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60화
30. Run Away(3)
‘아무튼 이 자체 평가 순위가 좋게 나와야 여론을 뒤집을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나쁜 평가를 들은 분야는 자체 평가가 유일했고, 다른 성적은 비교적 꽤나 상위권이었다.
수능시험으로 비교하자면 현장 점수, 자체 평가, 무대 영상 조회 수가 각각 2등급, 8등급, 1등급으로 나오는 느낌일까.
1등급이나 2등급에서 성적을 올리는 것은 어렵지만, 8등급에서 4등급이 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다. 그런 논리였다.
그리고 제작진을 응징하는 것보다는 제작진이 만든 시스템에 끼어들어 문제를 뒤집는 것이 훨씬 간편했다.
제작진에게 편집 그렇게 하지 말라고 대들기 VS 자체 평가 제도를 역으로 이용하기. 나는 후자를 골랐다.
벌써부터 제작진을 적대시해봤자 우리만 손해였고, 마침 제작진이 자체 평가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그리고 지금이 자체 투표를 건드리기 딱 좋은 타이밍이거든.’
1차 경연 방송이 끝나면 바네사 장이 〈밀리어네어 Z 트랙〉 제작진의 갑질을 폭로하게 된다.
그러면 제작진은 방송 포맷을 건드릴 테고,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제도가 사라질 것이며.
자체 평가 순위 역시 2차 경연을 마지막으로 떠밀려 사라질 예정이다.
즉 다음 평가가 라스트 자체 평가라는 의미다.
‘괜히 내가 포맷 변화는 스테리나인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지.’
대신 그 자리에 거주창스러운 다른 시스템도 많이 들어올 테지만, 그야 그때 가서 신경 쓰면 될 일이고.
일명 치고 빠지기, 히트 앤드 런, 역습과 반전, 유종의 미.
한 번의 상승으로도 기억에 남을 좋은 그림을 거둘 수 있다는 건 장점이었다.
기회가 되니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전술을 시도하자고, 나는 행동 강령을 마음속으로 먼저 정했다.
“치고 올라가자. 할 수 있지?”
나는 멤버들에게 분명하게 말해두었다.
떨어졌으니까 올라갈 수 있고, 우리는 이렇게까지 몰렸기 때문에 이제 조금만 움직여도 판 전체가 흔들릴 거라고.
무대는 평소처럼 열심히 하는 게 답이었고, 이쪽은 너무 과도하면 되던 것도 잘 안 된다.
따라서 머리를 쓰는 일은 방송을 보려고 중단한 오늘의 단체 연습을 재시작하고 끝낸 뒤 이루어졌다.
“안 들어가?”
“뭐 좀 하고 가려고.”
해산하고 숙소로 가려는 멤버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서드림이 질문했다.
정수기에서 물병에 물을 새로 채우는 것을 보면 드림이도 귀가하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너는?”
“나 노래방.”
“어엉.”
노래방 기계가 있는 연습실에서 혼자 노래 부르면서 개인 연습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토요일에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회사는 주말 없이 일하는 직원들과 연습생들로 제법 북적북적했다.
컴퓨터가 있고 빈 장소를 찾지 못한 나는 결국 공용 태블릿 PC를 하나 빌려와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밀리어네어 Z 트랙 출연진]
첫 번째 검색어는 아주 간단했다.
우리가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부터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스테리나인을 제외하면 고작 일곱 팀이야.’
‘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개인 참가자도 팔 분의 삼이나 되었다.
또한 최초의 여덟 팀은 이런 구성이었다. 인디밴드, 걸그룹, 댄스팀, 래퍼 둘, 보이그룹 둘, 커버 이튜버.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한 명씩 파악하는 일은 대중의 반응을 분석하는 것보다 빠르고 변수가 적었다.
OTT 사이트에서 〈밀제트〉 1회와 2회 방송을 다시 보며, 검색 포털과 위키의 도움을 받아 같은 참가자들의 SNS를 하나씩 살폈다.
그룹으로 참가했다면 그 팀원 계정도 하나씩 전부 검색했고, 공개된 계정의 최근 피드와 타임라인은 전부 읽어보았다.
