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82화
33. Do It Like This(2)
팀의 리더 정의헌.
천진섭이 생각하기에, 결코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누구와 싸워도 이기고, 어려운 승리 뒤에도 내색하지 않는 초인…….
그는 실제로 서바이벌 방송을 통해 ‘100명 중 1등’이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뭐라고?”
그들의 리더는 잘 웃었고, 겁이 없었고, 웬만한 일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대체로 친절하고 억지를 부려도 다 들어주는 성격이었지만, 사실 천진섭으로서는 조금 어려운 면도 있었다.
아무래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쟁자라는 인식이 있어서일까.
“우리 컴백한다고.”
천진섭에게 팀 멤버들은 좋은 동료였지만 동시에 경쟁 상대였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낸다면 ‘참 피곤하게 산다’고 타박이나 들을 테지만 본래 감정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약간의 열등감, 약간의 경쟁심리, 또 약간의 호승심. 구질구질했지만 그는 인정하고 살았다.
“……계획일은 7월 말 혹은 8월 초입니다. 9월로는 넘기지 않고, 여름 내로 활동을 마무리하려고 해요.”
자신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멤버들처럼 빛나는 재능 따위는 없다.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너무 높았다.
욕심이 너무 많았고, 주변은 너무 다채로웠다.
“《Letters to》가 1월 말이었으니 6개월 조금 넘어서 발매하게 되겠네요.”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사람도 누군가에게 특별 취급을 받을 수 있다면.
사실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컴백 준비에 관해서는 제 발표가 끝나면 뮤직 팀에서 말씀하신다고 하니 일단 넘어갈게요.”
다른 멤버들은 모른다.
팬들은 물론이고, 같이 아는 주변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독점이 허락된 비밀이 있었다.
“성적에 따라 정해야겠지만, 일단은 10월 내지 11월 리패키지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까지는 미리 말씀드립니다.”
천진섭은 조금 전 초록빛이 도는 반지를 끼웠던 자리를 다른 손으로 쓸어내려 보았다.
타인의 신체를 쓰다듬는 것처럼 감각이 묘했다.
‘야, 집중하라니까.’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정의헌이 입 모양으로 다시금 잔소리했다.
귀담아듣기에는 이미 많은 것이 흘러간 상태였으나, 두 번이나 신호하니 더 이상 대충 흘려 넘길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튼 회의는 진행 중이었다. 기획팀 직원이 마저 올해 말 일정을 발표하는 중이었으니까.
“최소 3주, 최대 5주 음악방송 활동 후에는 국내 및 해외 팬미팅 짧게 진행하려고 하고요.”
계획은 이랬다.
7월 말에서 8월 초에 정규 1집 발매, 최대 9월 첫째 주까지 음악방송 등 프로모션 활동.
이후 10월 중순에서 말까지 한국, 일본, 대만, 미국 등에서 오프라인 팬미팅.
그리고 팬미팅 일정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최대 두세 곡을 더 추가해 리패키지 앨범 발매.
리패키지 앨범으로도 한 달은 활동하게 될 테니, 그 시기가 지나면 또 연말 시즌이었다.
현재 기준 올해 활동 이력만 따지고 봐도 연말 무대를 최소 하나는 서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 연말 무대도 준비해야 하고, 만에 하나 연말 무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연말은 원래 연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바빴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모임도 많은 시기인 데다가, 내년 시즌 그리팅 촬영도 필요했고…….
여름도 오지 않은 시기에 연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언밸런스했으나, 대충 일정만 들어봐도 데뷔 초반처럼 바쁜 스케줄이었다.
음악방송에 팬미팅만 따져도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주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주중에 쉬면 된다는 사실은 논외로 친다).
“그리고 이번 1집 프로모션 기간 맞춰서 레디 2기도 새로 모집할 거예요.”
거기에 새로운 할 일 하나 더.
공식 팬클럽 굿즈에 쓰이는 포토북, 티저 영상 등의 촬영도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스테리나인의 팬클럽 ‘레디’는 애매한 인원 조정과 애매한 시기 덕에 1기를 추가 모집하고 연장해 이어가던 터였다.
하지만 공개방송 참석이나 팬들에게 예매 우선권을 주는 팬미팅을 위해서는 새 기수가 필수였다.
