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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24국 - 도태(淘汰) (25/75)



〈 25화 〉24국 - 도태(淘汰)

일대일로 시합하는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지만, 바둑 또한 반상 위의 실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종목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수들의 영역, 어디에 가든 고수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프로바둑기사들 간의 대국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아니 새하얀 도화지 위에 찍힌 점 하나 차이로 승패가 갈릴 수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정도찬은 그 누구를 만나든 최선을 다해 대국에 임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태도는 그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재앙 그 자체였으니….

“잘 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8강전의 마지막 대국을 마친 정도찬은 상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복기에 들어갔고,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스태프들이 도찬과 상대에게 마이크를 채우고 카메라를 켰다.

바둑 엔터테인먼트 시대가 시작된  주목도가 높은 대회의 경우 이런 식으로 복기하는 것을 방영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둘은 별 거부감 없이 평소처럼 복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20분 정도 복기를 한 후 짧은 승자 인터뷰를 마친 후 대기실로 돌아온 정도찬은 자신의 다음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아직진행 중인 같은 블록의8강전을 확인했다.

대국자는 하윤서 초단과 유이정 초단.

둘의 대국은 초단 대회에서 보기 힘든 여자 기사들 간의 대국이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잠시 국면을 살펴본 정도찬이 판단하기에 국면은 하윤서 초단의 압도적인 우세.

하지만 하윤서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시종일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혹시 주목을 받기 싫어하거나 카메라를 무서워하는 뭐 그런 트라우마인가?’

그런 트라우마라면 지금까지 공식전에 출전하는 것을 꺼린 것이 이해되었다.

그 상태에서  수가 진행되고 자신의 대마가 잡힌 유이정은 깔끔하게 돌을 던졌다.

하윤서 초단의 승리로 대국이 끝나고 바둑판 정리가 끝난  복기가 진행되나 싶었는데….

“뭐야?”

하윤서는 복기 같은 것은 생각조차 않는다는 듯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주변 사람들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행동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카메라를 얼마나 싫어하길래 당연히 해야 할 복기와 인터뷰도 안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걸까.

정도찬은 그녀가 조금 걱정됐다.

그리고 그런 정도찬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한소율이 정도찬을 타박했다.

“본인 걱정이나 해요, 바둑은  모르는 제가 봐도 잘 두는 것 같은데.”
“그건 그런데 저도 워낙 고생했으니 남 일 같지가 않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도찬을 한소율이 다시 타박했다.

“정신 차려요, 저 사람이 도찬  다음 상대니까.”
“그건저도 아는데요?”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한소율이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자 정도찬은 꼬리를 말았다.

생각해보면 요즘 한소율의 잔소리가 많이 는 것 같다.

하지만 잔소리가 많다고 불평해봤자 ‘다 도찬 씨 잘되라고 하는 말이에요!’ 같은 말이나 돌아오겠지.

‘아주 우리 엄마야 진짜.’

아니, 잘 생각해보면 도찬 자신의 어머니보다 잔소리가 많은  같기도 했고.

“뭐든지 첫 단추가 중요한 거예요, 안 그래도 지금까지 여기저기 지도 대국이니 행사 참여니 예능이니 뭐니 바빠서 대회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그 일을 시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불만 있어요?”
“아닙니다….”

그런 정도찬의 모습을 본 한소율은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데’

프로기사들과 비교하면 바둑은 문외한에 가까운 한소율이 보기에도 도찬의 실력은 뛰어났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표본이 부족해  모르겠지만, 현직 바둑기사들 중에서 상위권임은 분명한 실력.

이걸 너무 빨리드러내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한 한소율은 도찬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는 시기를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해설자로서의 정도찬이 너무 뛰어난 것이 걸림돌이 될 줄이야.

해설 도중 가끔 드러나는 실력의 편린만으로도 사람들이 그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소율은 해설자 정도찬의 이미지를 최대한 희석하기 위해 정도찬이 주목도 높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일부러 많은 일거리를 던져주고  참가 대회를 초단 대회로 하도록 유도했다.

그편이 혹시 정도찬이 우승해도 ‘우승했지만, 초단 대회’라는 프레임을 씌워 딱 ‘기대되는 신인’ 정도로 포장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포장지를 찢고 나온 정도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생각이. ‘아, 역시 잘 두네’ 가 아닌 ‘뭐야?  이렇게 잘 둬?’ 가 될 수 있도록.

한소율은 최선을 다해 정도찬을 숨길 생각이었다.

‘내가 다 자기 잘되라고 하는 건데 맨날 잔소리한다고 투덜거리기나 하고!’

하지만 그런 한소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도찬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는 왜 바둑리그 지명이 안 들어와요?”
“...몰라요.”

