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87화
34. BET BET(1)
하여간 새 참가자인 서브마린 선배님들으로서는 곤란할 것이 틀림없었다.
불이익을 주고 싶은 팀을 대놓고 하나 골라서 선택하라는 이야기니까.
말로 하기 힘든 긴장이 흐르고, 그 사이 서브마린을 포함한 모두가 상황 파악을 끝낸 것 같았다.
마이크를 잡은 서브마린의 대표 멤버가 허허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니까, 상대를 저희가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MC의 냉정하면서도 차분한 대답에 선배님의 웃음소리가 페이드 아웃 효과를 걸어놓은 것처럼 서서히 작아졌다.
그리고 그 선배님은 대기석에 앉아 있는 (우리를 포함한) 다른 참가자들을 길게 훑어보더니 선언했다.
“작전 타임 조금 갖겠습니다.”
“좋습니다. 충분히 상의하고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허락이 떨어지고, 마이크 음량을 낮춘 서브마린 세 사람이 둥글게 모여 조용히 쑥덕거렸다.
그 시간을 틈타서 나는 내 옆과 뒤에 차곡차곡 앉아있는 스테리나인 멤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체적으로 우리 마이크 음량도 줄이고 –어차피 제작진에게는 소리가 들어간다– 말을 꺼냈다.
“얘들아.”
지목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지만, 지목해달라고 자원할 수는 있었다.
불러본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저마다의 반응을 내보였다.
이영하는 식겁한 표정을 지었고 안승준은 좋아했다. 한이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었다.
천진섭이나 서드림 같은 애들은 뉘앙스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입만 웃으며 제안에 못을 박았다.
“……하자.”
이 순간 나는 말을 뱉어놓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옆에서 카메라 감독님이 다가와서 우리를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어 보인 걸까. 아예 어깨에 카메라를 걸쳐들고 후다닥 우리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덕분에 비밀 회의고 뭐고 전부 들키고, 다른 참가자들도 다 우리를 주목하는 것 같았다.
내가 주변 분위기를 살피느라 정신이 나가든 말든 김지상은 단호하게 속삭였다.
“빨리 우리 설득해봐.”
주장에 부합하는 근거라면……. 이것저것 있었다.
우선 우리가 이제까지 고민하던 주제와 이번 새 규칙은 굉장히 수요-공급이 잘 맞았다.
탈락이나 자진하차를 통해 〈밀제트〉를 떠나기 전, 최대한 많은 무대를 남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수요하는 바였으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공급이 이루어졌다고 할 만했다.
그리고 방송의 예능적인 그림을 봤을 때 하위권보다는 상위권 참가자가 투입되는 게 더 나았다.
당장 〈밀제트〉 시청률이나 화제성을 보면 그래프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매주 지그재그를 그렸다.
더 화려하고 무대가 많은 1라운드에서는 화제성이 높아지고, 쉬어가는 2라운드에서는 탈락자가 결정됨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이 적어졌다.
서바이벌치고는 탈락자 싸움이 긴장감이 부족하고, 이목을 끌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대충 제작진이 어느 대목에서 고민했는지 알겠어.’
애초에 전처럼 1위부터 8위까지 순위를 매기지, 왜 대결 구도를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대체 왜 특정 누군가에게 위기를 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규칙을 구성했겠는가.
‘다 2라운드의 퀄리티와 화제성을 위해서다.’
내가 보기에는 서브마린도 제작진의 이 취지를 알아서 더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정리해서 이야기해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김지상이 말을 덧붙였다.
“3초 줄게.”
음.
3초만에 대답하려면 가장 단순하게 말해야 했다.
“우리한테도 좋을 거야. 멋있잖아. 재밌고.”
단순하게 말하면.
이런 도전이 우리를 더 빛나게 할 것이다.
“해보자.”
“진심이야?”
제일 먼저 찬성표를 던진 것은 안승준이었다.
천진섭이 곧바로 태클을 걸었지만 꿋꿋했다.
