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63화
30. Run Away(6)
‘일부러 그랬네.’
딱 좋은 타이밍에 라이브 방송을 켜고, 민감한 주제에 관해 가감 없이 발언하고.
그 발언의 방향은 상냥하지만,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판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절반은 팬을 위한 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채점 권한을 가진 이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이야기는 인터넷 뉴스 기자들이나 이튜버, 팬들이 여기저기로 퍼뜨려줄 테니까.
‘자체 평가 순위에 과하게 몰입할 필요는 없다’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같은 참가자들에게 정의헌이 말하고자 한 내용은…….
한번 막아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잘하자.
서난영도 지금까지 두 번이나 스테리나인이 자체 평가에서 최하 등수를 기록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무대가 엉망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감점 표를 주기에 스테리나인이 만만했던 것뿐이다.
아이돌이니까, 아이돌 보이그룹이니까, 까마득한 선배님에게 표를 줄 수는 없으니까, 히트곡이 없으니까.
이유는 각자 다를 수도 있었고 비슷할 수도 있었지만, 편할 대로 채점하다 보니 극적으로 표가 몰린 것이다.
선입견은 쉽게 벗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주의 평가 결과도 똑같은 사유였다.
‘이제 알았겠지…….’
스테리나인은 그렇게 무시를 당해가며 뒷전으로 밀려날 팀이 아니라는 것을.
팬덤도 건재하고 화제성도 상당하며, 그 구성원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는다.
새로운 결과가 다른 참가자들의 깨달음을 말해주었다.
더러워서든 무서워서든, 다들 알아서 피했다.
‘……실패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론을 이용하는 언론 플레이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 측면으로 승부하는 전술까지.
스테리나인을 제외한 일곱 팀 –새로 들어올 팀까지 포함해서– 모두를 상대로 심리전을 펼쳐야 했다.
대담하다고 칭송할 일이 아니었다.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그중 누구 하나라도 ‘어쩌라고! 나는 계속 감점할 거다!’라고 생각했다면 이 점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고를 들인 것이 무색하게 효과가 반감되었을 테고.
실제로 정의헌은 참가자를 면밀히 조사해 성공의 가능성을 높였지만, 그래도 확률 싸움이라는 추측은 옳았다.
서난영은 이어지는 순위 발표에 성의껏 리액션하는 동시에 머리로는 생각을 덧대고 또 덧대었다.
‘리스크가 높은 행동은 좀처럼 하지 않는 형이었는데. 조금 변했나.’
〈데프아〉 이후로.
서서히.
“그러면 바로 현장 투표 결과를 이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MC가 말했다. 순위 공개는 여느 때처럼 1위부터 아래로.
1위는 오늘 투입된 걸그룹이었다.
대중적으로 호의적인 그룹이었고, 인기가 많았던 콘셉트로 반가운 무대를 꾸렸다.
2위는 남성 래퍼.
가장 대중적인 노래를 골라 피처링 게스트로 동시대 가장 인기가 많은 여성 솔로 가수를 초대했다.
그리고 3위.
바퀴 달린 신발을 신고 무대를 달리며 〈뛰어들어〉라는 노래를 선보인 스테리나인.
“……축하합니다!”
카메라가 먼저 얼굴들을 클로즈업으로 잡았기 때문에, 결과가 들리기도 전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한 명도 빠짐없이 기립해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순위 소감도 따로 발표하지 않는 빠른 순위 공개였는데, 그들은 솟아나는 감정을 후일로 미루지 않고 좋아했다.
자체 평가 2위, 현장 투표 3위.
최상위권은 아니었지만, 아이처럼 해맑게 기뻐하는 멤버들 덕분에 서난영도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제작진이 칼같이 사인을 보내는 바람에 축하한 지 몇 초만에 다시 의자에 앉아야 했지만, 두근거림은 이어졌다.
“현장 투표 순위 4위는 223점으로…….”
중하위권은 상위권보다는 비교적 느리게 공개되었다. 4위는 달고나밴드.