그리고 첫 번째 자체 평가와 두 번째 자체 평가에서 우리에게 ‘브레이크 트랙’을 주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했다.
제작진이 쓸데없이 자체 평가 장면을 길게 편집한 덕분에 본방송에 의논과 결과 장면이 모두 실려 분석이 쉬웠다.
‘아하…….’
스테리나인은 1회 ‘대면식’에서 ‘브레이크 트랙’을 4개 받아서 최초의 자체 평가 8위가 되었으며.
우연찮게도 2회 ‘1차 경연 1라운드’에서도 그 ‘싫어요’ 딱지를 딱 4개 받아 꼴찌를 기록했다.
그런데 영상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달고나밴드를 제외하면 1회와 2회에 우리를 지목한 팀이 전혀 겹치지 않았다.
달고나밴드는 우리도 저쪽도 ‘라이벌이라서 서로를 견제하겠다’고 암묵적 합의를 했으니까 논외로 두어도 될 테고.
‘두 번 연속해서 브레이크 트랙을 주지는 않았다는 거야.’
우리가 대면식에서 자체 평가 8위를 했을 때에도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은 술렁였다.
그때 사람들의 의견은 우리가 두 번째로 8위를 한 오늘과 동일했다. 꼴찌를 할 만한 무대는 아니라고.
대면식 버전 〈Run and Run〉 무대 공개 이후 대중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현장 점수는 없었으나 심사위원 반응은 좋았고, 이튜브 무대 영상 조회 수는 방송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증가 중이었다.
대면식에서 우리에게 브레이크 트랙을 준 출연진의 SNS를 찾아보면 며칠 전 라이브 방송을 녹화한 영상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그는 30대 후반의 남성 래퍼로, 설마하는 마음에 대충 건너뛰며 보니까 〈밀제트〉를 언급한 부분이 등장했다.
- 아니, X발. 그런데 내가 너무 거기서 X나 빌런처럼 나오잖아. 그 젊은 애들 있는 사이에. 얼마나 X따 같아. X나 억울해가지고. 아니, 애들은 X나 착해. 그리고 X나 예쁘고 잘생겼고 X발, 개 잘해. 나도 방송 보면서 칭찬하고 개 쩐다고 환호하고 소리지르고 X나 좋아했는데 그걸 다 자르고 점수 주는 부분만……. 에휴, X발.
배경을 보면 작업실 같은데, 담배 연기로 뿌연 화면에 조명까지 어두워서 정말 빌런처럼 보였다.
그리고 몇 초마다 한 번씩 욕설을 뱉어서, 죄송하지만 솔직히 리액션이 왜 다 잘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은 억울하다는 뉘앙스, 그리고 같은 출연진을 칭찬하는 말. 본의가 아니었다는 듯의 어투까지.
나는 특징을 기억해두기로 하고 그 영상 전후 맥락을 더 훑다가, 다음 출연자 계정으로 곧 넘어갔다.
우리와 같이 출연한 보이그룹 멤버의 계정을 열어 스크롤을 내려보는데 서드림이 휴게실로 내려와 손을 흔들었다.
“뭐 보는 중?”
“어……. 인리얼그램.”
기웃거리는 서드림에게 태블릿 PC 화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서드림은 물병에 남은 물을 싱크대에 버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분 그분이네.”
“아는 분이야?”
“아니, 그……. 한이주랑 친해지고 싶다는 분.”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어제 서드림이 오랜만에 카페 채팅으로 소통하며 놀았단다.
그러는 중에 어떤 팬이 ‘드림아 이거 봤어?’ 하고 이 보이그룹 멤버가 SNS에서 한이주를 언급한 것을 보여주었다고.
“이주랑 친해지고 싶다는 분이 나타났는데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한이주랑 친해지는 거 쉬운데 별로 가치는 없다고 했어.”
약간은 팩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즉시 그 멤버와 이주를 같이 검색하자 누가 백업을 해둔 SNS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Q&A 캡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오빠 밀제트하면서 친해진 다른팀 분 있어요?
