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14국 - 국수(國手) (15/75)



〈 15화 〉14국 - 국수(國手)

LC배 아마추어 대회 2일 차.

수정이의 8강전 상대는 연구생 상위 조까지 올라갔지만, 바둑을 포기한 30대 회사원이었다.

슬쩍 어제의 기보를 보니 그동안 바둑을 꾸준히 둬왔는지 상당한 기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연구생 상위 조면 지금 연맹의 초단 정도는 우습게  수 있었을 것이니 수정이로서는 이번 대회에서 첫 번째 난적을 만난 셈이었다.

루아의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국 바둑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는데 실력이 연구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확실히 어느 대회든 8강 정도 되면 어중이떠중이는 없는 법이지만 아마추어 대회에서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대기업이 스폰서로 붙으면서 상금 규모가 커졌기에 그만큼 대회의 수준도 올라간 거겠지.

“이기고 올게요!”

초반 50수는 거의 반반이었다. 수정이도 포석이 약점이지만 상대도 인공지능 포석에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사실 수정이가  돌을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포석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이냐의 주도권은 흑을 잡은 사람이 쥐고 있으니까.

반대로 만약 상대가 흑을 잡고 수정이가 백을 잡았다면 수정이가 잘 모르는 과거의 포석을 들고 와서 수정이를 흔들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포석은 사장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인공지능 포석 위주로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 로망을 외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다.

프로에도 그런 사람이 없지 않았다.

‘역시 포석 공부 시간을 늘려야….’

수정이가 알았다면 기겁을 할 생각을 하며나는 계속 대국을 관전했다.

수정이의 공격력은 발군이었지만 상대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격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으로 어떻게 국면을 이끌어가야 할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짬으로 때려 맞추는 병장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수정이의 공격이 아직 단조로운탓이다.

바둑에서 공격은 무조건 상대의 돌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리하게 대마를 노리다가 상대에게 기회를 내어주는 것보다 대마를 살려주는 대가를 착실하게 받아 조금의 차이로 확실하게 이기는 편이 이상적인 공격에 가까웠다.

이는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뛰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창한 9단의 전성기 시절 방법론이기도 했고.

결국, 힘만 휘두르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상대는 내가 그래도 25년 바둑 짬이 있는데 이런 거에 당하겠냐는 듯 수정이의공격을 물 흐르듯 받아넘겼고. 서로 미친 듯이 치고받는 난타전 끝에 계가까지 갔지만, 결과는 수정이의 두 집 반 패배였다.

분명 이길 기회는 있었지만 끝내기가 아쉬웠다.

수정이는 대국이 끝난 후에도 한참 앉아있었다.

나는 수정이에게 다가가서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이 정도 대회에서 8강이면 잘 했어.”
“이길 수 있었어요….”

바둑뿐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뒤돌아보면 아쉬운 점은 있는 법이었다.

수정이의 시선은  후에도 한참 동안 바둑판에 머물러 있었다.

루아 역시 계가까지 가는 치열한 대국 끝에 반집 패를 당했다.

상대 진영에 숨어있는 반집을 찾아내지 못하고 승리를 확신하고 보수적으로 끝내기를 마친 탓이었다.

형세 판단의 실수였다.

비록 수정이도 루아도 8강 까지였지만 두 아이 다 이번 패배로 느낀 점이 많았으리라.

결국,  아이의 맞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 수정이의 첫 대회가 막을 내렸다.

-*-*-

아무리 바둑의 인기가 예전보다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마추어 대회까지 일일이 찾아보는 코어  중에서도 코어 팬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팬층이 두껍다는 게임 리그도 전국구급의 아마추어 대회가 아니라면 시청률을 보장하지 못하는데 바둑이라고 별수가 있을까.

심지어 예전과는 다르게 대국 숫자가 많아졌고, 그만큼 팬들의 피로도도 늘었다. 프로들의 대국을 일일이 관전하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아마추어 대회까지 찾아볼까.

이게 LC배 아마추어 대회 개최 측이 처음LC에게서 준결승과 결승의 방송을 요구받았을  난감해한 이유였다.

기껏 카메라까지 준비해서 방송을 송출했는데 시청자 수가 100명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게다가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스폰서인 LC 측에서도 심기가 불편해질 것이 뻔했다.

그래도 그나마 주최 측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국수의 제자인 이루아가 준결승에 진출하면 국수의 제자가 궁금해서라도 기꺼이 방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과 최근 매운맛 해설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정도찬 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대를 걸었던 이루아는 아쉽게도 8강에서 떨어져 버렸고….

‘이젠 정말 믿을 건 정도찬 뿐이야!’

