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86화
33. Do It Like This(6)
“억울한 건 알겠는데, 대처가 너무 비호감이네요.”
허윤아 작가가 사설을 약간 더해 상황을 간추렸다.
원키드의 분노도 일리는 있었다.
제작진이 사양하는 사람에게 매달려 출연을 확정했고, 바쁜 사람을 불렀고, 방송 규칙 및 합류 일정 변경 등으로 심지어 미리 고지한 스케줄을 몇 번이나 번복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리 어렵사리 출연하고도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1라운드부터 역대급 성적 차를 내며 대패한 데다가 2라운드에서는 탈락의 고배까지 마셨으니…….
부끄럽고 무안한 마음이 분노로 표현된 것이다. 허 작가는 원키드의 심리를 그렇게 짐작했다.
“처음에 스나랑 싸우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원키드가 부리는 진상과는 별개로, 허 작가는 조금 안타까웠다.
“방송 조금만 복습했으면 스나가 상승세인 거 모를 수 없잖아요. 〈데프아〉 때 서사 때문에 골랐나?”
“〈데프아〉 서사면 더 피해야 되는 거 아니야? 스승 입장에서는 제자랑 싸워도 이득이 없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뭐, 상대가 강적이라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고요.”
“하긴 그 사람도 스나가 〈Express〉 같은 걸 준비하고 있는지는 몰랐을 테니까.”
일대일 대결 라운드 제도를 도입하며 이벤트 겸 첫 주만 경연 상대를 미리 지목하기로 했었다.
그 단계에서라면 원키드도 스테리나인의 역량을 잘 알지 못했을 수 있다.
〈Express〉라는 노래와 그 퍼포먼스는 당연히 초면이었을 테고.
“아무튼 그분은 정말 기구하게 되었어요.”
“나도 기구하다, 윤아야…….”
김 PD는 가편집이 다 끝난 인터뷰에서 원키드의 건방진 발언을 잘라내는 일이 얼마나 수고스러웠는지 주절주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라운드 때만 하더라도 ‘스테리나인 정도는 제가 무대에 서 있기만 해도 이깁니다’ 같은 말을 했었는데…….
쫄딱 망한 뒤에 그 인터뷰를 방송에 내보내려니 마음이 아파서, 재미를 약간 포기하면서까지 출연자를 보호해 줬다나 뭐라나.
하여간 이 대화의 결론은 간단했다.
“진짜 실책은 1라운드에서 스나랑 일대일 붙어서 졌다는 거야.”
2라운드는 원키드가 짧은 준비 기간 때문인지 가사를 절었다.
가사 실수가 탈락으로 곧바로 이어진 것은 원키드의 또 다른 업보였으나, 여기서 중요하지 않았다.
“스나는 아무래도 이제 저희 프로그램 간판이니까요.”
허 작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지금 여덟 출연자 중에서는 스테리나인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스테리나인과 그들의 활약을 보려고 〈밀제트〉를 시청하는 사람 수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이 두 번째 퍼즐 조각이었다.
“그런데 우리도 그 팀을 언제까지 잡아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요.”
“스나 곧 컴백하지 않나.”
김 PD가 무심한 투로 말했다.
음악방송 팀 제작진 중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었다고 말을 더하면서.
“지금 그 회사 사람들이 출연 일정 조정하고 있대.”
“아니, 이거 중요한 이야기잖아요!”
“비밀도 아니고 위에서는 다 아는 내용이니까.”
두 사람의 태도는 마치 대립하듯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다.
허 작가는 느긋한 김 PD를 이해할 수가 없어, 근처 빈자리에 놓인 탁상 달력을 낚아채 들어 올렸다.
마감 일정이 빨간 펜으로 빼곡하게 적힌 달력을 손에 쥐고 허 작가는 김 PD에게 질문했다.
“언제로 논의 중인데요?”
“7월 말이었는데, 하는 거 보면 튕길 것 같기도.”
즉, 컴백을 하게 된다면 7월 말 근처로 일정을 다시 잡게 된다.
세 번째 퍼즐 조각이 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규 컴백이라서 겹치는 경쟁자 없이 크게 하고 싶은가 봐, 그쪽도.”
