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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174화 (174/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74화

32. My Turn(2)

“말씀하세요.”

나는 예희를 힐끔 보면서 대꾸했다.

냉큼 쪽지가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봐도 예희라면 고분고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으므로.

예희는 뭐……. 그런 사람이었고, 그동안 잘 지냈다.

노래는 여전히 굉장히 잘했고(부럽다), 대중성이나 성적도 스테리나인을 웃도는 감이 있었다.

그간 연락은 한두 번 메시지를 제외하면 주고받지도 않았고 만남도 〈밀제트〉를 통한 것이 전부였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내 용건은 정수기에 있었기에 우선 가지고 온 물통과 컵에 찬물부터 담았다.

“용건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돌아오는 말이 없자,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조용히 질문했다.

몇 년의 방송 경력으로 자연스럽게 익힌 야매 복화술이 빛을 발할 때였다.

그러자 예희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이런 주제를 말하는 티를 전혀 내지 않고– 내게 되물었다.

“다음주 수요일에 시간 있어요?”

“오전은 안 돼요. 오후도 세 시부터 되고요.”

“오전에는 왜 안 되는데요?”

“저 학교 갑니다…….”

…….

예희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학교’라는 단어 자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학생이세요?”

“그 뒤풀이 다음날도 저 중간고사였는데요.”

“…….”

“……그냥 그랬다고요.”

성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남몰래 원망할 예정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입밖으로 꺼내버리면 그 순간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왜요?”

내가 묻자 예희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둔 쪽지를 흔들었다.

받아서 그 자리에서 손바닥만한 종잇조각을 펼쳐보면, 샤프로 적힌 흐린 글씨가 보였다.

배경에 회색 실선이 일정 간격으로 그인 것을 보면 공책을 찢어낸 것 같았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XX길 XX

금선빌딩 4층 도가회 010-XXXX-XXXX

2017. 05. 10 오후 4시 예약」

쪽지 속에는 주소와 인명(으로 추정된다), 전화번호, 그리고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전에 메일로 오고간 연락이 성사되었구나. 눈치는 챌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 예희가 왜 이걸 나에게 알려주는지 그 까닭은 불분명했다.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요.”

“무슨 부탁인지 먼저 들어볼게요.”

예희가 까치발을 들어 쪽지를 들여다보고는 내용을 읽어주었다.

“저날 네 시에 저 장소로 가주세요.”

“……강남이면 네 시까지는 못 가요.”

“조금 늦는다고 이야기해둘 테니까요.”

말하고 생각해 보니까, 택시를 타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에 예희를 잠시 쳐다봐주었다.

삼 초도 되지 않는 시선으로도 뜻이 통했는지, 부연설명은 즉시 이어졌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아하.”

“당신이 대신 가주시면 어떨까 하고.”

‘당신’이라…….

뒤집어진 정수기 물통에서 크게 꿀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받아온 플라스틱 컵 중 하나에서는 우유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 물을 담지 않고 버려야 할 성싶었다.

내가 대답 없이 느긋하자 예희가 뾰로통해져서는 독촉했다.

“알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직접 이메일을 받고 답장한 사람과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래, 좋다.

궁금한 것도 있고, 그 사람들을 추적하고자 한 것도 사실이고, 예희의 말도 맞았다.

하지만 예희의 말에는 중간 단계가 하나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부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승낙해야만 하는’ 제안처럼 포장하는 이유가 부자연스럽게 생략되어 있었다.

요컨대 그렇게 좋고 대단한 일이면 네가 직접 하지 왜 나한테 시키냐, 라는 질문이었다.

직접 가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정 따위의 불가피한 사정보다는 심리적인 문제일까.

“……휴우.”

예희가 한숨을 쉬었다.

눈을 보면 분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역시 기억보다는 온순하다.

“솔직히 의헌 씨는……. 친절하시고.”

“으음.”

대답할 말이 애매했다.

“제가 불안 증세가 있어서,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곤란해요.”

“…….”

“무섭거든요.”

불안……. 놀랍지 않다.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곤란한 것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예희가 자기 방어 능력이 떨어질 테니까.

메일로 연락한 상대방의 신원도, 따지자면 파악된 바가 전혀 없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조직폭력배 무리가 아닌 이상 기가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네, 기꺼이.”

그렇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예희는 가서 깽판을 놓고 아예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만 아니면 대화는 마음대로 하라고 덧붙였다.

내가 알게 된 예희의 과거사를 전달해도 되고,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물어봐도 좋고.

현장 판단은 온전히 내게 맡긴다는 말이었다.

알게 된 것을 거짓 없이 제대로 공유만 하면 된단다.

다시 말해 제한이 거의 없이 자유로웠다. 나는 좋았다.

“저를 되게 믿어주시네요.”

“좋죠?”

“아, 네…….”

대답하면서 쪽지를 다시 두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말만큼 쉽게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기회였다.

왠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이 사건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도 같은데.

* * *

한편 그 순간.

정수기가 있는 복도 모퉁이를 돌면 바로 보이는 그곳.

아르바이트로 방송국에 출입한 한 스태프가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꼼꼼이 각도를 조정해 보았지만, 원하는 대로 앵글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피사체 두 사람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 중이었고.

‘아이씨!’

그는 새로운 촬영은 포기하고, 대신 갤러리를 열어서 이미 찍어놓은 사진을 확인했다.

꽤 흔들리고 줌을 워낙 당겨 찍어서 화질도 낮았으나 사람을 분간할 수는 있었다.

짧게 손을 잡은 것처럼 보였는데 사진에는 전혀 찍히지 않았다. 본인의 착각인지.