라고 생각하게 된 주최 측은 정도찬이 부담감을 느낄 정도로 그의 편의를 봐주려고 노력했다.

도찬의 입에서 ‘알았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하게.

그리고 결국 사전에 공지한 방송 시간이 되었고….

‘뭐지 버근가?’

시청자 수가 이상할 정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시청자 수를 체크하던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황당해질 정도였다.

“뭐야? 왜 이렇게 시청자가 많아?”
“버그 아니에요?”
“시청자 수 조작해주는 뷰봇이라는게 있다는데 누가 그런 거 넣은 거 아니에요?”
“뭐하러? 아니 애초에 뷰봇이면 채팅 속도가 이렇게 빠를 리가 없잖아.”

모두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한 채팅창을 모니터링하던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저희 좌표 찍힌 것 같은데요?”
“뭐? 좌표? 왜?”
“잘은 모르겠는데 정도찬 해설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한 바둑 커뮤니티의 ‘오늘 정도찬 아마추어 대회 해설한다는데?’라는 지극히 평범한 게시글로 구르기 시작한 떡밥은 ‘프로 대국도 그렇게 까는데 아마추어 대국은 얼마나 깔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졌고. 결국 ‘재밌을 것 같은데?’라는 결론이 되어 대국을 보며 커뮤니티를 하는 소위 말하는 중계라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대국이야 어찌 됐든 정도찬만 보면 좋다는 팬클럽까지 합세했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숫자의 시청자들이 몰리게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길이 없는 주최 측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LC배 아마추어 대회 준결승, 결승의 해설을 맡은 정도찬입니다.”

‘평소랑 시청자가 비슷하네. 요즘은 아마추어 바둑도 많이들 보는구나.’

라는 태평한 생각을 하는 도찬을 제외하고.

-*-*-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해설을 끝낸 

나는 수정이와 함께 한세빛 국수의 집으로 향했다.

어제 한세빛 국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나와 함께 갈 생각이었지만 루아의 기분이 너무 나빠져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제자가 수정이라서 다행이야….

한세빛 국수가 알려준 주소에 도착하자 한국식 전통 가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내가 한세빛 국수와 대국을 하러 여기까지 왔구나.

묘한떨림이 느껴졌다.

내가 대문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나와 수정이를 반겼고 그제야 집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 거주 공간에 넓은 마당에는 작은 정자가 지어져 있었고, 그런 집 주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나무들이 오밀조밀하게 심겨 있었다. 심지어 근처에 도랑물이라도 흐르는 건지 물 흐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혀 마음을 안정시키는 듯했다.

그 풍경을   감상은 딱 하나였다.

‘와 진짜 바둑 두기 좋은 환경이네.’

우리 기원도 대국 환경이라면 어디 가서 안 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그냥 차원이 다르다.

집 구석구석 모든 것이 바둑을 위한 것들로 채워진 환경.

그게 바로 한세빛 국수의 집이었다.

그 경관에 감탄하여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있자 한세빛 국수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미안해요, 루아가 기분이 너무 나빠 보여서….”
“아, 아닙니다.”

그의 옆에는 루아가 있었는데 아직도 화가 잔뜩 난 것인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긴말은 필요 없겠죠? 달이 밝으니 정자에서 즐겨 봅시다.”

그렇게 나와 수정이를 정자로 안내한 한세빛 국수는 직접 방에 들어가 바둑판과 바둑알을 들고 나왔다.

내가 가져오겠다 했지만, 손님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다며 극구 사양하시더라….

한세빛 국수는 바둑판을 정자 가운데에 놓았다.

“앉으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조용히 국수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수정이와 루아가 각각 한 면씩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한세빛 국수가 건네는 검은 바둑돌이 담긴 통을 조심스레 받았다.

누가 흑을 잡느니백을 잡느니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한세빛 연맹 9단은 국수였고 그 뜻은 그가 한국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라는 의미였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나는 조용히 흑 돌을 집어 반상 위에 착점하려는 순간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미안했다며,  부탁한다며 허허롭게웃고 있던 사람 좋은 인상의 아저씨는 온데간데없어졌다.

호의를 담고 있던 눈매에는 살기마저 감도는 듯했고, 미소를 짓고 있던 입가는 굳게 닫혔다. 그가 항상 들고 다니는 그의 부채가 마치 서슬 퍼런 명검처럼 느껴졌다.

반상 위의 호랑이.

그가 아직 국수라고 불리기 전, 사람들이 그를 부르던 별명이 상기되는 건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미친….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첫수를 착점했다.

휘영청 밝은 달에게서 뻗어 나온 빛이 바둑돌에 반사되어 내 눈을 어지럽혔다.

 서늘하고 요요한 빛이 오늘따라 두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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