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83화
33. Do It Like This(3)
* * *
스테리나인의 정규 1집 컴백.
아무리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렇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결코 이 때에 이루어질 만한 사건이 아닌데……. 회사가 정말 바쁘게 노를 저을 생각인가 보다.
객관적으로 물이 들어오는 시기에다가 다른 문제가 될 만한 상황도 없으므로 나로서는 서포트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과거라면 2017년 말까지도 인원 조정 후 두 번째 미니 앨범을 발매해야 한다, 아니다로 한참 다투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좋은 일이었다.
더불어 숙소 이사나 신사옥 건설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렐 지경이었다.
“아! 깜짝이야. 불 좀 켜고 해라.”
“네, 쌤…….”
그때, 딸깍. 지나가던 신인개발팀 보컬 트레이너가 나를 타박하며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휴게실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정신이 환기되었다.
나는 노트북에 딸린 무선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눈가를 꾹꾹 눌렀다.
점심 시간 휴게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혼자 이곳에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바빠서 식사 시간마저 줄일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하네.”
정수기에서 찬물을 물병에 담은 트레이너가 내 쪽으로 다가와 노트북 화면을 슬쩍 보았다.
노트북에는 오늘 오후에 진행될 콘셉트 디벨롭 발표 자료가 모니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희 앨범 회의 있어서요.”
“발표 자료가 아직 안 끝난 거야?”
“그건 아닌데, 회의실 컴퓨터에 연결해 보니까 폰트랑 이미지가 다 깨지더라고요. 그거 고치고 있어요.”
“어? 그거 빨리 하는 방법이 있는데…….”
트레이너 선생님이 테이블에 물병을 내려놓고 내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설정을 여기저기 복잡하게 건드리더니,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주었다.
“이거면 될 거다. 너도 숨 좀 돌리고 뭐라도 먹어.”
“오오. 저 그러면 잠깐 확인 좀 하고 올게요.”
바로 회의실 컴퓨터에 연결해서 파일을 열어보니까 문제는 해결된 채였다.
덕분에 나는 휴게실 냉장고에서 어제 넣어두었던 남은 컵밥을 전자레인지로 데울 수 있었다.
바쁜 일이 없는지 트레이너도 일터로 미리 내려가지 않고 구석에 앉아서 쉬고 있었기에, 퀄리티 낮은 음식을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며 나는 잠시 보컬 트레이너와 떠들었다.
“와, 너무 감사해요. 저 진짜 당황했거든요.”
“보니까 아에 아이디어를 네가 다 내던데, 넌 무슨 하루가 30시간씩 되는 거냐.”
“요즘 엄청 바빠요.”
잡담과 동시에 어제의 나를 속으로 칭찬하고 규탄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어떻게든 밥을 남겨준 것은 칭찬해 마땅했으나 남은 분량이 세 입거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경연 준비는 잘 되고 있고?”
“네, 저희 이번에 해서.”
스테리나인의 은 거의 반 년을 연습한 데뷔곡이었다.
이 말은 즉 워낙 오래 연습해 몸에 밴 노래라서, 준비할 게 별로 없었다…….
이 선생님은 같은 회사에 보컬 트레이너였으나 우리가 아니라 연습생들을 담당해서, 우리의 <밀제트> 상황까지는 잘 모르는 편이었다.
“주제가 뭐였는데?”
“그거요, ‘시작’이었나.”
이렇게 단순히 해석하라는 말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우리는 우리 멋대로 진행했다.
앨범 제목도 《Start Line》이었으나 이 노래는 이미 해버려 남은 선택지가 하나였다.
4차 경연을 통해 얻은 토큰은 전부 사용하지는 않는다.
기록적인 숫자를 남기며 경연을 종료했기에 토큰이 너무 남기도 했고, 조금 아끼는 게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그 편이 아무래도 강약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세트나 댄서, 이런저런 무대 효과 등은 계속 사용하므로 곳간 자물쇠를 걸어 막은 수준은 아니었다.
