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85화
33. Do It Like This(5)
“어, 음.”
나는 헛기침하고 다시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지금 회의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우리 멤버 아홉 명뿐.
정확히 말하면 기획팀 막내 직원이 더 있었는데, 뒷정리를 우리가 하겠다고 자처해 내보냈다.
꼬인 생각을 속으로 차근차근 푸는 도중 회의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탁상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이는 2017년 스테리나인 시즌 그리팅에 포함된 굿즈로, 오늘 날짜인 5월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시기가 당겨지면 당겨지지 밀릴 것 같지는 않다.”
달력을 몇 장 뒤로 넘겨보며 나는 대답했다.
지금은 5월 중순이니 7월 말에 컴백이라면 준비 기간이 –스테리나인 기준으로는– 넉넉한 셈이었다.
데뷔곡 활동을 하면서 다음 앨범 준비를 해야 했던 2014년이나 〈데프아〉 이후 계약을 수습하며 앨범을 준비한 올해 초와 비교하면, 두 달 넘게 준비 기간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양반이었다.
그러나 이 일정은 우리의 〈밀제트〉 출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잡힌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 당겨봤자 가수와 매니저가 개고생한다는 것 말고는 단점이 없었다.
예컨대 외주 인력인 뮤직비디오 감독, 헤어 메이크업, 안무 창작자, 작곡가 등은 일정이 열흘쯤 당겨져도 ‘조금 바쁘네’ 하고 잘 맞춰서 일을 해줄 테다.
그리고 이 스케줄이라면 최신 트렌드를 반영해 세련된 작업물을 내기 좋다는 장점도 있었다.
“여름 릴리즈 나쁘지 않고, 지금까지 회의해서 나온 아이디어도 다 좋았잖아.”
“제법 자부심이 있나봐.”
“아니 내가 발표한 건 가을에 해도 문제 없긴 해. 그런데…….”
꼭 한마디 깐족거리는 김지상에게 반박했다.
따지자면 〈Express〉는 가을 발매곡이므로 시즌 2는 일 년 채워 또 가을 곡으로 내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나는 달력을 7월에서 한 장 더 넘겨서 한 날짜를 가리켰다.
“이 날 재서 형 전역한다.”
8월 말 평일이었다.
“헐, 드디어.”
“12년의 징역을 마치고 드디어…….”
“야, 이주야. 징역은 감옥 간 거.”
서난영이 한이주의 헛소리를 지나치지 못하고 정정했다.
당연하지만 박재서는 12년 동안 복무하지도 않았다.
“……이 날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아, 찍었어. 그래도 그 주는 맞아.”
이영하의 지적을 간단히 넘겨 버리고 나는 이어 달력 종이를 세 장 젖혔다.
그러자 그해 겨울, 11월 달력이 나왔다.
“그리고 아마 이때 석종이 형이 뮤지컬 들어갈 것 같거든.”
“아니, 형은 그걸 어떻게 알아.”
“본인한테 들은 것도 있고, 뭔가 상황상.”
뮤지컬 〈쉐이프〉는 1960년대 냉전시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이미 초연과 재연을 거치고 올해 말이 세 번째 시즌인데, 김석종 형은 〈쉐이프〉에 조연 ‘에드’ 역할로 이미 두 번을 전부 출연했다.
듣자 하니 ‘쫑에드’라는 별명으로 여러모로 주변 및 대중 반응과 결과가 좋았던 것 같다.
뮤지컬 팬들에게도 눈도장을 나름 잘 찍었는지, 삼연에 ‘쫑에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도 제법 있다나 뭐라나. 아직 공개는 되지 않았지만 이미 유력 캐스트였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도 삼연 잘 마치고 그 다음 시즌에도 ‘에드’로 출연했으니……. 거의 분명했다.
“그 형은 군대는 언제 가려고 그러지.”
“내 말이.”
“연이 형이 내년 1월쯤 입대 예정이라고 하던데.”
“아…….”
그쯤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더니, 천진섭과 서드림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러면 올해 하반기에 컴백해야겠네.”
김지상이 맥락을 요약했다.
컴백하는 그룹의 주어는 스테리나인이 아니었다.
우리 바로 위에 있다는 선배 보이그룹, ‘원이드’ 이야기였다.
