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92화
34. BET BET(6)
불현듯 들려온, 익숙한 이름이 그의 정신을 먹먹하게 했다.
정의헌이라는 사람 자체가 본인의 어두운 이야기는 좀처럼 들려주지 않아서 그런가.
친구로서 몇 년이 지나서까지 돌아다니는 소문을 이제껏 몰랐다는 것도,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에 물감을 섞은 듯 불안한 마음이 빠르게 피어났지만, 이영하는 입술 안쪽을 깨물어 진정했다.
어쩌면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는 일일지도 모르잖아.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뭐든 싫은 티는 잘 안 내는 애라는 거 알잖아.”
채호원은 시선 끝을 나이트로건즈의 멤버들, 콜티와 조남균에게 두고 말했다.
눈빛으로 누군가를 비웃을 수 있다면 분명 이와 같은 모양일 것이다.
“심각한 일이었을 거야.”
“…….”
“물론 걔 성격은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정의헌의 과거 속 살벌한 성격을 알고 있는 이영하는 잠시 침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채호원의 말을 두고 틀렸다고 딱 잘라내기는 어려웠다.
무슨 일이었는지 확인도 하고 싶었고.
따라서 이영하는 짧은 고민 끝에 채호원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저녁 먹고 왔어?”
끝나고 나가서 따로 보자는 우회적인 제안이었다.
채호원은 머리를 숙여 약지로 앞머리를 정리하고는 대답했다.
“……아니.”
깔끔한 부정은 깔끔한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이영하는 그 뒤로 ‘청음회’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과는 잡담을 더 주고받고, 작곡가에게도 칭찬을 퍼붓고, 콜티와 조남균에게도 인사했다.
실시간으로 닳는 기운을 애써 외면하고 열심히 사회생활을 이어 나갔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이영하는 그 자리에서 첫 번째 주자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모임을 대충 접고 2차를 가자고 요청도 해왔지만……. 가까스로 거절했다.
계단을 올라 작업실 지상 입구에서 기다리면,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채호원이 뒤를 따라 나왔다.
“카페로 바로 가자.”
채호원이 먼저 그렇게 제안해 오기에 이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길을 걸어 가장 먼저 보이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발을 돌렸다.
평일 오후 한적한 2층 자리 구석에 (여전히 다소 어색한) 둘은 자리를 잡았다.
“어? 혹시 〈데뷔 프로젝트〉…….”
그 과정에서, 주문을 받던 카페 종업원도 그렇게 말했고.
“죄송한데, 혹시 TV 나오시는 분 아니세요? 그! 토요일에 하는…….”
2층 창가에 앉아 있던 손님 세 명도 이영하와 채호원을 보고 질문해 왔다(심지어 이 사람들은 맞다고 하니까 케이크를 주문해 주겠다고 해서, 마다하느라 둘이 하나가 되어 진땀을 뺐다).
멤버들과 같이 다니면 무조건 다른 멤버를 먼저 부르던데, 골고루 인식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둘은 무슨 친분이냐고 소문이 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혹여나 세 명이 주시하고 귀를 기울이지는 않을까 싶어, 음료가 막 나왔을 때는 시시한 말부터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원래 말 걸어오는 사람 많아?”
“그냥 가끔.”
“꽤 정확하게 알아보시던데.”
“그렇게 따지면 너도…….”
이러면서 묘하게 경계가 풀어진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영하는 언젠가 정의헌이 채호원을 언급하며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평한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말에 반감이 점점 들면서도, 무엇을 두고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는 성격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는 듯한데.
“자세한 상황이 궁금해서 그런 거지?”
문득 채호원이 먼저 운을 떼었고, 이영하는 눈빛으로 긍정했다.
“나도 전해 들은 내용이라서 잘은 몰라.”
경고하는 듯 엄숙하고 장엄한 말투였다.
채호원은 클러치백에서 펜을 한 자루 꺼내 연갈색 휴지에 글씨를 썼다.
‘NitroX’, ‘나이트로엑스’. 두 단어였다.
“처음 결성할 때는 이랬어.”