“아……. 스나도 1위 한 번 할 때 됐죠.”
아무래도 회사 직원들이 멤버들에게 1위 트로피 하나는 안겨주고 싶은가 보다. 허 작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여유롭게 대화 텐션을 떨어뜨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곧 달력 날짜에 다시 집중했다.
‘7월 말이라고 한다면, 넷째 주, 마지막 주…….’
그때 〈밀제트〉는 방송 기준 8차 경연인 16-17회, 녹화 기준 9차 경연 1라운드인 18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서바이벌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스테리나인은 늘 예상을 깨뜨리고 자체적으로 기록을 달성해 왔다.
만약에 스테리나인이 정말 8차 경연, 9차 경연까지 준수한 성적으로 살아남는다면?
“저 무렵까지 스나가 생존하는 경우부터 생각해 봤어요.”
“뭐, 어떤데.”
“생존한 만큼 인기를 누렸다는 말이고, 스나가 컴백으로 하차하는 순간 시청률이 훅 떨어지고 방송이 망하겠죠…….”
“아. 컴백하면 자진 하차하는 게 당연해?”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죠. 정규라면서요? 준비 많이 해야겠죠.”
허 작가는 단호했다.
“스나가 그전에 탈락하게 된다면?”
“흠……. 탈락할까요?”
“컴백 준비 병행하느라 폼 떨어지면 점점 하락세를 타겠지.”
그것이 김 PD가 스테리나인의 컴백 소식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까닭이었다. 시간과 체력은 유한한 자원이니까.
허 작가는 촌평에 말문이 막혀 잠시 침묵했으나, 달력을 쳐다보고 금방 반박할 말을 찾아냈다.
“문제는 스나가 컴백 날짜를 조정해서 일찍 하차하는 경우라구요.”
여러 사건 사고를 겪고 이제야 재미있다고 호평을 듣는 〈밀제트〉인데, 여기서 황금 같은 간판 출연자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 의견에는 김 PD도 동의할 것이다, 허 작가는 판단했고 추측은 옳게 맞아떨어졌다.
김 PD는 앓는 콧소리를 내더니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빙글 꼬았다.
“그 애들이 7월 초까지만 있어주면 좋을 것 같긴 해.”
허 작가가 힐끔 달력에 적힌 7월 초 스케줄을 내려다보았다.
OTV에서 자체 제작해 직원들에게 나누어준 달력이라서, 거기에는 모든 사내 기념일이 적혀 있었다.
7월 초에 적힌 표시는 정확히 ‘OTV 창사 25주년’이었다.
다섯 번째 퍼즐 조각.
“……그때 25주년 특집 방송 만들어야 되니까.”
김 PD가 덧붙였다.
따지자면 애초에 〈밀리어네어 Z 트랙〉 방송 자체가 OTV 창사 25주년 특집으로 기획된 산물이었다.
이 기념일을 스테리나인 없이 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김 PD는 말하는 셈이었다.
그 순간 날짜를 빤히 들여다보던 허 작가의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스쳤다.
새하얀 판에 퍼즐의 우둘투둘한 끄트머리가 서로 맞물리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하겠어요.”
마침 다음 날 아침에 전체 회의가 있었다.
“윤아. 다른 준비는 다 했어?”
“얼추……. 했을걸요.”
“할일부터 하세요~”
……계획 실행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지만.
본래 회의 주제는 다음 경연 준비와 ‘제2의 원키드’ 사태 대비를 위한 계책 수립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지 말고. 순서라는 게 있는 거니까.”
“예…….”
“어휴, 새 출연자 규칙도 진작 만들지. 시간 없는데 일이 새로 생기기만 하니까 미치겠다.”
“미리 못 만든 책임을 지는 거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김 PD는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새 규칙과 계획이 생길 것이다. 최소 두 개가.
+ + +
래퍼 원키드가 탈락하고, 새로운 출연자가 〈밀리어네어 Z 트랙〉에 합류했다.
원키드 선생님의 탈락은 오늘 출근하고 나서야 전해들었는데, 나를 포함한 멤버들의 감상은 한결같았다.
‘헐…….’
이기고 싶었던 거지, 이 프로그램에서 그 분을 아예 치워 버리고 싶었던 건 아닌데.
