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15국 - 대국(對局) (16/75)



〈 16화 〉15국 - 대국(對局)

한세빛은 생각했다.

‘삼삼이라….’

실리를 선점하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도찬의 첫수에 그는 조금 씁쓸함을 느꼈다.

귀를 차지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가장 효율적이다. 대부분 대국의 시작이 귀를 나눠 가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귀를 차지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삼삼은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단 한수로 귀를 장악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삼이 외면받은 이유는 너무 실리에 치우쳐서 중앙으로 발전하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첫수를 삼삼에 두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하나, 지독한 초보여서 기본을 모르거나.

둘,  점 이상의 접바둑을 두고 있어서 바로 귀에 침투해야 할 상황이거나.

그래,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인공지능, 바둑계의 축복이자 저주.

바둑기사들은 완벽한 답지를 얻었지만, 이제 모두가 그 답지를 따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모두가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인공지능을 따라 하려고 한다.

누가 인공지능과 가장 비슷한가, 그게 강함의 척도가 되고 있었다.

‘폭파전문가’ ‘대마 킬러’ ‘신산’ ‘센돌’ 등등.

각자의 개성으로, 유니크한 기풍으로 사랑받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개성의 시대가 지고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다른 프로기사들에게 이런 그의 심정을 토로하면 다들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말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이런 질문이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프로 중에서 가장 블루스팟 일치율이 높잖아?’

그럴 때마다 한세빛은 몇 번이고 대답했다.

‘내가 블루스팟을 찾아서 두는 게 아니야, 내가 두는 곳이 블루스팟인 것뿐이지.’

그는 절대로 인공지능을 쫓지 않았다.

그게 사람이 인공지능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세빛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선수를  것은 정도찬이었기에 포석은 무난한 인공지능 포석으로 진행되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따라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선수의 힘이었다.

결국, 더는 휘둘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한세빛이 먼저 칼을 빼 들었다.

좌하귀에 튼튼한 외벽이 쌓인 것을 이용해 도찬이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하변의 흑 돌 한 점을 고립시킨 것이다.

한 타이밍 빠르게 휘둘러진 칼에 도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살지 못할 돌은 아니다, 하지만 잘 살아야 한다.’

밑으로 기어서 살면 좌하귀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간다, 결국 도찬은 우하귀 쪽으로 도망을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물론 한세빛은 그냥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중앙으로 머리를 빼꼼 내민 흑 돌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어딜 도망가느냐, 난 칼을 빼 들었으니 뭐라도 배어야 속이 풀리겠다고 말하는 듯 한세빛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더는 피할  없다.

도찬도 어쩔  없이 칼을  들었다.

 돌의 무리한 행마로 벌어진 틈을 끊었다.

한세빛이 일방적으로 휘두르던 칼에 드디어 마찰음이 생기며 불꽃이 튄 것이다.

끊긴 백은 충분히  수 있다.

아생연후살타

유명한 바둑 격언의 하나다.

우선 자신의 돌이 산 다음에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세빛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세빛은 백을 끊기 위해 둔  돌을 오히려 다시 끊어버렸다.

물고 물리는 혼전.

정도찬은 이 순간 수많은 프로기사가 국수와의 대결은  순간이 사활이라고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한세빛은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은 손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모두가 손해가 두려워 두 걸음을 걷기 위해 한 걸음을 물러날 때 한세빛은 손해를 감수하고 한 걸음을 걷는다.

상대가 국면을 보며 예상하는 수읽기를 모두 허사로 돌린다.

그렇게 항상 상대의 예상보다 빠르게 숨통을 옥죈다.

뭐 하나 상대의 마음대로 해주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막무가내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 봤을 때는 뭐 이런 수를 두는가 싶었다.

하지만 수를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읽으면 읽을수록 절묘하다.

자신이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을 상대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앞을 읽고 있는 걸까.

갑자기 막막함이 몰려왔다.

정도찬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럴 때 인공지능이라면 어디를 둘까.

인공지능에게는 감정이 없다.

감정이 없으면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다.

감정이 없으면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감정이 없으면 트라우마 따위로 고생할 일이없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길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승률이 높은 방향으로 묵묵히 걸어간다.