그는 글자 옆에 ‘2008’이라고 숫자도 메모했다.
이영하는 시간을 거꾸로 계산해 보았다. 2008년이라면…….
자신이 중학교 3학년, 정의헌이라면 2학년일 때였다.
어나더뮤직 연습실에서 처음 만나기 2년 전의 일.
“창립 멤버까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채호원은 이어 관계자 이름을 하나씩 다 적어 내려갔다.
정의헌, 콜티, 조남균, 김산, 그리고 앤섬.
“……이 사람은?”
“내가 아는 형.”
이영하는 연결고리를 빠르게 알아챘다.
‘앤섬’은 채호원의 기존 그룹 ‘스픽스’의 전 멤버였으니까.
그가 채호원에게 소식을 전한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선후배 관계를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네.’
깨닫고 나자 마음에 걸렸지만, 채호원이 내색하지 않아 이영하도 말을 아꼈다.
“아, 팀원은 그 외에 몇 명 더 있었을 거야.”
채호원은 익명의 팀원을 의미하는 동그라미를 몇 개 더 낙서했다.
그리고는 이름과 원 사이에 선을 그어 공간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사건 때문에 이렇게…….”
콜티, 조남균. 동그라미 몇 개.
“팀이 갈렸고.”
정의헌, 김산, 앤섬. 그리고 동그라미 몇 개.
“분산을 주도한 건 이 둘이었는데.”
그는 각각 ‘콜티’와 ‘김산’ 이름 위에 왕관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 정의헌의 이름 위에는 별표를 그려 표시했다.
“계기는 얘였다는 거지.”
채호원은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낮춰 설명을 덧대었다.
현재 콜티는 ‘나이트로건즈’, 김산은 ‘스튜디오 로메오’ 소속.
둘 다 나이트로엑스 활동 이후 흩어지며 노선을 아예 바꾸었단다.
본래 나이트로엑스는 스트릿 댄스를 주력으로 코레오그래피, 즉 안무 창작도 작업하던 팀이었다.
뿌리는 길바닥이지만, 케이팝이 부흥하며 돈벌이를 위해 코레오그래피라는 부업을 택한 셈이었다.
“춤 실력으로는 솔직히 국내에 나건 이길 사람 없어.”
본격적으로 분리된 시기는 팀이 지속된 지 2년째인 2009년 초.
이후 나이트로건즈는 스트릿 댄스와 국제 댄스 경연만을 전공으로 도맡게 되었고.
스튜디오 로메오는 코레오그래피와 댄스 학원 수업으로 진로를 틀었다고 한다.
사족을 붙이면 앤섬의 경우 코레오그래피라는 목적을 좇아 로메오로 향한 모양이었다.
“갈라진 계기에 관해 더 아는 건 없어?”
가만히 듣고 있던 이영하가 길 잃은 회상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아, 음…….”
채호원은 몇 초 망설였다.
“그냥 들은 그대로 말해줄게.”
그리고 펜 뚜껑을 닫아 클러치백에 다시 넣은 뒤 대답하기를.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팀이 위아래를 엄청 따졌다는 거야. 경력으로든 나이로든.”
당시 정의헌은 중학생. 팀에서는 막내 포지션이었다.
나이가 그렇게 어리다면 경력이 길 리도 만무했다.
“그러면서 부당한 일이 조금 있었겠지. 없었을 리는 없고.”
조심스러운 보고였지만, 이영하는 괜스레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의헌은 그런 부조리함을 참아주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원래도 팀 방향성 때문에 파벌이 나뉘어 있었다던가.”
“나뉜 파벌 형들이 눈치를 준 거구나.”
“밉보였겠지.”
“……상상돼.”
“눈치만 주면 다행인데. 싸가지 없다고 대놓고 욕하고, 실수하는 거 기다렸다가 하나만 잘못되어도 득달같이 달려들고, 코레오 실력 별로라고 깔보고, 누가 봐도 걔가 잘하는데 잡아떼고, 춤추기에는 키도 크고 배운 것도 없다고 뭐라고 하고……. 그냥 뭐라고 한 게 아니라, 왜. 가스라이팅? 그런 거 있잖아.”