2라운드를 준비해야 하는 하위권 네 팀은 여성 래퍼, 댄스팀, 그리고 아이돌 걸그룹과 보이그룹 하나씩이었다.
현장에서 눈물을 보이는 참가자가 있어 즉시 MC의 짧은 인터뷰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모든 순위가 공개되고 잠시 진정한 시간을 가진 뒤에는 다음 경연에 관한 공지가 내려왔다.
“3차 경연 미션은 ‘나를 대표하는 트랙’입니다.”
일명 ‘대표곡 미션’은 ‘지금까지 좋은 곡을 아껴 두었으면 어서 꺼내와라’라는 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무대 준비를 위한 토큰 정산.
‘대면식’ 무대가 공개된 지 일주일이 넘었기 때문에 〈Run and Run〉 무대 영상이 조회 수 집계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자체 평가 순위에 따른 토큰과 1라운드 현장 투표 결과로 얻은 토큰을 더해야 했다.
정산 결과가 담긴 편지봉투를 MC가 한명씩 호명하며 나눠주었고, 스테리나인은 리더가 대표로 받았다.
봉투 속 초대장처럼 위아래로 접힌 종이를 꺼내 열어보면 토큰이 다닥다닥 붙어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무려 6장의 토큰.
“우와……!”
“여섯 개예요!”
첫 무대는 토큰 없이, 두 번째 무대는 1개, 오늘의 세 번째 무대는 토큰 두 개로 제작했다.
그런데 오늘의 세 배라면 사용하고 다음을 위해 남길 수도 있는 양이었다.
‘브레이크 트랙’으로 깎이는 토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출된 결과였다.
서난영은 양옆을 둘러보았다. 조그만 토큰을 들여다보는 여덟 쌍의 눈동자에 금색이 반사되어 빛났다.
솔직히 서난영도 그 순간 다른 참가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역시 순수하게 흥분했다. 금빛으로.
* * *
“대박이야…….”
대기실에 곱게 모시고 와 테이블 위에 놓아둔 토큰 카드를 서드림이 틈날 때마다 뒤집어보고 있었다.
물론 기쁜 결과였지만, 막내 셋은 아예 감동까지 해버린 것 같았다.
무슨 보물이라도 들인 사람처럼 셋 다 옷을 한 겹 갈아입을 때마다 테이블 앞으로 가서 카드를 확인했다.
실제로는 잃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진짜 금도 아니건만……. 상징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렇게 가지고 싶으면 한 장씩 떼어어다가 볼에 붙여라.”
“헐! 핸드폰 뒤에 붙일래.”
“그래도 돼?!”
“아니…….”
한마디 해주자마자 진짜 어디 붙일 기세로 카드를 집어드는 한이주를 말리느라 천진섭과 같이 진땀을 뺐다.
내가 괜한 말을 했는지 물건 주인에서 도둑으로 진로를 바꾼 듯한 눈빛으로 한이주는 한참이나 토큰 카드를 노려보았다.
인트로부터 무대, 심사, 자체 투표와 결과 확인까지.
모든 녹화가 종료되고 대기실로 돌아오면 어느덧 깜깜한 밤중이었다.
그리고 녹화 종료 시점부터는 의상과 액세서리를 반납해야 해서 우리는 또 바로 퇴근하지 못했다.
순위 확인 녹화도 결코 짧지 않고, 그룹에 인원이 많아 탈의에도 시간이 소모되어 우리는 계속 퇴근이 제일 늦었다.
그런데도 퇴근길을 잠시 보기 위해 길목에서 기다리거나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사람이 많았다…….
‘주차장까지는 내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상념을 단숨에 정리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셔츠를 걸어 행거에 꽂아놓으며 탈의를 마쳤다.
역시나 늑장을 부리다가 이제 모자만 겨우 벗은 녀석도 있어서, 슬쩍 대기실 구석에서 빠져나온 것이 그 직후.
“화장실?”
“네에.”
매니저 형에게 대답하며 문고리를 돌리는 내 뒤로 서난영이 따라붙었다.
