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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13국 - 배중사영(杯中蛇影) (14/75)



〈 14화 〉13국 - 배중사영(杯中蛇影)

우리는 금방이라도 바둑판을  기세였지만 나와 한세빛 국수 양쪽 다 장소가 좋지 않음은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둘째 치더라도 한세빛 국수가 누군가 대국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면 대회 참가자들에 관한 관심이 죄다 이쪽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들이어야 할 대회 참가자들에게 큰 민폐가 된다.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보죠, 오늘은 제자들의 응원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니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세빛 국수는 아쉽다는  다시 부채를 접었다.

나 역시 아쉬웠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한세빛 국수에게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대기실을 나와 수정이가 대국을 하고 있을 대국장으로 향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내가 아는 한세빛 국수는 빈말 같은  하지 않는 성격이다.

언제가 되었든 그와 상대할 기회는 오게  터.

만약 그에게 진다면 나는 무슨 마음을 품게 될까?

그 상황이 와도 내가 지는 게 당연하다며 별생각 없을까 아니면  것을 분해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직 패배에서 분함이라는 감정을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나도 승리를 갈망할 수 있게 되는  아닐까.

이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닌가.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B블록의 대국장에 도착하여 수정이를 찾았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수정이의 대국은 시종일관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난 지옥 특훈(?)이 효과가 있긴 했었는지, 어설픈 포석은 온데간데없이 인공지능 포석을 활용해 예전보다 더욱더 단단해진 진용을 갖추고 그 단단한 진영은 수정이 특유의 공격성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상대역시 보통은 아닌지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기만 하면 결국 지는 미래밖에 없다고 판단했는지 과감하게 응수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대는 넓은 중앙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직 무주공산인 중원을 차지해 미래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수정이 역시 끈질겼다 주변의 쌓아놓은 성을 활용할 줄 알게 된 수정이는 상대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씩 하나씩 끊어버리며 상대를 쫓았다.

결국, 더는 도망갈 곳도 없어진 상대는 목에 드리운 수정의 칼끝을 바라보고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비록 아마추어 대회였지만 수정의 외부활동 첫 승을 올린 것이다.

상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수정이는 이내 자신의 대국을 관전하고 있던 나의 존재를 깨닫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스승님! 이겼어요!”
“그래, 옆에서 보고 있었어,  두던데?”
“이게 바로 지옥 특훈의 성과에요!”
“그래, 그래. 우리 제자 최고다.”

나는 수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긴장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해줬다.

“루아 대국은 끝났어요?”
“아니, 아직 안 끝났을걸? 보러 갈래?”
“네!”

우리는 루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아 역시 상대방을 크게 압도하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초반부터 보지 못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봤던 것보다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루아의 단단함은 수정이의 단단함과는 다른 단단함이었다.

수정이의 단단함이 상대를 더욱 세게 공격하기 위한 단단함이라면 루아의 단단함은 지키기 위한 단단함.

마치 요충지에 높은 산성을 쌓아놓고 대포를 잔뜩 비치한 후 ‘네가 와!’를 외치는 모양새였다.

예전에 수정이와의 대국에서 보여준 어설픈 욕심을 철저하게 배제한.

조금씩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바로 걸어 잠그는 작은 집 차이로 확실하게 이기는 스타일.

확실히 수정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둘의 성장세가 대단하다.

저번 달만해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년쯤에는 정말 프로 입단을 노려봐도 되지 않을까?

이윽고 도저히 찔러볼 구석이 없다고 판단한 루아의 대국 상대는 결국 돌을 던졌고 상대와 인사를  루아는 곧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A블록이라며? 운이 좋네! B블록이었으면 나 때문에 결승도 못 갔을 거 아냐.”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바보야.”

이것 봐…. 둘이 만나자마자 싸우잖아.

둘이 같은 학교에다니면 하루하루가 피곤해질 거라는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아 보였다.

한국에 바둑 중학교가 많지도 않고 비슷한 지역이면 다 같은 곳으로 몰릴 텐데 벌써 머리가 아프네.

그래도 재밌는 점은 루아가 수정이에게 수정이의 대국 결과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회전 정도는 당연히 이겼을 거라는 믿음.

사이는 나빠 보이지만 둘은 이미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라이벌이지.

그렇게 잠시 투닥거리던 둘은  이상 싸웠다가는 주변에 민폐가 된다는 것을 의식한 것인지 ‘결승에서 보자!’라는 결론을 내고는 싸움을 멈췄다.

“스승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가볼게.”