그때 정의헌이 무슨 상황에 놓였을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순순히 당해줄 애가 아닌데.”
이영하는 속삭이는 수준으로 조용히 말했다.
채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엎었지. 싸움이 크게 났는데, 하극상은 제명 사유라고 말이 돌아서.”
“그래서 걔 편이었던 형들이랑 아예 독립을 한 건가?”
끄덕끄덕. 채호원의 고개가 재차 위아래로 움직였다.
“펑 터지게 된 사건이 걔 코레오로 지금 단장이 트집 잡은 일이었다더라. 하필.”
채호원은 말을 마무리하며, 펜 자국이 가득한 휴지를 결을 따라 찢었다.
펄프가 힘없이 찢어지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왔다.
용건은 끝이 났고, 이영하는 오늘 인사를 나눈 나이트로건즈의 실체를 알았다.
그리고 스테리나인은 당장 다음 주부터 그들과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될 것이다.
다음 녹화의 시뮬레이션을 끝마친 이영하가 중얼거렸다.
“걱정되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목소리가 되어 나왔다.
말을 하고도 놀라는 그에게, 채호원이 대답해 주었다.
“걱정되지.”
말이 겹쳤다.
하지만 이영하는 여전히 어떠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대체 얘랑 내가 어디가 비슷하다는 거야.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어쩐지 억울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 * *
바로 다음 날 이영하는 정의헌에게 넌지시 나이트로건즈 이야기를 꺼냈다.
“나, 그저께 대기실에서 본 사람들 누구인지 알아냈어.”
“오……. 어떻게? 누구였는데?”
“약속 나갔다가 우연히. 나이트로건즈라는 댄스팀이래.”
잔뜩 눈치를 보며 말한 내용과 달리 반응은 싱거웠다.
“으에.”
“왜 그래?!”
“아니, 그냥 아는 사람들이라. 강적이네.”
정의헌은 그 말로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맺어 버렸다.
더 물어볼 기회도 주지 않고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영하는 그 후 며칠 동안 만전을 기해 정의헌을 예의 주시했다.
대체 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지 않은 것인지, 때로 서운해하기도 하면서.
“그러면 컴백 날짜가 7월 10일 월요일이라는 건가요?”
그날 컴백에 관한 뮤직팀 추가 회의에서 정의헌은 평소와 같았다.
“네, 더 미루거나 당기기는 힘들 것 같아요.”
“활동 기간 생각하면 좋은데요. 한여름 활동은 데뷔 이후 처음이고.”
이 추가 회의는 뮤직팀 내부에서 확정한 내용을 스테리나인 멤버들에게 전달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앨범 콘셉트가 결정되었고, 케이팝 작곡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명 프로듀서를 세 명이나 섭외했단다.
일정 조정은 이미 끝났으며 노래 퀄리티를 보고 셋 중 한 명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삼을 예정이라나.
“그러면 의헌 씨 아이디어를 큰 틀로 잡고, 오늘 말씀하신 내용까지 더해서 리드 작성합니다.”
“일단 노래는 계절을 고려해서 시원한 느낌이 많이 났으면 좋겠고요, 가사 메시지 관해서도…….”
그러니 여기서 추가 아이디어를 더 받아서 콘셉트를 보정한 다음, 회사 차원에서 기획안 서류를 작성해 프로듀서들에게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정의헌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하고, 흥미로운 의견을 내고, 본인의 기획에 살을 덧대기도 했다.
“이제 수록곡 블라인드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평소와 같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수백 곡을 개인적으로 듣고 1차로 걸러낸 다음, 다 같이 모여 다시 듣고 의견을 나누는 2차 심사.
그는 잘 들었고,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이지만 입바른 말도 곧잘 했다.
연습 도중에 불려 나와 몇십 곡을 듣고 열 곡 남짓한 곡을 골라내는 작업이었는데 지치지를 않았다.
‘…….’
이영하의 관찰은 이어졌다.
또 이틀 후, 〈밀제트〉 5차 경연 1라운드 연습 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