– 어.. 친해진 분은 아직 없는데 ㅜㅜ 스테리나인에 한이주님 !! 매점에서 먼저 말걸어주시고 넘 친절했어요 ???? ㅋㅋㅋ 친해지고 싶어요
호의적인 멘트였는데, 이 팀도 사실 대면식 촬영에서 스테리나인에게 ‘브레이크 트랙’을 주었다.
그리고 이 멤버는 그룹에서 맏형 격의 인물로 브레이크 트랙 의견을 주도하고 정리한 멤버였다.
‘역시 이 사람들……. 자체 평가에 악의는 없었어.’
그리고 대개 스테리나인을 좋게 보거나, 팬덤이나 시청자 여론에 신경을 꽤나 기울이고 있다.
즉 여기서는…….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여론을 자극하며 대응하는 것이 옳았다.
마침 딱 한 번 써먹을 수 있는 술수가 있었다.
“나 지금 갈 건데, 형은 집에 언제 가.”
“나중에 가려고. 너 먼저 가.”
정확히는 최초의 1회가 가장 좋은 결과를 낼, 여러 번이 될수록 가치가 훼손될 뿐인 전술이.
그리고 이 방법을 실행에 옮겨 파동까지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팀에서도 많지 않았다.
……내가 나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럴 때마다 〈데프아〉에 나가기를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으로서 이 팀에서 가장 이슈가 되기 쉬운 사람이 나였다.
인기가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1위를 했으니까.
일명, 압박 전술이었다.
* * *
“직캠이 안 뜬다.”
호텔 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안승준의 개, ‘안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연하지만 음악방송도 아닌 서바이벌 방송인데 개인 직캠이 바로 몇 시간 뒤 업로드될 리가 만무했다.
호텔 TV에 틀어놓은 〈One Day〉 무편집 버전 무대 영상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재생되었다.
“이거 콘치즈 내가 다 먹어도 돼?”
호텔 안 테이블에 놓인 배달 삼겹살을 집어먹으며 안개의 친구이자 정의헌 최애인 ‘아임’이 질문했다.
안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방송을 보며 너무 흥분했더니 음식을 먹을 기력조차 없었다.
숟가락이 플라스틱 용기를 삭삭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듣고 또 들은 노랫소리가 실내에 반복되었다.
두 사람은 오늘……. 그냥 만났다.
툿투에서 공유되는 팬케이크 맛집 카페를 안개가 발견 → 글을 인용해 먹고 싶다고 독백함 → 아임이 ‘나도’라고 멘션 → 토요일에 만나서 먹자고 약속 잡음 → 점심 팬케이크 조짐 → 그러고 보니 토요일은 〈밀제트〉 방송하는 날 → 헤어져서 각자 집에서 방송을 보려고 하니 시간이 애매함 → 방송도 보고 자고 갈 속셈으로 호텔 예약 → 본방송 시청 후 저녁을 배달해 먹는 중.
고인물이 된 그들은 이제 아이돌을 오프라인에서 보는 날이 아니어도 아무렇게나 약속을 만들어 놀았다.
“어!”
그때 아임의 외침이이 안개의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안개가 침대에서 튕기듯이 벌떡 일어나면, 핸드폰을 손에 붙잡은 아임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침대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더듬어 제 핸드폰을 확인해보면, 알림이 하나 와 있었다.
안개도 다 볼 수 있는 내용이건만 아임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면서 굳이 대답해주었다.
“의헌이 라방한대.”
“장난해?”
공식 카페 메모장에 정의헌이 남긴 글이 보였다.
[정각에 라이브 짧게! ????]
정각이면 시간이 20분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누구보다 빠르게 밥을 마저 먹고 청소하고 씻고 누웠다.
라이브 방송은 TV에 연결할 수 없었으므로 셀카봉으로 핸드폰을 들고 나란히 누워서 올려다보자는 계획이었다.
안개는 최애가 아닌 멤버의 방송은 굳이 실시간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친구가 옆에 있다면 말이 달랐다.
몇 초의 로딩 시간이 지나가면 연습실 구석에 앉아 인사하는 정의헌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 안녕~ 조금 들어오면 시작할게요.
흐트러진 머리카락, 반소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평소보다 꽤나 침착한 분위기.
영상통화를 하듯 카메라를 가깝게 잡은 정의헌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