설마 우리 잘못인가 싶어서 눈치를 봤는데 경연 때 가사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
〈웨이크 업 MIC〉에서 가사 실수를 하면 바로 탈락시키는 전통 때문인지 때문일까, 래퍼들의 가사 실수는 유독 치명적인 트러블처럼 느껴진다. 방청객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타인의 불행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우리는 경연 녹화 전 무대에 모였다.
아무런 세트도 없고 방청객도 없으며, 카메라와 스태프들만 가득한 텅 빈 무대.
여기서 경연 순번과 대진을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서브마린입니다.”
정직하게 멤버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뉴페이스는 3인조 남성 발라드 그룹이었다.
그 옛날 ‘미니홈피’, ‘블로그’ 등에서 숱한 유명 BGM을 남기며 인기 가수 반열에 든 까마득한 선배님들.
……이라고는 하지만, 멤버 탈퇴와 교체로 인해 원년 멤버는 한 명뿐이라서 딱히 먼 역사 속의 존재 같지는 않았다.
하여간 ‘서브마린’은 젊은 이미지로 변신도 성공하고,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서 20대에게도 꽤 인기가 많은 가수였다.
최신 히트곡 〈Happy Birthday〉는 게다가 한이주의 작년 하반기 반년을 책임진 전화 벨소리였다. 그쯤이면 말 다 했다.
‘왠지 점점 승부하기 까다로운 상대가 출연하는 것 같은데.’
전반적으로 커트라인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 않나?
이러다가 30차 경연 쯤에는 빌보드급 해외 가수라도 데려올까 봐 겁 난다.
“그러면 시작에 앞서, 대진표를 만들어보도록 할까요?”
MC가 이름표 자리만 비어 있는 우드락 판넬을 과장된 동작으로서 중앙으로 가져왔다.
지난 경연에서는 물밑에서 지목이 오고갔기에, 다 함께 모여서 결정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가장 먼저 상대를 정할 권리는, 새 참가자인 서브마린에게 있습니다.”
MC는 자못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 경연부터 적용되는 새로운 규칙이 있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한 주만에 새 출연자가 탈락하는 대참사를 또 일으키고 싶지 않다면…….
이미 진행된 투표를 무를 수는 없을 테니, 제작진으로서도 재발 방지가 최선의 대응 같았다.
다만 관건은 어떤 규칙을 또 새롭게 도입하느냐인데.
“경연 새 참가자는 패배하더라도 탈락하지 않습니다.”
음, 〈데프아〉의 탈락 규칙과 비교하면 왠지 어딘가 레퍼토리가 비슷했다.
특혜를 줄 때에는 화끈하게. 대충 그런 느낌으로.
“하지만 새로운 참가자도 대결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즉, 오늘로 예시를 들자면…….”
MC가 뜸을 들이는 사이, 여기저기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서브마린과 대결하는 출연자는 자동으로 2라운드에 합류하게 됩니다.”
서브마린에게 지목되는 상대는 무조건 패배……. 혹은 패배 취급을 당한다.
2라운드는 1차 승부에서 지게 된 네 팀으로 이루어지는 경연이니까.
“물론 상대하는 팀에게는 그만한 베네핏이 주어집니다.”
MC가 제시하는 보상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라운드에서 사용한 토큰의 절반을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것. 0.5는 무려 올림 처리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투표 점수는 승패와 관련없이 계산해 승리 시 그만한 토큰을 지급한다는 공약이었다.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이 토큰은 2라운드에서 탈락할 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새 참여자의 광탈만 방지할 뿐 심사위원 및 방청객의 점수는 매긴다는 뜻 같았다.
2라운드에서 탈락 위기에 처할 수도 있지만,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으면 다음 경연에 득이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모험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배팅해 보시겠습니까?’라고, 제작진이 질문하는 것만 같았다.
다만 이 경우 슬롯머신을 당기는 레버는 우리에게 내밀어도 될 텐데, 방향이 틀려먹었다.
아무도 ‘무조건 탈락 후보’는 반기지 않을 것 같아서 지목할 권리를 서브마린에게 준 걸까.
그렇다면 오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