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1국 - 친구들의 수다
한국기원 근처의 바둑 펍.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오는 조용하고 소박한 분위기의 작은 바둑 펍인 이곳에서 나는 오랜만에 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자리의 명분은 내 입단 축하였으나 내가 입단한 지도 벌써 두 달이었으니 그냥 만날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예전…. 그러니까 입단 전에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프로바둑기사, 특히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은 프로바둑기사라는 직업은 이런 사적인 자리도 만들기 힘들 정도로 바쁜 직업이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명분을만들어서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각자 500cc 맥주를 한 컵씩 앞에 둔 우리는 형식적인 건배를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 휘운이 내게 말했다.
“야, 동시 입단 같은 거 하면 무슨 기분이냐?”
“별 느낌 없어.”
“내가 바둑의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뭐 이런 감상 없어?”
“역사는 무슨, 10년 연속 국수 타이틀 지키는 것 같은 게 역사지 이런 게 무슨 역사라고.”
옆에서 세연이가 끼어들었다.
“난 네가 협회에 입단할 줄 알았어.”
“뭔소리야, 난 엄연히 협회 소속 기사인데.”
내 대답에 세연이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양쪽에 입단하는 게 아니라 협회에만 입단할 줄 알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한 건데?”
“거짓말, 내가 널 본지가 벌써 20년이 다 돼가는데 넌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수 있는 놈이 아니야.”
내 친구들은 다 좋은데 가끔 보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아서 무섭다니까.
하긴, 이십 년 가까이 알고 지내면 싫어도 이렇게 되는 법일까.
내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세연이 답을 재촉했다.
“왜 그런 거야? 한소율 그 여자가 뭐라고 꼬셨어?”
“꼬시긴 뭘 꼬셔,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한 거야.”
“둘이 자주 붙어 다닌다는데 혹시 사귀기라도 하니?”
“미친 소리 자제 좀.”
나는 잠시 한소율 연맹장과 사귀는 상상을 해봤다.
솔직히 외모에는 불만 없고, 능력도 엄청 좋으니 누가 봐도 괜찮은 여자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을 화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여자이다 보니 그 사람과 사귄다면 엄청 고생할 게 뻔했다.
인터넷에 괴담처럼 떠도는 여친이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은 사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끔찍하네.
그래도…. 다시 자세하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니 챙겨주는 거라고 매번 말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소율 연맹장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트라우마 극복에 도움을 주기도 했고, 예능 출연 전에는 이런저런 조언도 해줬고, 그리고 입단대회 마지막 대국 직전에도….
그때를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마지막 고비를 남겨둔 상황, 지치고 힘들고 의식마저 몽롱해진 상황에서 느껴진 마음이 안정되는 따스한 감각.
그 당시에는 누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정신도 없었기 때문에 나도 나중에 그 사람이 한소율 연맹장이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고 매우놀랐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의외의 사람이었으니까.
역시 한소율 연맹장은가끔 사람을 화나게 하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사람이었다.
계속 안주로 나온 강냉이를 집어먹던 재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왜 아직도 사귀는 사람이 없냐?”
“난 바둑이랑 사귀는 중.”
“지랄하지 마시고요. 나하고 휘운이는 뭐 바둑 공부 안 해서 여친 사귀는 줄 아냐?”
“그건 오히려 내가 궁금한데? 니들은 그렇게 바쁘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사귀고 다니냐?”
“시간이 날 때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연애를 하는 게 사회인의 연애란다.”
“바둑 공부 빼먹고 데이트했다는 말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함?”
“시발련이 진짜.”
재영이는 주워 먹고 있던강냉이를 내게 집어 던졌고 나는 크게 입을 벌려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먹었다.
휘운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또 받아먹네.”
“입 쪽으로 날아오는데 이건 못 참지.”
“그건 맞지.”
“뭐라는 거야 미친놈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영이는 은근히 재밌었는지 강냉이 몇 개를 더 던졌고 나는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무슨 동물원 원숭이 밥 주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일까.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던 세연이 말했다.
“그래서, 결국 동시 입단은 왜 한 건데?”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애초에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떠벌리고 다닐만한 일이 아니기도 했고.
세연이 독촉했다.
“대답.”
“내가 니네 집 바둑이냐? 대답! 하면 대답하게?”
“진짜 우리 집에 묶어놓고 키우기 전에 대답하는 게 좋지 않을까?”
“말하기 싫다니까.”
“말 안 해주면 우리 아빠 네 장인어른.”
“너무하네 진짜.”
나는 잠시 스승님을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게 되는 상황을 상상했다.
뭐지? 생각보다 괜찮은데?
우리 스승님은 입은조금 험할지언정 인격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
물론 스승으로서의 면모와 장인어른으로서의 면모는 다를 수 있겠지만.
오히려 문제는 스승님이 내 장인어른이 된다는 가정의 전재였다.
스승님이 내 장인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스승님의 딸과 결혼했다는 건데. 스승님의 딸은 신세연뿐이다.
거의 20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봤는데 결혼은 무슨.
예전 중고등학생 사춘기 시절 아주 잠깐 연애감정을 품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땐 우리 둘 다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간헐적으로 오는 트라우마 때문에 방황하고 있었고, 세연이는 세연이 나름대로 입단 준비로 바빴으니까.
그때 잠시 품은 감정은 현실이라는 물결에 잔잔히 흘러간, 그저 과거의 추억에 묻어둔 작은 감정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뭐 거의 가족에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농담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와 세연의 대화가 점점 과열될 조짐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휘운이 끼어들었다.
