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59화
30. Run Away(2)
이용익 선배님이 출연자 자체 평가 순위표를 가지고 우리 대기실에 들어와 결과를 알려주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우리는 의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인터뷰가 시작되면 ‘더 열심히 하겠다’고 투지를 불태우거나 속상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꿋꿋한 쪽이 진짜고 슬퍼하는 반응은 방송이 잘 나오도록 시키는 대로 예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이다.
적어도 방송이 끝난 뒤 멤버들과 이야기해 본 나는 결론을 그렇게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4개나 ‘싫어요’를 받은 까닭을 그럭저럭 이해해서, 다들 ‘그럴 수 있다’ 정도로 생각했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실제 녹화에서는 현장 순위를 먼저 발표했다.’
현장 순위라는 것은 방청객이 무대를 보고 리모콘 버튼을 눌러 평가한 점수와 심사위원 점수의 합산이다.
여기서 스테리나인은 8팀 중 2위라는 순위를 기록했고, 출연자 자체 평가에서 우리는 8팀 중 8위가 되었다.
이 두 가지가 어째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순서를 올바르게 생각해 보면 말이 된다.’
그러기 전에, 자체 평가와 현장 순위의 차이부터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평가하는 주체가 다르지만 둘 다 순위를 매기는 시스템이고, 성적이 잘 나오면 기분이 좋고 나쁘면 기분이 별로다.
다만 탈락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요소는 현장 순위뿐으로 자체 평가의 결과는 ‘토큰’과 연결되었다.
토큰 말이다. 다른 말로 무대 제작비.
현장 순위는 다음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고, 자체 평가는 다음 무대의 퀄리티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현장 순위다.’
보통 방송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맨 나중에 내보내 시청자들을 잡아두게 마련이다.
〈밀리어네어 Z 트랙〉도 그랬다. 내가 처음 받아본 방송 기획안에도 명확히 적혀 있었다.
1라운드 촬영 순서는 ‘인트로 촬영, 무대와 각 무대 리액션, 자체 평가, 현장 순위 및 자체 평가 결과 발표, 팀 인터뷰’라고.
그런데 수백 수십 명이 달라붙는 방송이 대체 어떻게 계획한 그대로 돌아가겠는가.
즉 이놈의 프로그램도 1차 경연 1라운드 녹화부터 여러 변수로 우당탕탕, 얼렁뚱땅 난리가 났다.
‘최초의 원인은……. 아무래도 녹화가 너무 길어져 버렸다는 것.’
〈One Day〉 무대를 녹화한 경연 당일, 그날.
계산 실수든 현장 사정이든 매 순서마다 딜레이가 겹쳤고, 그 결과 촬영은 예정된 시각을 한참 넘겨 끝났다.
삼십 분, 한 시간도 아니고 세 시간이나 오버되어 팀 인터뷰까지 끝나고 숙소에 도착하면 다음날 새벽이었다.
그리고 촬영 딜레이 때문에 특히 곤란해진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밀제트〉 MC로, 결국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면서 무대 촬영만을 마치고 일찍 퇴근했다.
다음 스케줄 때문이었는지 피치 못할 문제가 있었는지 정확한 배경은 모르겠지만, 예기치 않게 자리를 비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남소리 선배님이 대타로 등장했지.’
〈데프아〉에서 MC 실력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고, 마침 당일 ‘특별 심사위원’ 게스트로 출연해 긴급 섭외가 들어간 것 같다.
다만 제작진도 갑자기 모셔온 사람을 오랜 시간 대기시켜 놓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무대가 끝난 뒤 몇 시간이나 더 붙잡아두기 미안했거나, 아니면 남소리 선배님에게 이어지는 스케줄이 있었거나.
아무튼 제작진은 특별 MC를 위해 녹화 순서를 ‘현장 순위 발표, 출연자 자체 평가, 자체 평가 순위 개별 통보’로 바꿔 버린다.
배우 남소리의 촬영 분량을 대기 없이 한두 시간으로 자르고 빠르게 집에 보내주기 위해서.