그래서 정도찬은 항상 인공지능이 부러웠다.

그래서 정도찬은 인공지능을 닮고자 노력했다.

따악-

한참의 장고 끝에 바둑돌을 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도찬의 다음 수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심지어 한세빛마저.

정도찬은 누가 봐도 싸움이 진행돼야 하는 수순에서 손을 빼고 좌상귀의 실리를 택했다.

‘사람’ 이라면 그런 수를 두지 않는다.

그저 감정 없이 한 수 한 수의 득실을 따질 있는 인공지능만이   있는 수였다.

한세빛은 이 수의 득실을 잠시 따져보고는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괴물을 만들었군.’

최고의 재능이 완벽한 답안지를 만나 괴물이 되었다.

한세빛은 이 대국이 쉽지 않아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국면이 점점 복잡해졌다.

절묘한 바꿔치기로 바둑판 전체가 남과 북으로 나뉘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팽팽한 바둑이 엎어진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한세빛의 국지도발에 정도찬이 역공을 가한 것은 좋았으나 방향이 나약했다.

결국, 그 틈을 파고든 백의 까칠한 응수타진에 단단해 보이던 흑의 행마가 와해되었다.

‘잊으면 안 된다, 상대는 국수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아차 할 새도 없이 찌르고 들어온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정확한 응징이 날아와 숨통을 조인다.

도찬은 실수를 깔끔하게 인정하고 타협을 요구했다.

자신이  걸음 물러설 테니 여기까지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세빛은 협상을 하자며 손을 내밀면 손을 물어버리는 반상 위의 호랑이다.

당연히 호락호락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타악-

결국,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복잡한 국면.

대국을 관전하고 있던 김수정과 이루아는 국면을 이해하는 것을 반쯤 포기했다.

이 대국의 수읽기는 둘이 도저히 따라갈  없는 아득한 곳에 있는 듯했다.

자신의 스승과 호각을 다투는 정도찬의 모습을 본 이루아는 충격에 빠졌다.

애초에 그녀는 정도찬의 대국을 보는 것이 처음이다.

그저 바둑 좀 두는 기원 사장인 줄 알았던 도찬이 그녀의 하늘과도 같던 스승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말 충격을 받은 쪽은 수정이었다.

그녀의 스승이 강한 것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군가 그녀에게 정도찬의 실력이 어느 정도냐고 물어봤다면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협회의 프로 수준은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했을 그녀에게 이 광경은 충격  자체였다.

그녀의 스승은 강했다.

정도찬의 친구들이 그가 프로가 되는 것을 포기한 걸 항상 아쉽게 여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정과 루아 둘 다 이런 대국을 볼 기회는 흔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비록 국면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소녀는 이 광경을 필사적으로 눈에 담았다.

그저, 지금은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고 이 대국을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소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파국이 찾아왔다.

’망할….‘

혼전 속에서 작은 승기를 찾아낸 도찬의 정신이 무너졌다.

팽팽했던 집중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고가 정지했다.

평소였다면 정신을 차려보면 이상한, 얼토당토않은 수를 자신을 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찬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억눌렀다.

’패배에익숙해진 게 아니에요, 그걸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나는  게 아니다.  준 거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단 제대로 지는 것부터 시작해보죠.‘

얼마 전 상담사가 한 이야기가 또렷이 생각났다.

그리고 직감했다.

 자리에서 도망간다면 자신은 평생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오랜 시간 트라우마에 억눌리고 무시당하면서 사라진 줄로만 알고 있던 감정이 호적수를 만나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승부욕.

도찬은 지금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지고 싶지 않다.

이기고 싶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생소한 감정에 도찬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한편 한세빛도 정도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실력으로 왜 아직도 입단을 안 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정도찬은 멘탈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에게 공감해줄 수도 없었다.

지금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

그저 기다려주는 것.

달은 아직 중천에  있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수정과 루아가 잠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즈음.

따악-

바둑판이 울리는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도찬은 가만히 자신이 착점한 흑 돌을 바라봤다.

동틀  여명에서 뻗어 나온 빛이 바둑돌에 반사되어 눈을 어지럽혔다.

그 따스하고 찬란한 빛이 오늘따라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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