“너희 노래로 계속 가는 거야?”
“반드시 그래야겠다는 생각은 아닌데, 일단 의도는 그렇죠.”
“나는 그 도 좋았는데.”
아주 보컬 트레이너다운 최애 선정이었다.
“저희도 좋아해요. 그래도 저희 곡 조명하는 게 재미있어서요.”
그 편이 쉽기도 했다.
당장 만 해도 댄서가 들어가는 퍼포먼스, 동선만 조금 수정했을 뿐이다.
편곡이 들어가도 부르는 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대들보부터 쌓아올려야 하는 커버 무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당장 내 파트만 해도 거의 그대로였다.
댄스 브레이크에 들어가는 프리타일 안무만 더 트렌디해 보이게 약간 수정했을 뿐, 노래 파트는 앨범에 들어간 녹음과 같았다.
“힘들지는 않고? 앨범 준비하면 더 바빠질 텐데.”
“지금까지야 뭐, 끄떡없어요.”
“그래도 앨범 회의까지 참여할 정도면 참 대단하다, 너도.”
“에이. 저보다 열심히 하는 분들 많아요. 쌤도 열심히 하시잖아요.”
정말이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세라면 힘이 나서 넘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열심히 하려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확실히 있었다.
‘흠, 아이돌 활동 자체를 열심히 해야 하기도 하고.’
전에 방탈출 사장님 겸 천사 겸 한능검 스터디장 아저씨를 만나서 나눈 이야기도 깊이가 있었고…….
아무튼 기존에 하던 활동이나 태도를 꾸준히 이어나가보기로 결론이 나기도 했고.
사족을 붙이자면, 예희에게 외삼촌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대충 알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보아하니 어머님이나 다른 가족들과 이야기해서 자체적으로 한번 정리할 심산인 것 같았다.
‘그와 별개로 지금 이 발표에 열을 올려야 하는 이유도 있지.’
승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름 컴백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가 다시 기억이 났다.
아니, 기억났다기보다는 무대 이후로 잊어본 적 없는 그 노래가 재차 자각이 되었다.
제복 콘셉트에, 춤과 노래 둘 다 쉴 틈 없이 과격한 데다가, 우리가 <밀제트> 무대를 스케일 크게 꾸려서 그렇지……. 원래 그 노래는 청량한 축이었다.
노래와 어울리는 공간을 떠올리자면 도시의 여름밤 같은 느낌일까.
그리고 휴가에 걸맞는 여행과 모험.
어반 스타일, 개러지한 베이스 사운드, 풍부한 스트링 세션과 브라스 모두 여름 느낌이 충분했다.
실제로도 활동 시기에는 제복과 더불어 흰 셔츠에 청바지, 캐주얼 정장 등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성숙함+청량함+자유로움]
프레젠테이션 자료에 내가 적어놓은 키워드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의 핵심이었고, 나는 아직 저 콘셉트로 하고 싶은 게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건대 승산이 있었다.
지난 주말 가 드디어 방송을 탔으니까.
“아, 맞다. 토요일 방송 반응 엄청 좋더라.”
“헐. 맞아요.”
이튜브에 공개한 무대 풀버전 조회수 188만 회.
내 직캠도 조회수가 70만을 넘겼고, 눈을 떼면 그 시간만큼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날짜는 월요일.
……이게 고작 사흘 만에 일어난 성과였다.
다시 말해, 역대 <밀리어네어 Z 트랙> 방송에 등장한 무대 중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최근 주춤했던 방송 시청률도 급상승해 무려 자체 최고점인 4퍼센트에 돌입했다고 하니까…….
‘솔직히 비현실적인 숫자다.’
<밀리어네어 Z 트랙>은 애초에 10대부터 30대 시청자가 좋아할 만한 ‘MZ 연예인 대전’을 콘셉트로 잡은 방송이었다.
나로서는 목표 자체도 시청률보다는 이튜브 조회수나 PPL 광고 수익 등이었으리라고 예상된다.