중요한 점은 이 변동으로 이루어진 변화였다.
다시 말해, 모든 출연진은 1위부터 8위까지 현장 순위를 먼저 들었다.
그 후에 자체 평가를 진행했다.
‘순위를 알고 있으면 당연히 견제하지.’
나쁘게 말하면 견제고, 좋게 말하면 순위가 낮은 출연진 기 세워주기.
스테리나인도 현장 순위가 6위쯤 나왔던 사람을 ‘리스펙트 트랙’으로 골랐으니까 쌤쌤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해 단지 눈치게임을 대실패했다고 보면 된다.
우리한테 ‘싫어요’를 건넨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표가 몰릴 줄은 몰랐겠지.
현장 순위도 높고, 점수 넉넉하고, 연차도 낮은 데다가 객관적인 성적도 부족하고, 아이돌 보이그룹이고.
얕잡아 보일 사유라면 우리가 대면식 8위를 받았을 때 충분히 따져보았으니까 한 번 더 반추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현장 순위가 1위였던 달고나밴드도 자체 평가 순위는 5위로 낮았다.
정말이지 당연한 결과였다.
“진짜 순서를 바꿔놓은 이유를 모르겠네.”
“내 말이.”
강주찬이 뒷덜미를 주무르며 말했고, 내가 맞장구쳤다.
이후에 순서가 바뀌면 시청자들이 착각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걸까.
실제 자초지종이 무엇이든 간에 제작진의 계산 미스는 분명해 보였다.
아무튼 보는 사람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고, 두 번 연속해서 꼴찌를 받은 우리도 서먹하다.
출연자들의 반응 및 다짐 인터뷰가 더 이어지는 틈을 타 나는 이영하에게로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영하가 손바닥에 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는 사이에 슬쩍 화면이 켜진 핸드폰을 뺏어왔다.
– ㅋㅋㅋㅋ 양심 어디갔어 순위 뭔일이야
– 그렇게 칭찬해놓고 순위 왜 저래?
– 여기서도 스나 잘한다고 플 한참 돌았는데 찬물 오지네
– 멜걸 순위 보니까 스나순위 더 이해안된다
– 근데 저렇게 브트 많이받고 8위할 무대는 진심 아니었음
익명 게시판은 쏟아지는 새 글과 댓글으로 그야말로 불타고 있었다.
게시판은 혼잡했으나 주 골자가 되는 의견은 분노 또는 비동의, 또는 짜증이었다.
우리 팬이나 우리에게 호감을 품은 사람, 아이돌 팬이 많은 게시판이라서 걸러 듣기는 해야 할 테지만.
이 정도로 빠르고 많이 새 글이 쌓인다면 이를 주류 20대, 30대 시청자 의견으로 봐도 될 성싶었다.
물론 스테리나인을 옹호하는 의견 중에서도 과격하거나 수위가 아슬아슬한 발언은 있었다.
예컨대 다른 출연자와 우리를 비교하거나, 우리에게 ‘브레이크 트랙’을 준 출연자들을 대놓고 헐뜯는 식으로.
그리고 반대로 스테리나인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게시물도 드문드문 등장해 눈에 밟혔다.
– 티비랑 현장이 다른가 스나 순위는 계속 낮네
– 나 솔직히 스나 자체점수 걍 ㅇㅇ 글쿠나싶은데
– 전문가 눈에는 저렇게 보일 수도 있지 저사람들이 복덕박사들보다 잘알임
– 그냥 멤들 인성같은 게 별로인가... 실력 떠나서 두번이나 이러니까 자꾸 깬다 ㅎ;;
– 뭘 깨 그럼 늦게 자든가 ㅋㅋ
악플을 다는 사람들도 신났을 것이다. 1회 때부터 우리가 자체 평가만 쏙쏙 골라 최하점을 기록하고 있으니까.
순위가 그냥 낮은 것도 아니고 아예 두 번이나 8위였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우리의 꼴찌 인터뷰를 지나치게 길고 서정적으로 반복해 보여주는 것도 썩 달갑지 않았다.
