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0국 - 예능과 팬
바둑 엔터테인먼트 시대가 열리면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친구들과 가볍게 바둑 한판 두면서 술을 즐길 수 있는 바둑 펍의 존재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바둑 팬덤의 계층 변화를, 또 누군가는 공원이나 쉼터 등에서 자주 보이게 된 생활 속의 바둑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입단 과정을 보고 이제야 입단을 하게 된 내가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예능의 유행이었다.
바둑의 재부흥으로 바둑 인구가 많아지고 바둑 예능의 수요가 생기기 시작해 방송국들도 점점 바둑 예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가 유행하면 비슷한 예능이 쏟아져 나오는 건 이제는 거의 당연하다시피 여겨졌기에 수많은 바둑 예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최상위권 프로와 아마추어 100명의 다면기 대결을 다룬 예능인 ‘1 vs 100’이나 일색 바둑 다면기, 맹기(눈을 감고 바둑을 두는 것)으로 다면기 두기 등으로 유명해진 ‘극한도전’ 등이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많은 입단 과정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내게도 이런 바둑 예능들에서 출연제의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중에서도 한소율 연맹장이 추천해 준 예능은 바로 ‘집단지성’ 이었다.
1부는 프로 기사와 집단지성(시청자)의 접바둑. 2부는 프로 기사+집단지성 vs 연예인+집단지성의 페어 대국으로 이루어진 포맷의 예능이었는데 1부는 나도 프로 기사와 바둑을 둬 보고 싶다는 욕구를 잘 저격했고. 2부는 집단지성 측의 고의적인 떡수 퍼레이드에 이를 갈거나 헛웃음만 짓는 프로 기사들이 고통받는모습이 백미인 예능이었다.
떡수가 오죽 심하면 바둑 팬들 사이에서 집단죄송, 집단오류 라는 별명까지 붙었을까.
나 역시 몇 번 재밌게 본 예능이었기 때문에 출연하는데 거부감은 없었지만, 어째서 한소율 연맹장은 콕 집어서 이 예능을 나가라고 한 걸까 그게 조금 의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첫 예능 나들이가 정해지고, 시간이 흘러 촬영 당일이 다가왔다.
촬영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대기실에서 다른 출연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집단지성의 MC는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여자 MC인 장은아 아나운서, 그리고 바둑계 은퇴를 선언하고 방송인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이영훈 협회 5단 이 둘이었는데,
장은아 아나운서의 경우는 나와 별 접점이 없었기에 대충 오늘 잘 부탁합니다. 정도로 인사를 나눴지만, 이영훈 협회 5단은 바둑계 선배였기 때문에 제법 오래 잡혀있어야 했다.
물론 나도 오래 잡혀있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할 것도 없었고, 이렇게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잘 챙겨준다는 신호와도 같았으니.
이런 것도 일종의 인맥 쌓기라는 거겠지.
어쨌든 나는 이영훈 협회 5단과 대화를 나누다 궁금했던 것을 은근히 물었다.
“선배님, 그런데 오늘 연예인 참가자는 누구인가요?”
“엥? 정 프로 아직 뭐 들은 거 없어?”
“네, 전에 작가분들이랑 인터뷰 할 때도 절대 말 안 해주시더라고요.”
“이상하네…. 보통 늦어도 촬영 일주일 전에는 알려주는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뭐라고 해 줄 말은 없네, 작가들이 말 안 해줬으면 안 해준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
“가끔 있어, 사실 말이 좋아 연예인 참가자지 같은 바둑기사가 나올 때도 있고 사연 있는 일반인이 나올 때도 있었고. 그냥 와꾸…. 아니 화면 괜찮다 싶으면 섭외해서 앉히는 자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듣자 뭔가 불안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바둑계와 연예계 양쪽에 발을 걸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 인간들 다 하나같이 나한테 장난을 못 쳐서 안달인 인간들이었으니까.
뭐…. 상관없나? 어차피 이 악물고 이기려는 대국도 아니고 예능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하자.
그렇게 대기하다가 스태프들의 사인에 스튜디오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화려한 스튜디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프로바둑기사가 예능 같은 걸 처음으로 출연하면 많이 긴장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해설 때문에 카메라에 적응이라도 하게 된 걸까?
