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71화
31. REALLY REALLY(7)
기차 위를 보던 시점이 같은 자리에서 훅훅 뒤로 밀려나며 기차 맨 끝을 향했다.
그리고 점점 더 3인칭으로 멀어지고, 기차는 빠르게 우주를 달렸다.
보이지 않는 철로 위를 달려 푸른 행성의 대기권 안까지.
우리가 만나지 못한 과거에도, 먼 미래에도.
별은 그곳에 존재한다.
단정하고도 진지한 목소리의 한국어 나레이션이 오디오를 메웠다.
성우마냥 완벽한 더빙은 아니었으나, ‘아는 목소리’가 주는 친근감이 역할을 다했다.
나레이션을 시작으로 침묵하던 배경음에 백색소음이 천천히 공간감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장면은 아예 전환되어, 기차가 아닌 지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망했다.
연기자는 스테리나인 멤버들이었다.
별의 바다.
책을 읽다가 창문을 통해 별을 보는 이영하, 극장에 앉아 밤하늘 영상을 시청하는 강주찬.
빌딩이 숲처럼 빽빽한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는 한이주.
CG로 만든 것 같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천진섭이라든가…….
짧은 복도를 지나가 가정용 소파에 뛰어들어 앉더니, 리모컨으로 TV를 켜는 안승준의 모습까지.
파도치며 빛나는 항성.
이용익은 무언가를 채 깨닫지 못하고 기시감만을 느꼈는데, 이는 타당한 감각이었다.
이는 스테리나인의 노래 〈나에게〉의 뮤직비디오에서 차용한 장면들이었다.
〈밀제트〉에 출연하기 직전 그들이 6명 버전으로 발매한 바로 그 노래 말이다.
다만 당시 참여하지 않은 멤버들의 장면을 교묘하게 교차 삽입해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그때, 눈이 덮인 별장 하늘 위로 유성우가 떨어지고.
밤마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먼 훗날을 희망한다.
주어는 ‘당신’이 아닌 ‘우리’였다.
그 ‘우리’가 별을 보고 유성우를 보았다.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고, 어디로인가 향하며, 가는 길에 서로를 만났다.
발이 닿은 목적지는 야외 기차역.
마침내 상행선과 하행선이 마주보는 기차역에 올라서자 맞은편 플랫폼이 보일 듯했다.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모자 아래에서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레이션 목소리의 주인.
감청색 기관사 제복을 입은 정의헌이 밝은 전등 빛 아래 위치했다.
막 도착한 기차가 그의 얼굴을 가리지만, 얼굴과 표정은 잔상이 남아 보는 이의 뇌리에 꽂혔다.
우주 너머로 자유롭게 여행하는 꿈을 꾼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와 나레이션이 겹치고, 영상의 방향 자체가 기차가 도착한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열 쌍이 채 되지 않는 구둣발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면…….
그 순간 시선이 발끝에서부터 점점 위로 오르며 전신을 훑었다.
그들은 일전에 보였던 정의헌과 비슷한 유니폼 차림이었다.
뎅, 뎅, 뎅.
기차역에 걸린 시계가 종소리를 울렸다 – 기차는 언제나 정시에 출발하고 도착하니까.
아홉 명의 기관사들은 바삐 기차에 타고, 기차는 선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 누가 있었냐는 듯……. 손님도 역무원도 아무도 없이 텅 빈 역사.
시야 끄트머리 승강장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TRAIN FOR: MILLIONAIRE Z」
「TRACK: 9」
‘트랙’의 두 가지 의미를 이용한 가벼운 말장난이었다.
‘밀리어네어 Z행 기차는 9번 선로에’.
영상이 종료되고 무대 위로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고…….
멤버들이 선 중앙에 조명이 드리웠다.
Is everybody Ready?
Here we Go
김지상이 손을 위로 올리며 가볍게 웃으며 노래는 시작되었다.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위치에서, 동선을 이동해 대형을 바꾸는 그들.
첫 소절의 가창은 천진섭이었다.
똑같은 별자리를 신호로 삼아
너와 나 이제부터 혼자가 아냐
첫 번째 노래 〈Glitter〉는 가벼운 분위기로 진행되는 곡이었다.