‘원이드’, 영어로 표기하면 ‘WAN×ED’. 팬덤 이름은 무려 ‘W÷NDER’라고 쓰고 ‘원더’라고 읽는다.
원이드는 2008년에 7인조로 데뷔해 현재 5명이 남은 2세대 아이돌로, 우리 회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데프아〉 출연 초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어나더뮤직’ 하면 ‘원이드 소속사’라고 인지했으니까.
‘지금은 군대 공백기로 컴백을 안 한 지 오래되긴 했는데…….’
원이드는 재계약이 진즉에 종료되었고, 재계약 전후로는 그룹보다 개인 활동을 더 활발히 했다.
앞서 언급한 뮤지컬이라든가, 솔로 데뷔, 연기, 예능 등으로 분야는 다양했다.
다만 문제는 개인 활동 스케줄 때문에 군백기가 완전히 꼬여버렸다는 데 있었다.
누구는 이미 전역했는데, 다른 멤버는 하염없이 입영을 연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그런데 지나치게 뒤엉키다 보니 또 이런 기적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올해 말, 원이드는 군백기 도중에 모든 멤버가 민간인 신분으로 사회에서 마주치는 시기가 발생한다.
“그 형들도 컴백하고 싶어 하겠지.”
내가 말했다. 이제까지 알아온 원이드 형들을 생각하면 이번이 기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분명히 ‘원더’ 팬덤에서도 완전체 활동을 바라마지 않을 테고.
수익 면에서도 스테리나인의 《Letters to》와 원이드의 마지막 앨범을 비교하면 원이드가 판매량이 우세했다.
다섯 멤버 모두 다른 스케줄 없이 민간에 나온 시기는 딱 9월과 10월 두 달이었다.
하반기 계획에 따르면 스테리나인이 정규 1집 활동을 끝낸 뒤 팬미팅을 돌고, 리패키지를 준비할 때.
우리 일정이 뒤로 밀리면 원이드 컴백에 차질이 생기고, 우리의 리패키지와 연말 일정도 어그러져 밀릴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진짜 사실상 7월 초 컴백이 되겠네.”
“그러면 우리 방송은 어떡하지.”
안승준의 혼잣말에 강주찬이 칼같이 걱정거리를 꺼내놓았다.
그래, 일정을 앞으로 당기면 또 이게 문제였다.
〈밀리어네어 Z 트랙〉 출연 일정.
“병행은 무리수?”
한이주의 질문으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자체적으로 거수 투표를 했다.
컴백과 〈밀제트〉 병행 여부는 회의에서도 한번 말이 나왔지만, 우리의 입장을 반영해 완벽하게 마무리한 것은 아니니…….
병행 찬성과 반대에 각각 손을 든 사람 머릿수를 내가 눈으로 세었다.
“병행 가능 4명.”
이영하, 안승준, 한이주, 서드림.
표정을 보아하니 안승준과 한이주는 그저 도파민에 미친 사람들 같았다.
“……불가능 4명이네.”
나머지 강주찬, 서난영, 김지상, 천진섭 표가 ‘반대’에 포함되었다.
사회를 보느라 내 표를 빼먹었더니 신기하게도 동점이 나왔다.
“나는 불가능에 한 표.”
그로서 컴백 준비와 〈밀제트〉는 병행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한 표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투표가 무색하게 각자의 의견이 지나치게 확고한 상황이었다.
방송 출연 기회를 잡은 이상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과 컴백 앨범 퀄리티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밀제트〉가 하루 이틀 녹화하는 방송이라면 부담이 없겠지만, 각 무대 준비와 연습에 시간이 오래 걸려 골칫거리였다.
“여기까지 와서 하차로 끝낸다는 게 너무 아깝잖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승준이 반대 의견을 토로했다.
그 와중에 누구도 탈락이라는 결과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지금으로서는 당연했다.
우리는 이제야 겨우 〈밀제트〉에서 상위권에 깃발을 꽂았다.
지금까지가 다크호스였다면, 이제부터 스테리나인은 명명백백한 우량주였다.
“아……. 진짜 뭔가 아깝다.”
안승준이 말한 단어를 나는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아까웠다.
멤버들의 체력을 고려해 병행 불가능에 표를 던졌지만, 하차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아까운 것은 우리가 이루어낸 높은 순위가 아니었다.