하긴 거의 매일 생방송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직도 긴장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자 스태프가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무대 가운데 설치되어있는 컴퓨터 한 대, 그 맞은편에는 다분할 전광판.
저 전광판에 이 대국에 참가하고 있는 시청자들의 모습들이 랜덤하게 뜬다는데 잘 생각해보면 단순히 이 예능의 팬이라서 참가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의 팬이라서, 나와 대국을 해 보고 싶어서 참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묘했다.
팬이라…. 사실 내가 해설자로 활동을 할 때도 내 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고, 사인을요구하는 사람도 좀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식으로 입단을 한 이후 팬들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마음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앉아 대기하고 있자 어느새 녹화가 시작되었는지 카메라에 붉은빛이 들어오고 MC들이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원래 카메라에 불 들어오면 내가 오프닝 멘트를 쳤었는데 이렇게 게스트로 나오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MC들의 질문에 발맞춰 자기소개도 하고, 인터뷰도하자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렇게 오래 촬영했는데 방영은 10분 정도 된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까 전에 휘운이 때문에 나간 예능에서도 3시간 정도는 촬영했는데 실제로 방영된 건 5분 정도였었지.
그건 관찰 예능이라 이것저것 자르는 게 다른 예능보다 많긴 하지만 스튜디오 예능이라고 해서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1부 지혜를 모아 프로를 이겨라 시작하겠습니다!”
장은아 아나운서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내 맞은편에 있던 전광판에 지금 바둑에 참여 중인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고, 나 역시 사전에 언질 받은 대로 전용 소프트웨어를 실행시켰다.
“오늘 정도찬 초단과 집단지성의 대국은 4점 접바둑으로 진행됩니다.”
"정도찬 초단은 30초 이내에 착수하셔야 하고요. 집단지성에 참가하시는 시청자 여러분은 1분 이내에 각자의 수를 선택하게 됩니다. 1분 이후 가장 많은 참여자의 선택을 받은 한수가 최종적으로 착수가 되는데요. 과연 시청자 여러분의 집단지성으로 정도찬 초단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접바둑이긴 하지만 내가 초단이었기에 고작 4점의 접바둑, 심지어 상대는 아마추어 집단.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제한시간이 30초라지만 눈을 감고 둬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자중해야지.
나는 한소율 연맹장의 조언을 되새겼다.
‘괜히 가서 모든 대국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고 이 악물고 두면서 다큐멘터리 촬영장 만들지 말고 적당히 하세요.’
‘바둑을 두는 자리이지만 어디까지나 예능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돼요.’
그 외에도 계속 쫑알쫑알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즐길 수 있도록 힘 빼고 적당히 해라.
나는 반사적으로 삼삼에 침투하려는 본능을 억누르고 우상단 화점에 날일자로 걸쳤다.
그러자 바둑판 전체에 회색 점들이 뜨더니 곧 하나의 점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었다.
대충 이렇게 보니까 감이 오는 것 같다.
회색이 지금 대국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둔 수이고, 붉은색이 가장 많은 사람이 둔 수인 듯싶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바둑은 항상 일대일로 두는데 이건 잘 생각해보면 일대 다수에 가깝지 않은가? 심지어 그 다수가 불특정 다수라니.
어쩐지 내가 이 예능에 출연한다고 하자부러워하던 사람이 많았는데 괜히 그러던 건 아닌가 싶었다.
여기에서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
결국, 1부 대국의 승자는 내가 되었다.
아무리 힘을 빼고 뒀다지만 불특정 다수의 아마추어 집단에게 4점 접바둑에 질 정도로 프로가 만만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도 적당히 손대중한 덕분에 대국 자체는 팽팽했으니 참가자들도 나름대로 즐겁게 둘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님말고...
대국이 끝난 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나는 전광판에 떠 있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체념한 정공지능이라는 내 별명을 정성스럽게 쓴 플래카드를 들고 웹캠 앞에서 흔드는 사람, 프로바둑기사를 꿈꾸는 아이인지 가족들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아이,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운 플래카드들을 들고 있는 여성 팬들. 나이 지긋한 어르신 등등.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모두 이 자리가 즐거운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광경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생각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바둑을, 그리고 나를 좋아해 주는 팬들이 없으면 나 같은 건 그냥 바둑판에 돌멩이나 올려놓는 잉여 인간이다.