나는 그다음 설득 대상으로 이영하를 점찍어 빤히 쳐다보았다.
입장 대립이 생기면 제일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게 의외로 이 친구라서, 영하를 꺾으면 진행이 쉬웠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쳐다봐주자 이영하가 두 손을 들며 나를 흘겨보았다.
“탈락해도 난 몰라…….”
이영하가 항복하자, 나머지 멤버들은 도미노처럼 툭툭 넘어졌다.
안승준이나 김지상은 서바이벌을 겪어서 겁이 없었고, 서드림은 어려운 싸움을 나름대로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이주나 서난영은 다수의 의견에 잘 따라가는 타입이었고.
강주찬은 머리로 계산을 했는지 뒤늦게 찬성에 입을 모았다.
마지막 한 명에게 모두가 집중하자, 천진섭은 오만상을 쓰며 툴툴거렸다.
“내가 이상한 거야?”
“형, 방송이야.”
한이주가 농담을 건넸다.
보는 사람들이 불화 등을 오해하지 않게 태도를 정하라는 의미였다.
“아니, 그래! 선택 안 해주셔도 다들 아쉬워하면 안 된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만장일치.
이 모든 과정에 걸린 시간은 삼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정면을 보면, 여태까지도 대화를 나누는 서브마린이 눈에 띄었다.
서브마린은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나는 무턱대고 대표로 손을 들었다.
“아, 스테리나인! 하실 말이 있으신가요?”
MC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제야 서브마린도 우리를 발견해 눈을 크게 떴다.
“저희 혹시 자원해도 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MC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방송 화면으로는 ‘두둥’ 효과음이라든지 느낌표 여러 개가 자막으로 나올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서브마린 여러분, 작전 타임 또 필요하실까요?”
“네, 와우. 이것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요.”
“1분 드리겠습니다.”
얼음장 같던 촬영장 분위기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1분 뒤에 결정된 대결 구도는…….
발라드 그룹 서브마린 대 아이돌 보이그룹 스테리나인.
새로운 출연자는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규칙은 전과 같았다.
즉 이번에도 스테리나인은 일곱 번째 무대였다.
* * *
“스테리나인이 자원한다고 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대진표 촬영 직후 인터뷰 녹화 시간, 제작진이 출연진에게 질문했다.
“솔직히? 아, 진짜 솔직히 말해? ……요즘 애들 참 무서워요. 잡아먹는 줄 알았잖아.”
“말씀하시는 거, 제가 바로 옆에서 봤거든요? 눈빛에 살기가, 장난 아니었다고요.”
“막말로 이거 완전 싸움닭 아니야? 싶었죠.”
“아, 당했다! 저희야말로 딱! 그 타이밍에 나섰어야 했는데!”
각각 남성 래퍼 솔로, 달고나밴드 드럼 멤버, 댄스팀 부리더, 걸그룹의 메인보컬이 대답했다.
“저희는 사실 감사했습니다. 서브마린은 그룹 정신이 불화라서, 저희 셋이 모이면 메뉴 통일도 못 하거든요. 처음 작전 타임에는 누구 하자고 결론도 안 나왔어요. 그럴 때 나서서 하겠다고 해주시니까, 어휴. 감사하죠.”
서브마린에서 예능 출연이 가장 잦은 멤버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스테리나인 분들께 안 걸려서 다행이다.”
“솔직히 저희는 이번에야말로 스테리나인 분들이랑 붙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습니다.”
솔직하게 응답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성 래퍼 솔로와 보이그룹 맏형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볼 때라고 생각했어요.”
반면 스테리나인의 리더 정의헌의 대답은 차분했다.
호들갑을 떨어대는 다른 출연진들과 비교하면 꽤나 상반된 반응이었다.
“자신 있습니다.”
멤버인 이영하 역시 언제 약한 소리를 했냐는 듯이 단언했다.
아직 이기지도 않았건만,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한편 촬영을 함께한 허윤아 작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방송에 도움이 되는 대로 움직여줄까.
