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6국 - 출사표(出師表)
바둑판이 울리는 청명한 소리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의식이 깨어났다.
‘극복했군.’
한세빛은 그 수를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극과 극은 통하고, 이심은전심이라.
서로 다른길을 걷지만 결국 도착지는 한 곳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국면의 최선의 한 수.
정도찬도 한세빛도 지금 당장 인공지능을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이 수가 블루스팟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정도찬은 묘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머리가 맑은 건 오랜만이다.’
그동안 정도찬을 괴롭히던 모든 것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마음속 번뇌도, 패배를 종용하던 목소리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저 남은 것은 하나뿐.
‘이기고 싶어.’
지고 싶지 않다. 그 일념뿐이었다.
수순이 이어졌다.
아무리 큰 규모의 전쟁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는 법이다.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전투들이 하나둘 행방을 찾고 마지막 국면이 다가왔다.
도찬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자신의 집과 한세빛의 집을 비교했다.
아무리 봐도 덤을 포함하면 거의 차이가 없다. 소위 말하는 반집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승부의 관건은 우상귀끝내기에서 발생할 패.
그 패의 승자가 한 집을 더 얻는다.
정도찬은 자신의 팻감을 계산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팻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는 많았다.
문제는 그건 한세빛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열넷, 그리고 열넷.’
패가 발생하면 정도찬은 열네 수를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한세빛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현 상황이 백의 선수라는 것.
팻감을 먼저 사용해야 하는 흑의 패배였다.
패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정도찬은 한참을 바둑판을 바라봤다.
이기고 싶었는데, 정말 이기고 싶었는데.
거의 15년 만에 품은 감정이었다.
머리는 이미 졌다는 것을, 이 국면에서는 상대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 도찬 자신이 수를 잘못 읽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도찬은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수순을 이어갔다.
결국, 우상귀에서 패가 발생하고, 도찬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패를 버텼다.
반쯤 어거지를 써가며 열 네 수를 버텼다. 하지만 더 이상 팻감이 없다.
팻감이 없는 이상 더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정도찬은 패를 양보했고 한세빛은 경쾌하게 패를 이었다.
따악-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바둑판 소리가 그의 승리를 선언하는 듯했다.
덤 포함 백의 반집우세.
남은 수는 공배수밖에 없는 더 이상 손써볼 도리가 없는 국면이 찾아왔다.
정도찬도, 한세빛도 이미 대국의 결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찬은 묵묵하게 공배를 매웠다.
서로 번갈아 가며 의미 없는 한 수 한 수를 이어간다.
그리고 반상의 마지막 공배가 매워졌다.
드디어도찬의 입이 열렸다.
어느새 눈시울은 살짝 붉어지고 목이 메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감사합니다.”
“잘 두었습니다.”
긴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도찬과 한세빛은 돌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첫수부터 복기를 시작했다.
그 경험이 그들은 물론 그들의 제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둘은 한 수 한 수를 되새김질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
복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수정과 루아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정자에 드러누워 잠에 빠져버렸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다행히도 근처에 도랑이 있었기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두 아이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서로 나란히 누워 잠에 빠진 모습이 제법 친한 친구로 보여 정도찬과 한세빛은 입가의 아빠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대국의 여운을 즐기던 와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세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약속을 지켜주겠나?”
옛말에 바둑 한 냥, 인간 서 푼이라고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일지라도 바둑 한판 두고 나면 십년지기 못지않다는 말이다.
정도찬과 수담을 나누면서 그를 나이를 떠나 친구로 인정한 한세빛은 어느새 정도찬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정도찬은 한세빛 국수라면 자신을 당연히 편하게 대하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그런 한세빛의 태도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도찬은 잠시 한세빛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대국이 성사된 이유를 상기해냈다.
“그러고 보니까 그런 약속을 했었네요.”
“하하하, 나는 그거 한마디 듣자고 죽기 살기로 뒀는데 섭섭하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도찬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적 얻은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로 인한 오랜 방황, 결국 프로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
한세빛은 그저 그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뭐, 그렇게 살다가 수정이를 맡게 되고, 한소율 연맹장한테 잘못 걸려서 해설자로 데뷔도 하고…. 대충 그런 이야기입니다.”
“고생이 많았겠군, 자네도, 명인께서도.”
“저는 진작 포기하고 있었으니…. 스승님이 마음고생이 더 심하셨겠죠.”
“아니, 내가 보기에 자네는 단 한 순간도 바둑을 포기한 적이 없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정도찬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저 입단을 포기한 것뿐이지 바둑은 계속 두고 있지 않았나?”
