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7국 - 쟁선공후(爭先恐後)
‘답답해’
루아와의 대국 내내 수정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후회했다.
‘포석 공부 열심히 할걸.’
대국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자신의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판단해도 그녀의 세력이 열세였다.
아무리 두드려도 상대는 점점 단단해진다.
수정은 조금씩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국이중반에 접어들고.
루아가 아직 무주공산인 중원으로 진출을 꾀하자 수정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강하게 반발했다.
그 판단은 당연했다.
중원마저 루아가 원하는 대로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 수정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수정은 수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중원을 기점으로 본격적인전쟁이 시작되자 수정은 지금까지 당한 것을 되돌려 주겠다는 듯 신나게 여기저기 찔렀고 형국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직 바둑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수정은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지도대국을 둘 때마다 항상 스승님이 칭찬하는 수읽기와 가치판단.
‘복잡하게 만들어야 해, 지금보다 더 복잡하게.’
국면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자신이 유리하다.
싸우는 것이 맞는지, 물러서는 것이 맞는지.
언제 손을 빼야 하는지,
이것과 저것을 바꾸는 것이 이득인지 손해인지.
수정은 끊임없이 루아에게 판단을 요구했다.
한 편 약간의 욕심을 냈다가 불의의 일격을 맞은 루아도 슬슬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독한 년’
진흙탕에 뒹구는 기분이었다.
아니, 늪에 점점 가라앉고 있는 사람이 발목을 붙들고 절대로 놔주지 않는 기분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수가 맞는 건가?’
점점 확신이 희미해졌다.
‘아니야, 나도 헷갈리는데 저 애가 제대로 수를 읽고 있을 리가 없어.’
그래 이건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이다.
정석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까 국면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실수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침착하자, 침착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말은 신경 쓰지 말거라, 너는 내가 인정한 재능이다.’
스승님이 해 준 말을 생각하자 자신감이 다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수정과 루아는 수순을 이어갔고 전투는 점점 치열해졌다.
하지만 막상 그걸 관전하고 있는 도찬은 다른 종류의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역시 아직 애들이네.’
아무리 국면이 복잡하고 둘이 제대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조금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실착 대잔치였다.
물론 누가 봐도 실수라고 느껴질 정도로 심한 실착은 없었지만.
3집의 이득을 볼 수있는 수가 있는데 2집의 이득을 볼 수 있는 수를 뒀어도 실착은 실착인 것이다.
그 한집이 나중에 승패를 가르는 것이 고수들의대국이니까.
수정이는 자신이 읽은 수에 대한 과한 확신이 있어 보였다.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봐도 좋으련만 이거다 싶으면 바로 치고 들어간다.
자신감이 있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뭐든지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모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고….’
결국, 수정의 치명적인 실수가 나왔다.
지금 당장은 하변의 싸움에 괜찮은 수로 보이지만 결국 수순이 이어지다보면 좌하귀 전투의 행방을 가를 악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둘 다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좌하귀에 시한폭탄을 둔 체 수순이 이어졌다.
‘어?’
그 시한폭탄의 존재를 상대보다 빨리 깨달은 것은 수정이었다.
아무리 수를 읽어봐도 이대로 가면 좌하귀 백 다섯 점이 사석이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하변의 싸움을 위해 둔 한 수.
그 한 수 때문에 좌하귀 백의 행마가 제한됐다.
전투, 아니 전쟁의 행방을 가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형세를 판단해봤지만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좌하귀를 잃으면 미래가 없었다.
수정은 수를 읽고 또 읽어봤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사석작전?
아무리 사석을 활용한다고 해도 저 정도 손해를 메꿀 수 있을까?
‘졌어….’
침착했어야 했다.
하변의 우세를 굳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둔 한 수가 오히려 그녀를 옭아맨 것이다.
‘져버렸어….’
그녀는 이겼어야 했다.
이겨서 자신의 스승을고작 기원 사장이라고 깎아내린 저 꼬맹이의 콧대를 눌러줬어야 했다.
저 짜증 나는 마음에 안 드는 애한테 졌다고 생각하니 분함이 몰려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어.”
“뭐?”
“졌다고!”
거의 울기 직전인 수정이 방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루아는 황당함을 느꼈다.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돌을 던진다고?
왜? 어째서?
대체 무슨 수를 읽은 거야?
대체 왜 네가 졌다고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거야?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수정에게 물어보고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분명 이긴 건 루아 자신이지만. 기분이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찝찝함만이 남았다.
흑 이루아 백 김수정 호선 덤 6집 반
제한시간 무제한
197수 흑 불계승
그렇게 두 사람의 첫대국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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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 밖으로 뛰쳐나간 수정이의 뒤를 쫓아가려다 멈춰섰다.
애가 거의 반쯤울고 있었는데 지금 가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울고 싶은데 옆에서 울지 말라고 하면 더 울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있으니 제대로 울기도 힘들고.
그냥 모르는 척 있다가 조금 진정되면 데리러 가자.
나는 기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지고 나서운 게 언제였더라….’
나도 어렸을 때는 지는 것이 너무 분해서 운 적이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꽤 많이 울었다.
아무리 내가 한국 바둑계가 주목하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지만 모든 대국에서 항상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세연이한태 지고 수읽기를 실수했다고 분해서 울고,
재영이한테 반집으로 지고 형세판단을 잘못했다고 분해서 울고,
심지어스승님에게 크게 졌다고 분해서 운 적도 있다.
나에게도 진 것이 분해서 울 정도로 진심으로 이기고 싶었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
문득, 승리 한 번에 웃고 패배 한 번에 울던 과거의 그 순간들이 조금 그리워졌다.
아…. 애들 보고 싶다.
나는 괜히 핸드폰을 꺼내서 창연도장의 단톡방에 톡을 보냈다.