제목 그대로 ‘반짝이는’ 듯한 청량 콘셉트.
안무는 추는 사람은 어렵지만, 보기에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라고나 할까.
노래는 순조롭게 고조되고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산뜻했다.
그나마 의상이나 메이크업, 헤어 등이 분위기를 차분하게 고정해주었다.
지난번 경연 〈뛰어들어〉가 스포티한 티셔츠나 후드 등의 의상이었다면 이번은 제복 스타일.
앞에 상영된 VCR에 멤버들이 입고 나왔던 그 남청색 제복이었다.
지금이야 Go up Sky high
별빛 속 우릴 봐
특별함을 느낄 수가 있어
곡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경직된 스타일링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연기력을 동원했다.
멤버들은 각자 파트에서 세트로 놓인 기차 객석에 앉거나,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밖을 내다보는 액션을 취하거나, 손바닥만 한 갈색 망원경을 빼들어 보는 척했다.
장난스러운 동작들을 보면 ‘직원’보다는 우주를 모험하는 소년만화 등장인물들 같았다.
렌즈 너머 아름다운
저 하늘에 닿고 싶어
김지상의 가창을 마지막으로 〈Glitter〉의 가벼웠던 분위기가 한 차례 반전되었다.
댄서들이 바삐 무대로 들어오고, 절약한 듯한 힘을 일점에 분출하는 댄스 브레이크가 시작되었기에.
즐기며 웃는 듯한 표정이 사라진 순간. 군무는 꽤나 진지했다.
‘원래 여기는 의헌이가 댄스 브레이크를 전담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센터가 아예 김지상이었다. 정의헌은 그답지않게 멤버 중에서는 맨 끝이었고.
이용익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고 해소되었다.
대형 자체가 비스듬하게 이동한 것이다.
천체가 자전하듯이, 중앙을 축으로 겉껍질 부분이 45도 정도 통째로 돌았다.
즉, 춤을 추며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부담을 그들의 메인댄서가 짊어졌다.
박자마다 성큼성큼 이동하는 그를 눈으로 바삐 쫓다가, 이용익은 다음 동작을 보게 되었다.
댄서를 포함한 무대 위 이들이 서로 가까이 붙고 서로를 지지대 삼아 형태를 갖추었다.
대형을 비틀었기 때문에 정면이 아닌 옆모습으로, 상승하는 곡선 모양이 전부 잘 보였다.
“와…….”
옆자리 심사위원에게서 놀라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묘기다, 이 정도면 묘기야.”
그리고 왼쪽 끝에서 달려와 동료의 등을 밟고 전진하는 것이, 댄서 포지션 멤버인 서난영.
무대 배경으로 깔아놓은 LED에서 열차가 달려왔고 영상과 사람의 속도가 맞아 떨어졌다.
높이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올라가는 각도마저 정확했다.
그 찰나.
우주 열차는 하늘로 치솟았고, 사람은 뛰지 않았다.
그를 지탱해주던 이들이 수십 개의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아래로 끌어 내렸기 때문에.
〈Glitter〉와 〈Express〉의 반주를 믹스해 고조되던 음악도 뚝 끊기다시피 멎었다.
무대 암전.
어떻게 서난영이 바닥에 내려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잡힌 힘으로 무게를 분산한 듯했다.
이용익은 숨을 죽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
무대에 불꽃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았다.
불꽃 빛으로 실루엣이 보이고, 댄서가 빠져서 아홉 멤버들만 서로를 잡고 얽혀 있고.
환호성이 들려왔다.
‘환호성?’
이용익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객석이 응원봉이나 플랜카드, 슬로건, 혹은 개인 응원도구로 빛나고 있었다.
리허설은 끝나고 관객들은 들어왔다 그는 심사위원석에 앉은 채였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지나 있었다.
〈Express〉가 시작되었다.
Ah—
시작을 알리는 것은… 그러나 중앙의 정의헌이 아니었다.
원래 〈Express〉라는 노래는 시작부터 3단 고음 애드리브라는 괴물같은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대목은 녹음 음원에만 넣어, 라이브 시 직접 부르지는 않는 파트였는데…….