그런데 시간을 절묘하게 잘 잡아서일까, 아니면 방송을 잘 만들어서일까, 입소문을 잘 탔기 때문일까.
의외로 본방송이 꽤 잘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본방사수 했어. 깜짝 놀랐잖아.”
보컬 트레이너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는 굉장히 잘 되었고 상승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 직캠 틀어두면 젊은 남자 정기로 퇴마도 가능할 듯
– 방송 보니까 스테리나인에게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활동하는 내내 미지의 세상을 모험하는 기분이었다고 하던데, 한참 지난 다음 다시 하는 노래인데도 그 느낌이 보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게 신기함. 리더가 이야기한 대로 무대 내내 환상적인,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여행지를 관광하는 기분. 어떻게 이렇게 매번 잘하고 생동감 있게 하는지... 이번 경연에서 제일 좋은 무대였음.
– 현장에서 볼 때 근처에 있던 사람들 다 흥분해서 응원법 하나도 못함 ㅋㅋㅋ 물론 나도 ㅋㅋ
– 아 어나더뮤직은 이틈에 하드에 묵혀둔거 뭐라도 안 풀어주나 ㅋㅋ
인터넷에 대충 검색해봐도 좋은 여론이 넘쳐났다.
악플 비슷한 것도 물론 없지는 않았지만…….
– 이 팀은 노래 왜 두개나 함??
– 카메라 무빙 개 어지러워
– 너무 많이 쏟아부어서 개취로 별로임
댓글로 재빨리 반박이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영역도 있었기에 그러려니 싶었다.
아무튼 반응이 좋다는 것은 내 기획이 빛을 발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의미였다.
나는 기꺼이 검색 결과를 캡처한 사진을 몇 장 발표 자료에 첨부했다.
– 어떻게 한 소절도 안 날리고 이걸 라이브로 다 하는지 신기함
– 너무너무 빡세게 춰서 놀랐음 이래서 아이돌은 잘하는 게 팬서비스라고 하는거구나;;
– 진짜 모르는척할 테니까 제발 이 노래로 다시 컴백해줘... ㅜㅜ
– 이 노래를 이제 알았다니 나 케이팝 헛했나봐 ㅋㅋㅋ
그중 중요한 의견은 ‘이 노래로 다시 컴백해’라든가 ‘이제야 알게 되어서 아쉽다’라는 투의 글이었다.
수요가 있다면 공급이 더 원활해지지 않겠는가.
“반응 그렇게 좋을 줄 알았어?”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요.”
“겸손은…….”
“아예 반응이 없었으면 너무 슬펐을 것 같네요.”
나는 웃으며 빈 컵밥 그릇을 싱크대에서 닦아 분리수거 박스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받아들일까. 직원들이나 멤버들은.
* * *
“다음 발표는 의헌 씨가?”
“네, 저도 프레젠테이션 준비했거든요. 잠깐만요.”
오후가 되자 앨범 콘셉트 디벨롭 회의가 시작되었다.
둥글게 앉은 자리대로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우연찮게도 멤버 중에서는 내가 마지막 순서였다.
멤버 전원이 발표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사람이 많아서 전부 의견을 내도 산으로 가므로 곤란하다).
예컨대 이영하는 빌보드 차트를 분석해 현재 해외에서 흥하는 음악 장르 레퍼런스를 발표했다.
로큰롤이 침체기라든가, 힙합과 EDM이 꾸준히 인기라든가, 트로피컬 하우스 음악이 유행한다던가.
안승준의 경우 패션 아이템 위주로 트렌드 흐름을 파악해 청량 콘셉트가 좋다고 주장했다.
패턴이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 비비드한 체크 무늬, 자수 장식, 반다나가 요즘 핫하다는 듯하다.
그 외에 강주찬이나 서드림도 이것저것 발표했으나 나처럼 콘셉트를 전부 기획해 온 사람은 없었다.
“제가 가져온 콘셉트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학교 사교 동아리’입니다.”
두괄식으로 발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