천진섭은 조금 전에 한 생각을 공고히 다졌다. 정말이지 데뷔를 한 번 더 겪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가 올해 하반기 플랜이고요, 질문 받아보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시간은 오전에 대표 이사급과 각 부서 팀장이 나눈 회의의 연장선이었다.
웬만한 논의는 그 자리에서 진즉 갈무리가 되었고, 지금은 스테리나인에 관련된 내용만 짜기워 전달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그래서 스테리나인 멤버가 아닌 다른 관계자들은 사실 연속 회의 두 탕으로 이미 꽤 기진맥진한 채라서 질문은 거의 멤버들이 도맡았다.
첫 번째 질문은 이영하가, 모두가 궁금해할 물음을 던졌다.
“저희 그러면 1집 준비 기간이 〈밀제트〉 출연 기간과 겹치는데, 정해둔 게 있는 거예요?”
질문을 듣고 천진섭은 회의실 테이블에 누가 올려놓은 탁상 달력을 끌어당겼다.
스테리나인 2017년 시즌 그리팅에 굿즈로 포함된 탁상 달력이라 넘길 때마다 멤버들 얼굴이 보였다.
5월 서난영과 천진섭 투샷, 6월 한이주와 서드림 투샷, 7월 서난영 단독 사진이 팔랑 넘어가고…….
7월 말을 컴백 예정이라고 하면 과연 〈밀제트〉는 몇 라운드까지 진행 중일지를 그는 계산했다.
7월 22일이 8차 경연 1라운드였고, 7월 29일은 8차 경연 2라운드였다.
이번 토요일 방송분이 3차 경연 1라운드라는 것을 따지자면, 한참 남은 셈이었다.
그때까지 스테리나인이 생존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했고, 그렇게 많은 무대를 보일 수 있는지도 긴가민가할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방송을 7월까지 계속 출연할 수 있을지도 지금은 알 수 없으니까.”
대답은 회의에 참관한 이사가 받아서 하게 되었다.
“만약 그 무렵에도 〈밀제트〉에 출연하고 있다면, 멤버들 스케줄과 컨디션을 봐서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이외에도 생략된 디테일이나 채 결정되지 않은 계획을 묻는 짧은 질의가 마무리되고, 뮤직팀의 공지사항이 이어졌다.
다른 회사에서는 이 업무를 하는 직급을 대개 ‘A&R팀’이라고 부른다는 듯한데, 어나더뮤직에서는 ‘뮤직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뮤직팀은 음악 및 뮤직비디오와 포토북을 포함한 앨범 콘셉트를 결정하거나 음악을 수급하고, 프로듀서들과 연락하는 등의 일을 했다.
천진섭이 듣기로는 몇몇 회사에서는 아이돌 그룹에 존재하는 세계관까지도 A&R팀이 담당한다는 것 같았다.
하여간 세계관은 스테리나인과 관련이 없었기에……. 천진섭은 공지에나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뮤직팀이랑 멤버들 다 같이 다음주 월요일에 콘셉트 회의 진행합니다.”
전달사항은 간단했다.
‘그날’이 온다…….
“멤버들도 발표할 내용 있다면 자료 준비 미리 해주세요.”
앨범 준비 중 가장 진검승부라고 불리는 어나더뮤직 정기 콘셉트 회의 대전(大戰)이…….
〈나에게〉 준비 당시에는 회사가 외부 문제로 바쁘게 돌아가서 콘셉트 결정과 프로듀싱을 멤버들에게 전면 위임한 감이 있었다.
‘의헌이 형이 이사님과 합의한 결과였지…….’
좋게 잘 짜오면 패스하고, 퀄리티가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되돌려보내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단다.
그런데 자체적으로 제법 괜찮게 콘셉트를 구성했고, 외주 작곡가와도 일정이 잘 맞아서 그대로 앨범을 릴리즈할 수 있었다.
덕분에 멤버들의 자체 프로듀싱 능력은 빛을 보게 되었지만, 정규 앨범은 그렇게 준비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인력이 더 체계적으로, 평소처럼.
……뮤직팀 직원들 그리고 멤버들은 직접 짜온 콘셉트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발표해 결정해야 했다.