이번에는 그 음을 점점 높이는 파트를 한이주가, 대형 뒤에 서서 라이브로 소화해냈다.
다른 멤버들도 부르는 사람이 잘 보이도록 평소보다 자세를 낮춘 채였다.
그 고음은……. 착지 장면을 생략한 대신 넣은 ‘폭발 구간’이었다.
정의헌은 라이브를 부탁하며 아무튼 한이주의 엄살을 엄청나게 들어야 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뒷사정을 잘 모르는 이용익조차도 이 모든 것을 팀워크라고 이해했을 정도니까.
그건 팀워크가 맞았다.
한 명이 하지 못하면 다른 멤버가 메꾸어내면 된다.
그러려고 존재하는 팀이었다.
애드립이 안정적으로 끝나면 중앙을 지키던 정의헌이, 멤버들의 손을 훑어 떨어뜨렸다.
궤도 안에 갇혀
같은 자릴 공전하는
평범함이 끔찍하면 너는
그가 한 걸음 걸어나오며 가창하여, 긴 인트로를 끝냈다.
두세 번째 파트를 김지상과 서드림이 받아서 부른 뒤에는 이영하의 파트.
어두운 밤 음악이 시작되면
개찰구를 뛰어넘어 널 만나러 갈게
1절과 후렴구를 연결하는 대목.
이영하가 연습때처럼 정의헌의 허벅지를 밟고 뛰어 전진하였다.
너를 위한 Party Express
별을 건너 마법처럼 널 향해
달려가고 있는걸
후렴 군무는 어레인지 없이 2015년 그대로 진행했다.
사실 〈Express〉는 이용익도 아는 노래였고, 이 노래가 신곡이었을 당시에 그도 좋게 평가했다.
노래가 라이브가 걱정될 만큼 가득 차 있고 퍼포먼스도 짜임새 있으며 에너지도 좋다.
그는 노래를 두고 이렇게 말하며 주변에 들어보기를 권했는데, 그 장점은 이번 무대에도 이어졌다.
가수도 팬들도 그리고 가볍게 듣는 이들도 좋아하던 〈Express〉의 모습 그대로 무대는 진행되었다.
임계치를 넘어서
더 높이 갈게 No Break
래퍼들의 파트도 중간중간 넉넉하게 지나가고…….
찬란히 네 마음을 열어
중력처럼 더 세게 당겨 Uh
메인보컬 두 사람이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클라이맥스의 고음 애드리브까지.
펑 폭죽이 터지고 은색과 금색 종이 컨페티가 흩날렸다.
곡이 시작될 때보다는 침착해진 텐션이었으나, 그게 힘이 빠진 모습 같지는 않았다.
초반 〈Glitter〉가 설렘으로 가득찼다면 〈Express〉 파트는 그보다…….
우아했다.
그 분위기는 2015년에 스테리나인이 〈Express〉로 무대에 섰을 때와도 달랐다.
소년의 꿈에서 어른의 낭만으로.
여유로웠지만 조금은 쓸쓸했고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너를 기다리는 Time
노래가 끝났다.
VCR과 똑같은 눈빛이 무대 위에서도 보였다.
정의헌은 가운데에서 노래를 마무리하고 뒤로 돌아 걸었다.
그리고 멤버들이 앉거나 기대어 선 기차 객석 세트 위로 발을 디뎠다.
마지막으로 무대 장치가 움직였다.
기차 세트 자체가 옆으로 밀려 이동한 것이다.
진짜 ‘기차’처럼 수평 이동 무대를 사용했다.
“이야…….”
고작 오 분이었다.
VCR부터 첫 번째 곡 〈Glitter〉, 두 번째 곡 〈Express〉까지.
오 분 조금 넘는 공연 시간이었지만, 이용익은 그 시간 내내 전력으로 달린 기분이 들었다.
그는 편히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왔고, 귓가에는 관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앵콜, 앵콜!”
다음 무대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무엇을 가져와도 이 오 분을 뛰어넘지는 못할 테다.
관객부터 제작진, 심사위원, 다른 출연진, 무대 위의 댄서와 가수들의 희열이 그 자리에 공명했다.
그들은 너무나 처절하고도 지극히 단단한 움직임을 보았다.
스테리나인의 압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