깔끔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수정이와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스승님 그 대사는 위험해요.”
“......?”

어쨌든 나는 수정이를 수정이의 방에 데려다주고 교무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나를 알아보는 아이들이 많아서 여러 번 발걸음을 멈추고 사인이나 사진 등의 팬서비스를 해줘야 했지만, 다행인지불행인지 나를 붙잡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내가 아직은 급이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바둑이 보급되지 않은 걸까.

이왕이면 전자이길 바라며 나는 교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사실 오늘 수정이와 함께 학교에 온 이유는 단순히 수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에게 학부모 상담을 받기 위해  것이었고, 오히려 수정이를 데려온 것이 겸사겸사의 영역이었지.

그런데 나는 학부모가 아닌데 괜찮은 건가?

아 몰라, 학교에서 된다고 하면 되는 거겠지.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은 정년 퇴임을 앞둔 초로의 노인이었다.

잠시 말을 섞어보니 무려 40년 이상 교직에 있으셨다고 하는데,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바둑을 둬왔다고 한다.

프로 바둑기사를 만나는 오랜만이라며 눈을 빛내던그는 바둑팬답게 수정이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많은 배려를 해 주는 듯했다.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사실 바둑을 둔다는 아이들을 보면 예전처럼 걱정되지는 않아요. 바둑 중학교도 있고 바둑 특성화 고등학교도 있는데 바둑에 전념한다고 중학교 자퇴 고등학교 자퇴, 이런 것도 옛말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은 내가 학부모 상담을 위해 온 것이 수정이를 자퇴시키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스포츠 선수가 엘리트 체육인인 우리나라의 특성상바둑을 두는 아이 중에서도 바둑에 전념하겠다며 자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내제자 출신들이 자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 역시도  경우에 해당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수정이에게 고등학교까지는 꼭 다니라는 말을 한 것이다.

평생 바둑 하나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 혹시라도 모종의 이유로 바둑을 포기하게 된다면 정말 말 그대로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방이 망망대해인 무인도에 맨 몸뚱어리만 남고 떨어진 기분.

나는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경험을 실제로  본 사람의 관점에서 나는 수정이가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하기를 바랐다.

말하자면 이건 꿈이라는 벽을 올라가다 떨어지는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완충재다.

인생에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고등학교 졸업장은  선택지를 조금은  늘려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열변을 토하는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을 진정시키고 내 생각을 말해줬다.

그러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정이가 훌륭한 스승을 뒀네요.”
“부끄럽습니다.”

요즘 스스로의행동에 회의감을 가지던 내가 듣기에 정말 부끄러운 말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아, 다름이 아니라 수정이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내 말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수정이야 큰 사고를 치지도 않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별문제 없는걸요?”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거면 작은 사고는 치고 다닌다는 건가….

하긴  나잇대 아이들  사고 안 치고 다니는 아이가 어디 있겠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다른 아이들에 비해 주목을 받는 아이이긴 하네요, 그 나이에 뚜렷한 목표를 가진 아이가 몇이나 있겠어요.”
“그렇군요….”

특히 바둑기사가 연예인과 동의어가 된 바둑 엔터테인먼트의 시대에 바둑 프로기사를 꿈꾸는 아이는 주변 아이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과거의 시대를 살았던 나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도착한 아이이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러길 바래야겠네요….”

그 이후로 우리 둘은 여러 가지 잡담을 나눴다.

바둑에 관한 이야기, 수정이와 수정이의 친구들 이야기, 학교의 이야기 등.

솔직히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쨌거나  상담을 요청한 입장이었기에 말을 끊기가 좀 그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도중,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유창준 선생이랑 동문이었죠? 그 친구가 방과 후 교실 바둑반 담당인데 한번 만나 볼래요?”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창준, 창연도장에서 함께 바둑을 배운 내 선배격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와의 대국에서 패배해 도장을 떠난 사람이기도 했다.

의외의 곳에서 만난 과거의 인연에 순간 머리가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둘이 잘 모르는 사이였나요?”
“아뇨…. 아는 사람입니다.”

그제야 수정이가 어떻게 우리 스승님과 연결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방과 후 수업으로 바둑을 선택한 수정이가 유창준의 눈에 띄었고, 수정이의 심상치 않은 재능을 본 유창준이 스승님에게 연락한 거겠지.

난  아직도 이걸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수정이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줬다면 진작 알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하지만 자책할 겨를도 없이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거 오늘 하루만 방과 후 수업의 초빙 강사를 해 주실수 있나요?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

초빙 강사의 일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일을 수락하면 무조건 유창준과 마주쳐야 할 것이 뻔했기에 대답을 망설인 것뿐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후 지금까지는 딱히 트라우마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인연을 만난 후에도 내 정신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 때문에 바둑을 그만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나는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유창준을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이라면,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간다면, 그리고 다시는  학교에오지 않는다면 내가 유창준을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정말 이것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계속 피하고 피해 다녔을 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고민이 길어지자 수정이의 담임선생님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열었다.

“아무래도 공립 학교라서 보수를 맞춰드리긴 힘들긴 하죠? 너무 무리한 요청이었다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아닙니다…. 돈 때문에 고민하는  아니에요.”

고민은 길었지만 결국 나는 용기를 내기로결심했다.

“하겠습니다.”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10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트라우마라는 핑계를 대며 도망쳐왔다.

이제 도망치는 건 진저리가 난다.

나는 과거와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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