입단 대회부터 그렇게 화제가 된 정도찬이었고, 심지어 신창연 명인의 제자인 데다가 바둑계 인맥도 나쁘지 않은 정도찬이 지명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국 프로바둑리그의 1부리그 격에 해당하는 갑조리그의 8개  중 7개 팀에서 지명이 들어왔고.

그중에서 약체로 평가받는 팀 중 하나는 귀중한 용병 자리까지 써가며 정도찬을 당장 올해부터 기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 걸 연맹과 협회 양쪽에 소속되어있는 정도찬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막은 당사자가 한소율이었고.

아무리 정도찬을 생각해서 한 일이지만 이런 것까지 이해해줄지 조금 걱정이 되었던 한소율은 필사적으로  사실을 숨겼다.

“하긴, 내가 뭘 했다고 벌써 지명이 들어오겠어요.”

태평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도찬 때문에 잠시 복장 터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한소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주변 상황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평소라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상하게도 정도찬 앞에서는 착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열심히 해봐요, 언젠가 사람들이 도찬 씨를 알아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을 가장 빛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한소율은 애써 뒷말을 삼켰다.

*-*-*

초단 대회 4강전의 A블록 매치업을  사람들의 시선이 한자리에 집중되었다.

최근 바둑계에서 화제랑 화제는 다 몰고 다니는 정도찬과, 1년에  번 공식전에 출전하는 하윤서의 대국이 성사된 덕분이다.

심지어 이 둘은 이번 초단 대회에 출전한 사람 중 발군의 실력을 보였기에 B블록 4강전이 병풍 신세로 전락하고 ‘사실상 이 대국이 결승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정도찬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국을 준비 중이었고, 그의 맞은편에 앉은 하윤서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했다는 기쁨에 오로지 모든 정신을 정도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쓰레기 같은 바둑들을 견디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유는 정도찬 때문이었으니까.

돌가리기 결과, 하윤서가 흑돌을 쥐게 되었다.

하윤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더러운인공지능 포석을 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도찬에게 자신이 사람의 바둑을 둔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대각선 소목으로 포석을 시작했다, 노리는 것은 우변의 양쪽 귀와 변을 가져가 세력을 형성하는 삼연성식 포석,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혹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포석의 기초 중의 기초.

사람의 바둑을 논하는데 이것보다 적합한 포석이 있을까?

 포석을 본 정도찬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고풍스러운 바둑을 두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과거의 포석을 둬서 조금 당황했을 뿐 별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 이후의 바둑기사 중에서는 인공지능 포석만 익혀서 과거의 포석을 가져오면 당황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의표를 찌른다는 점에서 보면 나쁜 선택도 아니었고.

하지만 삼연성식 포석은누가 봐도 초반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그대로 따라간다면 흑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는 포석.

정도찬은 그 포석을 그대로 받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파훼법이 연구된 포석을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겠지.

정도찬은 하윤서와 같이 변을 차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짜고짜 삼삼에 침투했다.

그 수를 본 하윤서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이런 수는 인공지능이나 둘법한 수였기 때문이다.

‘역시 내가 정신을 차리게 도와주지 않으면….’

하윤서는 흑 돌을 다시 조용히 바둑통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 굽혀져 있던 자세를 다시 바로잡고 바둑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질 수 없다.

이건 질 수 없는 대국이었다.

만약 사람의 바둑을 두는 자신이, 인공지능의 바둑을 두는 정도찬에게 진다면?

분명 정도찬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착각하게 되리라.

하윤서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누구보다 인공지능다운 수와 그 누구보다 사람다운 수가 교차하며 국면은 점점 치열해졌다.

수순이 진행될수록 정도찬은 하윤서의 바둑이 신기하다고 느꼈다.

분명 누구보다 인공지능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자란 세대일 텐데 그녀의 바둑에서 과거의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마치 90년대의 최정상급 프로바둑기사를 눈앞에 두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바둑기사로서 인공지능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스스로가 인공지능을 꺼릴지라도 대국 상대가 인공지능의 수를 두니 자연스럽게 그 수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그의 스승인 신창연 명인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윤서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인공지능의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사람답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무래도 의식적으로 인공지능을 피하는 것 같은데.’

간단한 한 수를 고민해도 ‘인공지능이라면 어떻게 둘까’를 생각하는 정도찬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재밌네.’

아주 오래전, 그가 막 바둑에 입문했을 때, 그러니까 아직 인공지능이 없었을 때, 그때에는 정도찬도 이런 바둑을 뒀었다.

하윤서의 바둑은 그런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바둑이었다.

‘하지만 쓰지 않는 건 쓰지 않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삼연성식 포석이 무너지고 고바야시류 포석이 등장하고, 고바야시류 포석이 무너지고 중국식 포석이 등장한 것처럼.

바둑기사들은 끊임없이 효율을 추구해왔다.

효율적이라는 것은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을 줄여 없앴다는 것.

그리고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한 것이라고 판단되어 사라진 것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태되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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