난영이는 빠르게 뒷정리하는 타입은 아닌데, 오늘따라 멀끔하게 퇴근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웬일.”
“내 맘이야.”
방송국 건물이 아닌 별도 스튜디오에 시간도 늦어서 화장실 방향으로 나서면 인기척이 급히 줄어들었다.
퇴근할 사람은 이미 다 했고, 스태프들은 아직도 촬영장을 수습하느라 바쁜 듯했다.
나보다 반 보 정도 느리게 걷던 서난영이 문득 앞으로 나오며 말을 걸어왔다.
“이럴 줄 예상했어?”
“뭘 예상해.”
“결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으나 긴 구조의 복도라서 크게 말하면 음성이 울린다.
그 현상을 의식했는지, 서난영은 아예 내 귓가에 다가와서 속닥속닥 질문했다.
“에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는데, 난영이는 그 이상의 답을 바랐나 보다.
덧붙이자면 서난영은 신통치 않은 말을 들어도 날카로워지지 않는다.
“형 라방은 왜 했는데에.”
그 대신 갑자기 논리를 잃고 졸라댄다.
“아이고야……. 할 수도 있지, 왜.”
“정의헌이 그럴 리가 없어……. 갑자기 그런 말을 할 리가.”
“사람을 믿지를 않는구나.”
나는 가볍게 핀잔하고는, 걷는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
그야 라이브 방송에서의 발언은 어느 정도 미리 계산된 감이 있었다.
방송 직후 타이밍에 실시간 소통을 시작하면 질문이 들어오는 것이 뻔한 수순이었다.
〈밀제트〉 방송을 보고 불안을 느낀 사람이……. 많은 것이 당연했으니까.
일부러 떡밥을 던졌고 넓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여느 때보다 속시원하게 말했다.
매니저팀에게 혼나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기는 했지만, 뭐.
“나녕, 네가 방송 보고 그런 말을 했잖아.”
“어…….”
“우리가 약해 보이는 연출로 방송에 나오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나 천천히, 나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감점 표를 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누군가는 속이 썩어야 하는 구조고.
다만 자체적으로 같은 출연진에게 감점을 매겨야 하는 시스템은 영 아니꼬운 것이 사실이었다.
‘욕 많이 먹고 앞으로 없어질 테니까 그건 됐고.’
이 시스템이 출연진 불화를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극적인 방송 요소로서 성적이 나쁜 팀에게 불행한 이야기를 주기 위해서일 테다.
우리 팀 이미지를 불행하게 연출하기 위해 제작진이 출연진의 감점 표를 이용했다면…….
우리는 같은 제도를 이용해 이미지를 수복하면 되는 일이었다.
끝이 좋으면 그만이었다.
“나도 그래~”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어떻게 연출해도 방송이 우리를 최약체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불쌍해 보이는 건 참겠는데, 약해 보이는 건 마음에 안 들더라고.”
가엾은 이미지는 착한 모습으로 연결해 눈을 돌릴 수라도 있지, 후자는 영 쓸모가 없었다.
무엇보다… 불쌍한 것은 사실일 수 있어도, 우리가 약한 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나.
서난영은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오묘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웃어넘겼다.
“아니이…….”
“어, 저기 왜 불이 켜져 있지.”
그리고 말을 돌리려고 아무런 이야기나 입에 올렸는데, 말하자마자 불현듯 진짜 궁금해졌다.
그룹 대기실은 반대 방향이었고 솔로 가수라면 이미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다만 그 대기실에서는 소란한 인기척이 느껴졌고, 전기 선이 열린 문틈 사이로 나와 있었으며, 내부가 밝았다.
그때 문의 틈새로 소파에 앉은 사람 얼굴이 슬쩍 보였다.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헐.”
낯이……. 익었다.
래퍼 겸 프로듀서 원키드.
래퍼 경연 〈웨이크 업 MIC〉 프로듀서로도 출연하기도 하고, 히트곡도 많고.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라는 방송에 트레이너로 참여한 경력도 있는…….
‘헐.’
저 사람이 왜 여기서 나오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