-나 : 자냐?
역시 바둑쟁이들답게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던 건지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휘운 : 쟤 왜 저러냐?
-재영 : (분홍색 토끼가 몰라! 라고 말하는 이모티콘)
-세연 : (분홍색 토끼가 외면하는 이모티콘)
-휘운 : (분홍색 토끼가 우는 이모티콘)
-나 : 저 토끼들 다 잡아 죽여버리고 싶네 ㅅㅂ
-나 : 방송 나가서 풀 수있는 개꿀잼 썰 푼다.
-휘운 : 오
-휘운 : 개인톡으로 좀 보내보셈
-휘운 : 신세연 저거 내일 예능 녹화 감.
-세연 : (분홍색 토끼가 깡충깡충 뛰는 이모티콘)
-나 : 지랄ㄴ
-휘운 : 힝
-재영 : 귀여운척하지마라
-재영 : 죽여버리기전에
-휘운 : ???
-휘운 : 님 어제 방송 나가서 한 애교는 무엇?
-휘운 : 내가 널 먼저 죽이는 게 순서가 맞지 않음???
-재영 : 너미튜브에서귀여운척하는거
-재영 : 지금까지참았으면고마운줄알아야지
-재영 : 그리고난벌칙으로한거잖아
-휘운 : 띄어쓰기 좀 해 미친놈아 정신병걸릴것같애
-재영 : 폰고장남
-재영 : 띄어쓰기가안댐
-휘운 : 아깐 잘되지 않았냐?
-휘운 : 그런데 폰이 그렇게 고장이 날 수도 있음?
-휘운 : 신기하네
-재영 : 아니야…. 진짜 고장 났어 대신 실제로 고장 나진 않았음
-재영 : 사실 내가 만들어낸 가상 고장임 ㅋㅋ
-재영 : 근데 띄어쓰기만 고장 나서 신기해
-휘운 : 미친련아니야이거
-세연 : 신세연 님이 대화방을 나가셨습니다.
-휘운 : 아 시발련아 너 때문에 나갔잖아.
-재영 : 이재영 님이 신세연 님을 대화방에 초대했습니다.
-휘운 : 그래서 썰좀 풀어보셈 뭔데?
-나 : 사실 내가 만들어낸 가상 썰임 ㅋㅋ
-나 : 근데 방송 나가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어서신기해
-휘운 : 시발련아
난 낄낄 웃으며 앱을 껐다.
채팅 앱의 메시지 숫자가 미친 듯이 오르고 있지만 뭐 괜찮겠지.
조금 기분이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제자님의 기분도 환기해주러 가볼까.
나는 계단을 내려가 기원에 들어갔다.
수정이는 조금진정이 된 것인지 보조 조명의 옅은 조명에 의지해 방금 대국을 복기하고 있었다.
한 수를 두고 한참을 쳐다보고
또 한 수를 두고 한참을 쳐다보고.
한 수 한 수 곱씹어가면서 복기해나가고 있었다.
원래 대국이 끝난 후에 하는 복기에는 크든 작든 아쉬움이 보이는 법이다.
그게 패배한 대국이라면 더 심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패배한 대국을 복기하며 곱씹는다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다.
하물며 절대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패배한 대국이라면 더더욱 괴롭겠지.
나는 기원의 불을 켜며 말했다.
“눈 나빠지니까 불은 켜고 하지 그랬어.”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수정이는 벌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길 수 있었어요, 다음에는 이길 거에요.”
그 모습이 내 어렸을 적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그래,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거야.”
나는 수정이에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해주고 2층으로 올라왔다.
사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너무 빨리 포기한 건 아닐까?‘
’앞으로는 착수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겠니?‘
‘앞으로 포석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건 어떻겠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하지만 공부하고 있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는 법이다.
어떤 야구 선수가 패배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던가.
이번 패배를 딛고 수정이는 더 성장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수정이가 조금 부러워졌다.
2층에 올라오자 아까 대국을 뒀던 수정이의 방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불을 켜 놓고 자는 건가 싶어 살짝 열려있는 문틈으로 안을 살폈다.
수정이와 똑같은 표정으로 복기를 하는 루아가 보였다.
조금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수를 본 거야….”
아무래도 수정이가 왜 돌을 던졌는지 이해를 못 하는 듯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노, 노크 정도는 하고 들어와!”
“여긴 우리 집인데?”
“그래도 기본적인 매너라는게 있는 거잖아.”
“어휴...”
그냥 방에 들어가서 잘 걸 그랬나.
“왜 수정이가 돌을 던졌는지 모르겠어?”
“그야 당연히 알…. 모르겠어.”
다시 한참 동안 바둑판을 바라보던 루아는 내게 물었다.
“대체 당신들 무슨 수를 본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내가 읽은 수의 수순을 보여줬다.
점점 수순이 이어지면서 루아의 눈이점점 세게 흔들렸다.
우하귀를 찌르고 중원을 거쳐서 하변을 건들고 좌하귀의 백 다섯 점을 사석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의 바둑판 절반을 활용하는 책에서나 볼 법한 수순의 묘.
“그 애가 이런 수를 봤단 말이야? 돌가리기도 모르는 애가?”
“아니, 이건 내가 본 수인데?”
“뭐?”
“내가 어떻게 수정이가 본 수를 알겠어.”
무슨 독심술사도 아니고.
“수정이가 본 수는 이 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케이?”
“...짜증 나.”
인상을 한껏 찌푸린 루아는 나를 반쯤 강제로 방 밖으로 내보냈다.
거 참 여긴 내 집이라니까 그러네.
내가 저 두 아이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조금 정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 두 아이는 좋은 라이벌이 될 거다.
아니 이미 좋은 라이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