“애가 말하기 싫다잖아 고만 해.”
재영이 맞장구쳤다.
“그래, 때 되면 다 이야기해 주겠지.”
“... 알았어.”
아직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살짝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은 휘운이였다.
“바둑기사 넷이 모였는데 이야기가 계속 이상한 대로 흘러가네.”
“그래, 그러고 보니 도찬이 너 초단 대회 나간다며.”
“나도 초단일 때 초단 대회 정도는 나가봐야지.”
초단 대회는 말 그대로 초단들만 참가 가능한제한 기전이다.
막 프로에 입단한 사람들이나 모종의 이유로 승단을 하지 못한 사람들만 참여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수준은 낮지만, 어느 곳이던가 뉴페이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은 법.
수많은 바둑계 고인물들이 11월에 개최되는 초단 대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 초단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서 바로 팀에 지명되는 신인도 많고, 입단 초기 팬덤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된다. 심지어 초단들만 참가 가능한 제한 기전이기 때문에 다른 기전보다 우승을 노리기 수월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시작부터 커리어에 우승 한 줄을 새겨넣는 것의 가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라.
게다가 참가 인원수에 따라 달라지지만, 혹시 서른 명 이상이 참가하기라도 한다면 우승 시 승단까지 가능했다.
초단 대회 우승은커녕 참가조차 못 한 재영이 투덜거렸다.
“누구는 힘들게 승단점수 따서 승단하는데 누구는 제한 기전 나가서 날로 처먹으려고 하네.”
“꼬우면 초단 대회 나가시던가.”
“시발…. 입단하자마자 이상한 인간들이 팀에 납치하지만 않았어도.”
재영이는 나를 제외하고 입단이 가장늦었고, 재영이가 입단할 때쯤 세연이와 휘운이는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둘은 재영이가 입단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성비 좋은 신인(재영)을 팀장에게 추천했고.
그 결과 재영이는 거의 입단과 동시에 지명을 받아 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준수한 승률을 내며 순항해 초단 대회 참가 신청을 받기 시작하기도 전에 2단으로 승단해버려서 초단 대회 참가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도 바둑리그 스케줄, 빠른 승단으로 인한 시드권 상실 등의 온갖 이유로 제한기전에 출전을 못 하며 제한 기전과는 인연이 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초단 대회에 나가는 내가 부러울 만도 했다.
속이 쓰린지 재영이는연거푸 맥주를 들이켰고 그런 재영이에게 안주를 권하던 휘운이 말했다.
“이왕 나가는 거 우승해야지, 자신은 있냐?”
“아니 자신 없는데.”
질 자신이 없다고.
라는 내 회심의 드립을하기도 전에 휘운이와 세연이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질 자신 없다. 그거 대체 언제적 드립임?”
“적어도 10년은 지나지 않았냐?”
“지 중고딩때 드립을 아직도 쓰는거임?”
“냅둬, 맨날 바둑TV만 보는 애가 뭘 알겠어.”
“아니 그래도 저건 선 넘었지.”
“그건 맞지.”
“알았어. 미안하니까 그만해 새끼들아….”
나 놀리는 재미로 사는 인간들이 건수 하나 잡으니까 좋다고 달려든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이었다.
“솔직히 하윤서같은 사람만 안 나오면 초단 대회 정도는 어떻게 될 것 같긴 해.”
“일 년에 공식전 딱 한 번 나오는 사람이 초단 대회에 나오겠어?”
하긴…. 하윤서 초단은 협회에 입단해놓고서 바둑은 취미라며 최소한의 프로 자격 유지만 하고 있는 별종이었다.
가끔 공식전에서 대국하는 모습을 보면 매년 실력이 몰라보게 성장해있는데, 그런 걸 보면 바둑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 프로기사 활동은 안 하는 걸까.
아무리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알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뭐…. 그래도 어지간히 운이 없는 게 아니라면 나와 접점은 없을 테니상관없나.
갑자기 휘운이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뭔데?”
“너 입단대회 때 마지막 대국 기보 그거 한국기원이 기보 잘못 올려놓은 거 아니지?”
휘운의 질문에 재영이 타박했다.
“한국기원이 병신도 아니고 그런 실수를 하겠냐?”
“아니 근데 진짜 기보가 이상하다니까?”
“그 기보 맞을 거야, 그때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둬서 이상해 보이는 거겠지.”
“완전 다른 사람 기보인 줄 알았는데 그게 그래서 그런 건가?”
“네가 이틀 동안 서른 시간 이상 집중하고 있어 봐 맛탱이가 가나 안 가나.”
“아 서른 시간은 어쩔 수 없지.”
사실나도 마지막 대국의 기보를 보고 위화감을 느끼긴 했다.
내 평소 기풍인 인공지능의 향취는 온데간데없는 기풍.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둬서 ‘인공지능이라면 어떻게 뒀을까?’라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에 과거의 기풍이 잠시 나온 듯싶었다.
한국기원 사이트에 접속해서 기보를 확인하던 세연이 말했다.
“인공지능 특유의 세련된 맛은 없어도 이런 바둑이 더 멋지지 않아?”
재영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기는 바둑이 멋진 바둑이지.”
“어휴, 또 그놈의 인공지능 찬양.”
“인공지능의 멋짐을 모르는 네가 불쌍해.”
“뭐래.”
지금까지의 경험상 저 주제가 나오면 맨날 대화가 길어지던데.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핸드폰으로 수정이에게 오늘 늦게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