‘보는 사람도 두는 사람도 즐거워야 한다.’
입단 후 정신교육을 빙자한 한소율 연맹장이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한 잔소리가 이제야 조금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짧은 휴식시간이 지나고 2부 촬영이 시작되었다.
"정도찬 초단과 집단지성의 첫 번째 대국은 정도찬 초단이 끝내기 뒷심을 발휘하여 승리를 가져갔는데요."
"과연 페어 바둑에서도 정도찬 초단이 이길 수 있을지 계속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조금 특별한 게스트가 나온다고 들었는데 어떤 분인가요?"
특별한 게스트? 누구지?
"네, 지금까지 출연한 분 중에서 이렇게 이력이 특이하신 분은 없을 것 같은데요. 전직 일본기원 연구생, 현직 아이돌, 그리고 현직 바둑 해설위원인…."
장은아 아나운서는 편집점을 의식하는지 계속 뜸을 들였지만 나는 이미 누가 나올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특이한 이력의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을 리가 없지.
"니시카와 나오미 해설위원입니다!"
내가 앉아있는 곳과 반대편에서 나오미가 걸어 나오며 카메라에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괜히 현직 아이돌이 아니라는 건가 팬서비스가 능숙해 보여서 조금 부러웠다.
나도 나중에 좀 배워볼까.
나오미가 내 반대편의 좌석에 착석하자 나오미의 소개와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병풍이 되었다.
음…. 나는 토크쇼 같은 거는 절대 나가면 안 되겠네.
잠시 토크쇼에서 무난하게 병풍 행세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니 어느새 나오미의 인터뷰가 끝났다.
자기소개와 인터뷰를 한 시간이나 진행한 나와는 완전히 다른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다.
MC들이 판단하기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방송에 나갈만한 건 다 챙겼다고 판단했으니 이렇게 한 코너가 빨리 끝나버린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룰 소개를 하겠습니다. 착수 순서는 정도찬 초단, 나오미 해설위원, 정도찬 초단의 편인 집단지성 A팀, 그리고 나오미 해설위원의 편인 집단지성 B팀입니다."
"정도찬 초단은 아까처럼 30초 안에 착수하셔야 하고요, 나오미 해설위원과 A,B팀은 1분의 제한시간이 주어집니다."
나와 전광판이 마주 보던 아까와는 다르게 나와 나오미가 각자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마주 보게 되고, 각자의 뒤에 전광판이 하나씩 세팅되고 두 번째 대국이 시작되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로인 내가 흑, 나오미가 백을 잡게 되었는데 나를 제외한 스튜디오 안의 모두가 이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돌 가리기 같은 건 안 하는 건가?
어쨌든 나로서는 선수를 양보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쁠 것이 없었고 무난하게 우상귀 화점에 첫수를 착점했다.
나오미는 좌하귀 소목에 착점했고, 내 편인 집단지성 A팀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둑판에 회색 점들이 나타나고 이윽고 한 곳에 붉은 점이 나타났는데….
"뭐지 버근가?"
집단지성 A팀의 첫수는 우하귀 일 일
내 짧지 않은 바둑 인생에서 난생처음으로 보는 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뒤의 전광판을 돌아봤고 그제야 참가자들이 손에 들고 있던 플래카드가 내 눈에 들어왔다.
‘Welcome to 집단지성’
‘아이쿠 마우스가 미끄러졌네.’
‘ㅎㅎ... ㅋㅋ... ㅈㅅ!’
정신나갈것같애...
하지만 결국 나오미도 비슷한 상황이니까 결국 누가 떡수를 잘 수습할 수 있는지가 관건일 터
정신이 어질어질했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집단지성 B팀의 첫 착수가 좌상귀 화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오미는 고맙다는 듯 카메라를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니 왜 저쪽은 정상적인데?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다들 자연스럽게 나에게 흑을 넘겼는지.
아주 예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집단지성A팀의 반대로 돌도 던지지 못하고 계가까지 간 대국의 결과는 나오미의 113.5집 승
나오미와의 상대전적 0:1이라는 기록을 박제 당하며 그 날의 촬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