“무대를 더 못하고 하차할 수 있다는 게, 아까워.”
가뜩이나 우리는 순위 제도 당시 높은 등수, 승패 제도 이후로는 승리를 거두어 2주에 한 번씩 무대를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스테리나인의 노래를 보여주고 싶다는 취지로 참여한 방송이었는데 말이다.
〈오디뮤〉부터 세어본다고 해도 〈나에게〉, 〈Run and Run〉, 〈뛰어들어〉, 〈Glitter+Express〉가 오늘날까지 무대의 전부였다.
성적이 괜찮았다고 하더라도, 다음 곡으로 〈Rise Up〉을 준비 중이라고 해도, 절대적인 출연 횟수가 적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그중 한번은 〈One Day〉 커버 무대이지 않았나.
보여주지 못한 타이틀곡도 아직 존재하고, 수록곡이나 커버까지도 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너무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라운드에서 패배해 일부러 2라운드로 간다는 것은 우리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무대만 더 보여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는데.”
병행 찬성파 대표인 이영하가 내 말에 고스란히 동의했다.
결론이 그렇게 하나로 모였다.
* * *
의외의 장소에서 스테리나인의 고심은 해결의 실마리를 보였다.
무대를 더 보여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자진하차 없이 유종의 미를 거두는 방법.
단초의 제공지는 〈밀리어네어 Z 트랙〉 제작사 OTV의 PD 사무실이었다.
“PD님! 정우 PD님이 메신저 봐달라고 하세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대답이 없자, 허윤아 작가는 벌컥 열고 들어가 이어폰을 꽂고 일하는 김미진 PD에게 말했다.
김 PD는 영상과 사운드 싱크를 맞추는 중이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예 시야 안쪽까지 다가가 다시 말을 전하자, 그제야 김 PD는 정신을 차리고 메신저 창을 열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이거 중요한 내용도 아닌데.”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서 전화를 안 하고 저한테 부탁했겠죠. 어차피 오던 길이라 괜찮아요.”
김 PD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메신저 답장을 하고, 영상 렌더링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 잠시 기다려달라는 팝업 창을 띄우자 그는 그제야 쭉 기지개를 켰다.
스트레칭을 해봐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연 김 PD가 여태 앞에서 얼쩡거리는 허 작가에게 물었다.
“알로에 주스 마실래?”
“아뇨, 저 물이면 됐어요. PD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나는 이튜브 올라갈 클립 편집하고 쇼츠 자르고…….”
한마디로 잡일거리였다.
렌더링 대기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스몰토크가 이어졌다.
“저는 이 방송 재정비한 다음에는 좀 안정될 줄 알았어요.”
“아, 나도……. 루틴이라는 게 이제 슬슬 생기나 기대했는데.”
대화는 거의 탄식과 한탄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큰 이슈는 3차 경연 2라운드 촬영과 그 내용이었다.
“PD님은 탈락자 때문에 계속 바쁘셨던 거죠.”
“말도 마라, 진짜. 나 이름만 들어도 토할 것 같아.”
지난 2라운드 촬영은 화요일이 휴일인 덕에 하루를 미뤄 수요일에 진행했다.
2라운드 무대를 촬영하고, 투표 결과를 집계해 탈락자를 정하고, 출연진 인터뷰를 땄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본 일정이었으나…….
이때 발생한 탈락자가 청천벽력이었다.
“원키드 그 사람이 투표 부당하지 않냐고 선배한테 따져서 투표함 다 다시 뜯고, 분류하고……. 하…….”
래퍼 경연 〈웨이크 업 MIC〉의 프로듀서, 아이돌 서바이벌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의 랩 트레이너였던 래퍼 원키드.
〈밀리어네어 Z 트랙〉에서 3차 경연 1라운드와 2라운드, 딱 두 번의 무대를 남기고…….
“정우 선배가 진짜 죄송하다고, 다음 컴백 때 음방 무대 꼭 스페셜로 두 곡은 세워드리겠다고, 싹싹 빌면서 애원하는데……. 아, 내가 진짜 너무 정우 선배 불쌍해서…….”
……빛의 속도로 탈락하다.
한 단어로 광탈.
이 사건이 첫 번째 퍼즐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