보는 사람에게는 해롭고, 안티에게는 즐겁게 욕할 건수만 제공하는 꼴이었다.
인터뷰가 다 끝나고 나서야 특별 MC 남소리와 함께한 현장 순위 발표 시간이 찾아왔다.
- 2위는 총 257점을 획득한, 스테리나인입니다.
정말 교묘하게 순서가 조정되어, 육안으로는 두 순위 발표 앞뒤가 서로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웠다.
메이크업이나 자잘한 액세서리, 소품 따위에 미묘한 차이는 있었으나 의심할 증거가 되기에는 빈약했다.
– 스나 2위 ㅊㅋㅊㅋ
– 아니 이걸 이렇게 순식간에 발표한다고
– 그래 이거지
– 방청객중에 스나 팬 많았나보네
– ★★★현장 점수는 심사위원 점수 포함임 억까그만★★★
스테리나인의 최종 순위가 공개되어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양측 의견은 더욱 멀어지기만 했다.
아무리 최종 2위여도 팬들은 자체 순위 8위가 마음에 걸릴 테고, 안티는 그 8위를 근거 삼아 비난할 수 있었다.
좋은 것만 보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지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나쁜 것만 보는 것은 그 반대보다 훨씬 쉬웠으니까.
‘상태창 미션을 따라가는 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던가.’
그래서 미션을 처음에는 가이드라인이라고도 부른 것이고.
확실히, 대면식 8위는 스테리나인에게 계속 나쁜 영향을 뻗치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아마도 앞으로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상태창이 준 새로운 미션은 ‘5차 경연까지 살아남기’.
하지만 이렇게 하위권으로 근근이 생존해서는 스테리나인 이미지만 상할 뿐이었다.
“많이 꼬였다.”
이영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서드림은 나를 따라 실소했고, 서난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짜증을 내는 천진섭이나 속상해 보이는 이영하도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연습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옮겨 멤버들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녹화 끝나고 며칠 동안 서로를 잘 다듬어 가까스로 자체 평가 결과를 극복했는데, 방송 내용이 너무 나빴다.
하필 자체 평가 결과를 길게 잡아주고, 우리 인터뷰도 풀이 죽은 모습 위주로 내보냈기 때문에.
“……연습할까!”
“그러자.”
우리 멤버도 의욕이 약간 꺾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는 하던 연습이나 마저 하자며 일어나는 한이주와 김지상을 불러세웠다.
“잠깐만. 우리 방송 피드백 좀 하고 가자.”
그리고 우리는 이십 분쯤 그 자리에 다시 앉아서 2회 방송에 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회는 다 같이 보여서 본 게 아니라서 1회 내용도 다시 짚고, 무대를 방송으로 본 감상도 주고받았다.
역시나 현장 순위 2위라는 결과나 대면식 영상의 준수한 조회 수에 관해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좋은 결과는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한두 번 언급되었을 뿐, 이야기의 중점으로 다룬 내용은 자체 투표 순위와 ‘브레이크 트랙’.
“그런데 나는 남들이 낮은 점수를 줬다는 것보다 방송에 그렇게 나왔다는 게 조금……. 싫었어.”
“나도 진섭이 말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우리가 약해 보이는 거, 연출. 그게 마음에 안 든 거지.”
서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섭의 말에 의견을 덧댔다.
“진짜로. 우리 무대 엄청 잘했는데. 나 라이브 되게 잘 됐는데.”
“이주 잘했지…….”
“자체 평가가 뭐라고!”
메인보컬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각자의 생각을 듣고 취합해 보면 진정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생존과 탈락에 중요하지도 않은 자체 평가 결과를 크게 부풀려서, 우리에게 나쁜 서사를 쥐어짠 제작진이 문제였다.
‘빠져나갈 방법은 사실 엄청나게 간단한데.’
제작진에 의해 과대 해석되었지만, 원래 자체 평가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수를 약간 써서, 다음 자체 평가 성적을 잘 받으면 된다.
자체 평가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사실 좋은 무대를 만드는 것보다도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