“가정용 컴퓨터로 인공지능과 대국을 한 것뿐입니다.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어쩐지 가끔 사람이라면 절대 두지 않을 수를 두더라니….’
한세빛은 그제야 도찬의 기풍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과의 대국을 꺼렸으니 마음 편하게 바둑을 둘 상대는 인공지능밖에 없었겠지.
제대로 대국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인공지능밖에 없었으니 그가 인공지능을 닮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니까 자네가 내 앞에서 바둑판을 엎은 적이 있었지.”
“아…. 그건….”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다.
트라우마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아서, 간헐적으로 발작이 오던 시기.
그러니까, 정도찬이 연구생이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평소의 대국은 문제가 없었지만, 랭킹전, 입단점수가 걸린 대국 등의 부담감이 심한 대국에서는 트라우마 성 발작이 일어나던 시기에 정도찬은 스스로가 납득이 가지 않는 수를 둘 때마다 분노를 참지 못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잔재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정도찬은 이치에 맞지 않는 수를 보면 불편한 감정을 심하게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도찬의 해설이 매운맛이 되어버리는이유이기도 했다.
그랬던 도찬이 무려 국수가 관전하는 대국에서 중압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여지없이 트라우마 발작이 도찬을 괴롭혔고 정신을 차려보니 엉뚱한 곳에 착수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도찬은 바둑판을 엎어버렸다.
사실 말이 엎었다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바둑판을 뒤집는 등의 난동을 부린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 과격하게 돌을 던진 거지.
하지만 그마저도 예의를 중요시하던 바둑계에서는 충격적인 행동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세빛의 질문에 도찬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승부욕이라는 아주 작은 불씨가 싹 텄다.
오늘의 패배로 얻은, 언젠가는 한세빛을 뛰어넘고 싶다는 열망으로 싹 튼 불씨는 언제 트라우마라는 폭풍으로 인해 꺼질지 몰랐다.
그러니까…. 이 불씨가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장작을 넣어야 했다.
더 많은 바둑 기사들, 더 많은 강자들.
그 사람들과 만나고, 대결하고, 이기고 지면서 이 불씨는 점점 크게 타오를 수 있으리라.
적어도 도찬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입단부터 할까요?”
“...당분간 바둑계에 곡소리가 멈추질 않겠군.”
한세빛은 도찬을 상대하게 될 입단 지망생들에게 잠시 애도를 표했다.
한세빛은 도찬에게 악수를 건내며 말했다.
“승부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하네.”
도찬은 세빛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 날 도찬은 지옥에 빠졌다, 한 번의 승리에 웃고 한 번의패배에 웃는 승부사들의 지옥에.
하지만 그 지옥은 도찬이 한없이 들어가길 원하던 지옥이었다.
-*-*-
그 날 저녁 바둑과 연예 관련 기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내용의 기사를 경쟁하듯 업로드했다.
[충격…! 정도찬 해설위원 입단대회 참가하는 것으로 밝혀져….]
ㄴ 시발 별게 다 충격이래
ㄴ 충격…! 우리 집 뽀삐 강아지로 밝혀져….
ㄴ 아니 이 정도면 충격 맞지 ㅋㅋㅋㅋ 멀쩡히 해설하는 놈이 갑자기 왜 입단을 함?
ㄴ 연맹이 프로를 복사하고 있는데 해설자 한 명 입단하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냐?
ᄂ헐…. 뭐야? 우리 오빠 드디어 데뷔하는 거야??? 난 오늘을 위해 살았구나 ㅠㅠㅠㅠㅠㅠ
ㄴ 222222222 우리차니 앞으로 더 자주 볼 수 있는 거야? 나주거 퓨ㅠㅠㅠㅠㅠㅠ
ㄴ 33333333
ㄴ 데뷔가 아니라 입단이라고 미친련들아….
ㄴ 어질어질하네 시발
ㄴ 근데 왜 갑자기 입단?
ㄴ 몰라 조팝들 대국 해설하다 보니까 열 받아서 답답하니 내가 뛴다 시전하는거 아님?
ㄴ 나 정도찬 지인인데 이거 맞다
ㄴ ㅈㄹㄴ
[트라우마 극복하고 돌아온 탕아 정도찬, 출사표를 던지다.]
[‘정도찬의 입단 한국 바둑을 바꿀 것’ 정휘운, 이재영 프로 단독 인터뷰.]
[정도찬 해설의 입단대회 출전에 신창연 신세연 부녀가 눈물을 흘린 이유.]
‘아니 단체 문자메시지 한번 보냈다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의 무신경한 행동에 잔뜩 심통 난 사람들이 칼을 갈고있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읽던 도찬은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