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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23국 - 동상이몽(同床異夢) (24/75)



〈 24화 〉23국 - 동상이몽(同床異夢)

"...누구세요?"

나는 갑자기 나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여자를 보며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탈색을  번이나 한 건지 푸석푸석해 보이는 상아색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마치 사람을  따르는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혹시 내가 어디선가  적 있는 사람인가 싶어서 한참을 고민했다.

아직 일반 관객은 입장 시간이 안 됐으니 단순한 팬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 대회와 관계가 있는 사람 일터인데….

내가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의 얼굴빛이 점점 흐려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소율 연맹장이 내게 물었다.

한소율 연맹장은 오늘 대회의 축사 겸 관전으로 왔다는데 대회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양반도 참 바쁜 양반인데 잘도 여기저기서 우연히 마주치네

아니, 애초에  만남부터가 방송국에서 우연히 만난 것 아니었던가.

그냥 여기저기잘 싸돌아다니는 사람이니까 자주 마주치는 거겠지.

“아는 사람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서 만난 적 없는 것 같은데.”

내 대답에 한소율 연맹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변에 관심 좀 가지면서 살아요, 하윤서 협회초단이잖아요.”
“아.”

그제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묘하게 익숙한 이유를 깨달았다.

TV나 사진으로 몇 번 스치듯이 봤으니 익숙할 수밖에.

나는 자신을 못 알아봐서인지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하윤서 초단에게 인사를 건넸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정도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잠시 놀라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맞잡았다.

생각 이상으로 손을 강하게 맞잡아 손이 조금 아팠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
“아…. 네…. 나중에 익숙해지면 편하게 하겠습니다.”

갑자기 길을 막고 다짜고짜 보고 싶었다고 하길레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붙임성이 좋은 사람인 건가?

하윤서 초단은 잠시 그 상태에서 가만히 있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저는 정도찬 초단을 응원해요.”
“네? 아…. 감사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무겁게, 조용히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뜬끔없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응원하고있었다.

어째서일까.

나를 응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어디서  트라우마에 대해 전해 들은 것 같은데 혹시 본인도 비슷한 종류의 트라우마가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나를 보고 싶었고, 나를 응원한다고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동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저와 비슷한….”
“네! 맞아요!”

비슷한 트라우마가 있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역시  사람도 많이 힘들었던 거구나.

어쩐지 그렇게 힘들게 협회에 입단했으면서 공식전에는 출전을 안 하더니.

많이 힘들었겠지,  괴로움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내가 다 안쓰럽네.

나는 그녀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저도 응원할게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요.”

내 말을 들은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비슷한 처지였으니까요.”
“......”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이라도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울고 싶은 사람을 위로하면 더 울고 싶어지는 법이지.

나는 그녀를 배려하여 한소율 연맹장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잠시 나와 함께 걷던 한소율 연맹장이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둘이 무슨 이야기 한 거예요?”
“하윤서 초단도 트라우마 때문에 힘든가 봐요.”
“네? 전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는 들은  없는데요?”
“다들 그런 이야기는 숨기고 싶어하는 법 아니겠어요?”

내 말에 한소율 연맹장은 한참을 생각하고는 고개를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요. 하윤서 초단은 공식전에도 멀쩡히 출전한 적 있고.”
“트라우마의 종류가 뭐 한 두 가지겠습니까? 원래 이런 이야기는 당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뭐, 그렇다고 치죠.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녀는 개운치 않다는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때요. 자신 있어요?”
“왜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그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래, 하윤서 초단이 마음에 걸리긴 해도 대회가 코앞이다.

내가 한세빛 국수를 만나 트라우마를 떨쳐냈듯, 그녀도 언젠간 트라우마를 떨쳐낼 수 있겠지.

만약  대회에서 그녀와 대국을 하게 된다면 나 역시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와주리라.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

“...누구세요?”

나를 전혀 모른다는 듯 대답하는 정도찬 초단의 질문에 나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역시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아무리 비슷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둘이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단  번의 대국이면 정도찬 초단도 나를 알아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여자와 정도찬 초단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짜증 나는 여자는 누구지?

생각보다 얼굴이 낯에 익은 것이 바둑계에서  유명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던 정도찬 초단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을지으며 내게 다가와 악수를 권했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정도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손에 땀이 차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악수했다가 손이 축축해서 정도찬 초단이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아니야, 오히려 악수를 거절하는 게 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어.

그렇다고 지금 옷에 손을문지르는 건 좀 더러워 보이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유일한 이해자.

인공지능의 시대에 사람의 바둑을  수 있는 사람.

나는  사람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바둑판 앞으로 끌고 가서 함께 바둑을 두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일단 참아야 한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
“아…. 네…. 나중에 익숙해지면 편하게 하겠습니다.”

정도찬 초단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성급했나?

아니야, 초면에 이 정도 말은 할  있어, 전혀 성급하지도 않고 이상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다음에 한 말은 분명 실수였다.

“저는 정도찬 초단을 응원해요.”
“네? 아….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 내가 그를 응원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으…. 참았어야 했는데, 굳이 이런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대국 한 번이면 그는 나를 알아줄 텐데.

그의 앞에 서니 이상하게도 자제력을 잃는 느낌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나와 그 사이에 깔렸다.

그저, 계속 실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정도찬 초단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저와 비슷한….”
“네! 맞아요!”

‘나를 알아봐 줬어!’

머릿속에그저 그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고 잠시 후회했다.

버릇없어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 걱정마저 기쁨에 감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도찬 초단은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인공지능 시대의 프로바둑기사로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나를 모르는 척  거지?

왜?

어째서?

내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자 정도찬 초단이 말을 이었다.

“저도 응원할게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요.”

그 말을 듣자 조금 남아있던 의혹마저도 사라졌다.

확실해.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해  리가 없잖아?

드디어…. 드디어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왜 너는 인공지능을 싫어하냐 같은 바보 같은 소리만 지껄이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의 시대에 사람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

“역시….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말에 정도찬 초단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비슷한 처지였으니까요.”
“......”

달콤하게 들려야 할 그의 말이 뭔가 마음에 걸린다.

마치 생선을 먹다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은 까끌까끌함.

나는 그 찝찝함의 원인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처지였다?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정도찬 초단은 명백히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마치 조각이 모자라 전혀 맞춰지지 않던 퍼즐이 한순간에 풀리는 듯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저런 사람이 인공지능만 따라 하는 쓰레기 같은 바둑을 뒀는지, 어째서 나를 모른 척했는지.

그는 결국 인공지능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의 바둑은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에서 올바른  수를 찾는 일이다.

그 일은,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뱃길을 찾는 것만큼 고된 일이었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도 모르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 암초가 깔려있어  암초에 부딪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마저 느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당장 눈에 보이는 답을 준다.

암흑 속에서 길을 찾던 바둑기사들에게 그 빛은 길을 알려주는 등대와도 같았다.

그래서 많은, 아니 대부분의 바둑기사는  빛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 빛이 오히려 자신들을 집어삼킬 소용돌이로 인도하는 것도 모르고.

‘너무 늦었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다면….

 길을 걷는 것이 당신 혼자가 아님을 말해줄  있었다면….

그랬다면 정도찬 초단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찬 초단도 자신이 인공지능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미안했는지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정도찬 초단은 자신의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바둑을 포기하고 인공지능의 바둑을 두는 자신이 부끄러워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다는 사실을알고 있다면,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면 아직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 아직 기회가 남아있었다.

만약 이 대회에서 그와 대국을 하게 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울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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