어나더뮤직의 콘셉트 회의는 여러 기획안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뜯어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예컨대 멤버들의 아이디어는 이제까지 메인 기획으로 채택된 적은 없지만 몇몇 아이템은 직접 쓰이기도 했다.
〈뛰어들어〉 퍼포먼스에서 사용하는 바퀴 달린 신발이나, 〈Glitter〉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망원경 등이 멤버 아이디어였으니까.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의견이 메인이 되고 누구의 의견이 해체되어 아이디어로 남았는지 참여자들은 다 안다는 점이다.
발표 자료를 준비해가는 멤버 그리고 직원들은 그래서 발표 직전 덜덜 떨어대고, 아이디어가 채택될 시 무척 좋아하고는 했다.
“그리고 수록곡! 내일부터 열흘간 메일로 받으니까 멤버들도 노래 있으면 많이 보내주세요.”
타이틀은 유명한 작곡가에게서 따로 받아오기로 했다고 뮤직팀 직원이 덧붙였다.
그래서 멤버들이 작곡한 노래는 수록곡으로 실릴 것이고, 다른 수록곡들과 함께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이란다.
누가 작곡했는지 가려놓고 몇백 곡에 달하는 데모를 들어보는 일 역시 직원들과 함께 진행하게 될 테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의가 마무리되고 하나 둘씩 회의실 밖으로 나가는 시간.
밤이 늦어 직원들은 이제 퇴근하고, 멤버들도 원하는 사람은 개인연습을 하고 아니면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회의 끝마무리부터 무언가 곰곰 생각하는 것 같은 정의헌이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회의실을 뒷정리하는 직원 눈치에 금방 옆에 딸린 휴게실로 나왔지만, 그는 더 자리를 옮기지 않고 휴게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골똘히 궁리하는 표정을 지었다.
천진섭으로서는 그 모습이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회의하는 내내 눈으로 좇아가며 정의헌의 표정과 동작, 말 하나하나를 살폈으니까 말이다.
“왜 그래, 거기 앉아서.”
계단 앞에 서서 가만히 보던 천진섭이 휴게실로 돌아와 말을 걸었다.
“어……. 생각 중.”
“그건 알아. 그런 것 같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콘셉트 회의한다고 하니까……. 그냥 좀 아이디어 정리?”
정의헌은 눈썹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남은 세상의 미스터리를 알게 되어 아직도 속이 답답한데, 이 사람은 벌써 머릿속에서 화제가 전환된 모양이었다.
그런 무사태평한 면은 얄미울 만도 했으나 이제는 좀처럼 싫지 않았다.
“상담 들어줄까.”
“좋지. 웬일이냐, 네가.”
천진섭이 빈 의자를 끌어당겨 정의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거리낌 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아무래도 여름이기도 하고 청량한 느낌이 좋겠지.”
“그렇지. 아무도 강렬한 거 하자고 안 할걸.”
“그래서 약간 〈Express〉 시즌2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스테리나인의 〈Express〉 사랑은 원래 남달랐다.
〈밀제트〉에서 최근 오랜만에 전력으로 무대를 꾸몄더니, 〈Express〉를 향한 애정이 더욱더 깊어지기도 했다……. 모두가.
“그런데 이게 따지자면 좀 시즌이 지난 노래니까.”
그렇다. 〈Express〉는 2015년 10월 발매 타이틀곡이었다.
컴백 예정 시기는 2017년 7월. 그 무렵 기준으로 말하자면 세 살 된 노래였다.
“어떻게 해야 연결을 지을 수 있을까 고민이다.”
“으음.”
천진섭도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같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해결책이 없더라도 같은 고민을 나누는 순간 자체가 그에게는 귀중했다.
“올드하게 느껴질까 봐? 호불호 타서? 아니면 사람들이 잘 모를까 봐?”
“아니, 서사를 연결하는 게 문제지. 그런 건 걱정 안 돼.”
조심스러운 질문을 정의헌은 단칼로 잘랐다.
“왜?”
“원래 〈Express〉는 걱정할 노래가 아니야. 무대 해봤으면 알잖아.”
정의헌은 모른다, 여전히. 천진섭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만 천진섭도 정의헌이 자신만만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신이 담긴 눈빛, 웃음.
천진섭에게는 없어서 믿고 싶은 힘이었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특별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