루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떠나버렸다.

갑자기 와서 싸울 거 다 싸우고 홀연히 떠나는 모습이 여전히 폭풍 같은 아이다.

어떻게  성격으로 저렇게 침착한 바둑을  수 있는 걸까.

참 신기한 일이었다.

*-*-*

그 날, 수정이도 루아도 불타오른것인지 서로의 상대를 크게 이기며 둘 다 8강 안착에 성공했다.

열 살 아이들이 시니어 대회 8강에 2명이나 들어가는 상황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둘 중 한 명은 국수의 제자였으니 화제가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대회의 2일 차부터 시작되는 8강전의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진행되는 인터뷰에서 단연 주목을 받은  루아였다.

의례적으로 각자 8강전에 진출한 소감을 묻고, 포부를 물어본  기자들의 질문은 루아에게 집중되었다.

아직 어린 루아로서는 그 상황이 무서울 법도 하지만 루아는 당당하게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고 주변에서는 ‘역시 국수의 제자’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수정이 포함 7명은 반쯤 병풍이 된 상태였고.

그래, 이게 ‘국수의 제자’라는 위치가 가지는 가치였다.

휘운이도, 세연이도, 재영이도, 한 사람의 프로로 당당히 인정받기 전에는 여기저기서 ‘명인의 제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프로기사들과 똑같은 1승을 거둬도, 승단 점수를 채워 승단해도 ‘역시 명인의 제자’라며 다른 사람들보다 주목을 받았다.

바둑 엔터테인먼트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인기라는 요소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지금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아 유명해지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재능도 있고, 훌륭한 스승도 있고, 국수의 제자로서 주목도도 남다르다.

본인이 무너지지 않는 한 루아의 바둑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모습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수정이도 루아와 같은 10살이고, 오늘 8강에 진출했다.

그런데도 수정이와 루아의 취급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전적으로 나 때문이리라.

나는 수정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수정이가 누군가에게 바둑을 누구에게서 배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언제까지 당당하게 내 이름을  수 있을까.

내가 괜한 욕심을 내고 있는  아닐까.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표정이 좋지않네요, 제자가 훌륭한 성적을 냈는데 좀 더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요?”

한세빛 국수였다.

“그냥…. 정말 제가 저 아이를 맡아도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하, 이거 우연이네요, 사실 저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요.”
“네?”

의외의 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자리의 주인공은 루아였고, 그건 한세빛 국수의 덕분이었으니 그저 흐뭇하게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루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까다로운 평가를 받을 거예요, 사람들은 계속 루아를 검증하려고 들겠죠. 1승과 1패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질 겁니다.”

한세빛 국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할 말을 고르는 듯싶었다.

“그래서 나도 이런 고민을 하곤 해요, 루아가 저러다 무너지지는 않을까, 내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필요 이상의 주목과 압박을 받는  아닐까. 내가 정말  아이를 맡는 것이 맞는가.”

그렇게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토해내듯 말한 그는 나를 바라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결국 완전히 같은 고민이죠?”
“하하하, 그렇네요.”

생각해보면 세연이는 자신이 ‘명인의 딸’이라고 불리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재영이도 휘운이도 ‘명인의 제자’가 아닌 이재영 프로 정휘운 프로라고 불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가.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더니.’

그래,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그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사실 이건 이 세상 모든 부모와 스승의 고민이죠, 내가  더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면 더 잘 해주지 않았을까.  스승님도, 명인께서도, 같은 고민을 하셨을 겁니다.”
“그렇군요….”

스승님은 제자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내가 긴 방황 끝에 결국 바둑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스승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무리 역지사지를 외쳐도 사람은 결국 자신이 직접 그 당사자가 되고 나서야 진정한 공감을 할  있다고 했던가.

한 아이의 스승이 되고 나니 그 당시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의문이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뭐,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좋은 날이잖아요? 애들한테 웃는 얼굴을 보여줍시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하하, 감사까지야, 그나저나 내일 일정은 어때요?”
“내일은 여기 대회 준결승하고 결승 해설 일정 말고는 없습니다.”
“잘됐네요, 저도 루아 때문에 내일 하루 스케줄은 다 비워놓은 상태인데.”
“네?”

내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물어보자 한세빛 국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벌써 잊었어요? 대국 약속?”

지금까지 허허롭게 웃으며 제자들의 이야기를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감히 나에게 시비를 걸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느냐?’ 라고 물어보는 듯 사나운 웃음이었다.

반상 위의 호랑이는 한번 문 먹잇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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