제작에 참여하는 입장으로서 참으로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역시 이대로 보내주기에는 아까운 팀이다. 그는 생각했다.
* * *
스테리나인의 데뷔곡 〈Rise Up〉.
야심차게 들고 나온 노래로 스테리나인의 발매곡 중 역대 최장의 준비 기간을 자랑했다.
역대 최장 기간은……. 솔직히 너무 길었기 때문에 자랑거리는 아니었다.
앨범은 《Zero Gravity》, 포부도 당차고 노래부터 콘셉트까지 전부 파워풀했다.
오늘 의상도 그에 걸맞게 모조 가죽이나 까만 데님 등으로 활동적인 느낌을 주도록 재질을 통일했다. 내 경우 검은 반팔 셔츠에 가죽 바지로 팔뚝에 가죽 아대를 채워 포인트를 주었고.
“멤버들 홀드하겠습니다!”
무대에 오르면 곧바로 제작진의 요청이 떨어졌다.
사실 굉장히 오랜만에 무대에서 보여주는 노래라서,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데뷔 당시에 비해서 다들 꽤 성장했으니까.’
〈밀제트〉에 참여하면서도 점점 실력이 늘어가고 있고.
걱정은 없었다.
시작은 멤버 넷이 앉고 다른 다섯은 선 자세로 고정되었다.
다만 다섯 중 넷은 카메라를 등지고 팔을 서로 얽고, 가운데 김지상은 고개를 숙이고 섰다.
유독 전주가 짧은 노래였다.
오망성의 정중앙
스며드는 공기는 낯설어
공격적인 비트가 페이드 인으로 들어오고 김지상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반주에 배어들었다.
나는 타이밍에 맞춰 팔을 풀며 정면으로 돌아섰다.
장르는 팝 록.
당시 유행하는 장르는 아니었으나, 음악이 퀄리티 좋게 뽑혔고 우리도 만족도가 높았다.
기다려온 순간
당장 출발할 준비가 돼 있어
처음 홀드한 동선에서 바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천진섭이 센터로 나와 곧바로 다음 파트를 받았다.
앨범의 전반적인 이미지 콘셉트는 약간은 고독하고 약간은 예민한 상처받은 청춘이었지만…….
〈Rise Up〉이라는 노래만 놓고 본다면 화려하고 현란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신인의 상큼함이나 청량함은 사실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여백을 패기와 박동하는 생명력으로 채워넣었다.
난 지금 깨어나
Rise Rise Rise Up
정점을 향해
Non Stop Stop Stop
후렴구는 언제나처럼 한이주가.
여느 때처럼 격렬하게.
거친 질감의 베이스 사운드 위에 드럼 비트가 점진적으로 쌓였다.
박자에 맞춰 바닥에서 불꽃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무게감 있는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결코 음울하지는 않다.
웅장하지 않을 뿐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고뇌는 그 노래 안에 분명히 존재했다.
시푸른 이 밤의
한계를 넘어서
휘몰아쳐 Higher Night Night
똑같은 후렴 멜로디가 가사를 달리 해 두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절의 마지막 파트는 내 것이었다.
앉은 바닥에서 허리 힘으로 일어나며 가창했다.
후렴이 끝나고 다음 벌스로 시작하기 직전, 댄서들이 다시 무대에서 빠지는 타이밍.
카메라는 돌고 힘은 한 점에 모이지 않고 들끓어 넘쳤다.
새하얀 조명이 뜨거웠다.
나는 순간 이번 경연의 주제를 떠올렸다.
‘시작’.
스테리나인이 선택한 시작.
데뷔곡.
도전과 야욕 그리고…….
어떤 사명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해내야 한다는.
몇 년 전 그때 느꼈던 감정이 겹겹이 노래에 남아 여태 느껴졌다.
어쩌면 많은 것이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날 따라 붙어
Rise Up Rise Up
천장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비트를 때리는 강렬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앉았다가 일어나는 안무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허리를 숙이고, 또 다시 일어서면.
노래가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