‘처음부터 카메라부터 들이댈걸!’

하지만 방송국을 출입하면서 이성 관계만큼 자극적인 소재도 없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익명 사이트 ‘리플페이퍼’에서 만난 사람들과 오픈 채팅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해당 사이트는 아이돌을 중심으로 연예인들의 뒷이야기를 하고 소문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장소.

〈데프아〉를 보면서 정의헌에게 관심이 생겨서 인터넷을 떠돌다가 그는 결국 거기까지 흘러들어갔다.

안티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악성 개인 팬도 아니었다, 아마도.

스테리나인도 관계성이 나쁘지 않아서 몇몇 멤버를 제외하면 그룹이 싫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연예인의 이미지를 믿지 않는 편이었다.

당연히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결함이 있으리라고 그는 여겨 왔고, 솔직히 그것을 꽤 알고 싶었다.

비밀의 주인공이 ‘그 남성’이라면 웬만큼 답이 없는 면모도 좋아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물론 약간 조롱은 하겠지만.

‘……소리라도 들렸어야 되는데, 애매하네.’

그는 스크롤을 내려 사진을 확인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 그가 이 소식을 알리고자 하는 곳은 익명 사이트가 아니었다.

사건의 시작은 두어 달 전, 비교적 최근…….

악성 댓글과 루머 생산자가 대거 고소를 당하며 리플페이퍼 사이트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사이트에 지박령처럼 붙어있는 그들은 아예 오픈채팅을 만들어 대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까다로운 인증을 몇 단계 받아서 스테리나인 덕후만 스무 명 정도가 모인 채팅방이 생겼다.

사람 수는 적었지만 다들 일당백을 해서 단톡방에는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온갖 정보가 올라왔다.

관계자만 아는 소식을 물어오는 사람이라든가, 사생 정보원이라든가, 인터넷 탐정들이라든가.

그들이 단톡방에서 양질의 비하인드 썰을 풀고 인증하기를 반복했다.

‘재미는 있는데 지금까지 너무 깔끔했지.’

다만 문제는 그 지점이었다.

관계자도 사생도, 진정 껄쩍지근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 헌깅이 광고 두개 더 들어옴 검토중인데 안할가능성 높대윤

– 엥 어제 가로수길 촬영 있어서 간거긔 같이있는거 스µ"임

– 정구 학교 오늘 혼자 지하철타고 감 ㅋㅋ 모자 ㅈㄴ 코여움

– 그 인리얼 비계 콩준이 친구 계정이에윤 안씨 본인 ㄴㄴ 지금 멤들 다 여친 없긔

잘 안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도 스케줄 스포일러나 일상생활 이야기고 어두운 면이 좀처럼 없었다.

깔끔한 건 좋았지만 털어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연예인이 과연 어디 있을까.

언제는 그 묘한 답답함에 아예 채팅방에서 질문해본 적도 있었다.

왜 이 애들은 –멤버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었다– ‘진짜 사생활’ 정보가 없냐고.

다른 아이돌 사랑의 짝대기는 역사와 변천까지 알게되었는데, 정작 이들만 이렇게 깔끔하니 이상했다.

– 솔직히 자기들끼리 조심하자고 말맞춘 것 같음

– 교류가 없는건 아니긔 근데 여자랑 둘이서 만나는 일이 없어서 그럼

– 헌깅이 엔프제라서 여사친은 많음 근데 아무리 친구여도 여자랑은 둘이 안만난다고함

– 지금이 연애할때냐 ㅋㅋ 그냥 정신 똑바로 박힌거라고 생각함

……단톡방 안에서도 의견은 여럿으로 갈렸다.

연막으로 떼거지로 다닌다는 썰, 비혼주의설, 야망으로 욕구를 씹어 먹었다는 썰 등등

그러나 정보가 닿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그는, 〈밀제트〉 현장 알바를 구한 뒤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 여자랑 말도 안 섞을 리는 없어!’

여러 시도와 과정 끝에 발견한 것이 지금.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는 정의헌과 달고나밴드 프론트 예희의 모습이었다.

사실 자신이 포착한 장면이 약한 것 같다고 그도 생각했다.

이곳은 사적인 장소도 아니고, 무슨 대화인지도 알 수 없고.

이런 사진 한 장은 폭로 거리나 뉴스 기사 한 줄도 되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 비주얼 합이 좀 좋지 않나.

분위기만 보면 꽤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판단은 다른 사람들이 해 주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편집 어플을 열어 워터마크를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했다.

그리고 ‘대피옵챗 익명이 퍼날시 살해’라고 적어서 화면을 전체 채울 만큼 빼곡하게 붙여넣었다.

여기서 글자 투명도를 낮추기만 하면……. 되는데.

“이봐요.”

불쑥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뭐 하세요, 거기서.”

그가 고개를 느리게 들어올렸다. 등골이 서늘하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날이 선 목소리에 불쾌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백금발에 가까운 탈색모의 빼빼 마른 남자.

반년 넘는 시간 동안 스테리나인이라는 그룹 사진과 영상을 찾아봤으니 모를 수가 없는 상대였다.

스테리나인 멤버, 천진섭.

“어…….”

“무슨 사진 찍으셨나요.”

천진섭이 정확한 용건으로 쏘아붙였다.

핸드폰을 내려다 보는데, 사진 편집 화면이 곧바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누가 보아도 동의 없이 몰래 촬영한 듯한 사진이 액정에 가득했다.

‘잘못 걸렸다.’

스테리나인 멤버 중에서는 천진섭 성격이 제일 더럽다.

그 말을 채팅방 관계자 발언으로 몇 번이나 들어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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