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58화
30. Run Away(1)
‘갑질이라는 단어는 너무 자극적이지 않나?’
나로서는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폭로한 사람이 사용한 어휘가 정확히 ‘갑질’이었다.
폭로자는 커버송 이튜버이자 150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신인 가수, 바네사 장.
나는 인트로와 무대 준비 단계 분량이 끝나고 어느덧 첫 번째 무대에 올라서는 가수 바네사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당한 일이 ‘방송사 갑질’이 맞았나,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맞서는 제작진의 입장도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해가 된다기보다는 특별히 이 제작진들이 극악무도한 편은 아니라는 거지.’
진짜 갑질이라고 매도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제작자들이 온 동네에서 아직 살아 숨쉬고 있으니 말이다.
바네사가 폭로한 내용은 한마디로 PD나 작가를 포함한 〈밀제트〉 제작진들이 출연자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
디테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글 내용을 보면 제작진이 유독 바네사에게 소홀히 행동하기는 한 듯했다.
바네사는 신인이었고, 재외국민에, 방송 출연이 처음이었고, 매니저조차 없어서 제작진이 더 신경을 써줘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떠나 생각하면 그 분이 피해자는 맞아.’
바네사 장이 가장 불편을 느끼고 대중도 크게 공감한 문제는 ‘헛걸음하게 만들기’였다.
탈락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2차 경연 준비를 강제하고, 준비가 다 끝났는데 탈락을 통보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바네사는 혼자 편곡부터 세트 구상 및 의뢰, 연락, 댄스팀 섭외, 연습실 대여 등 모든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고.
준비한 것을 보여줄 수 있으면 상관이 없는데 그 노력에도 1차 경연 2라운드에서 바네사는 탈락하고 만다.
‘한마디로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돈도.
한국인들의 분노 버튼을 누르는, ‘준비에 들어간 비용이라도 지급해달라는 말에 제작진은 대답을 미루고 있다’는 폭로까지.
재능 있는 20대 초반 젊은이가 무대 제작비로 생활고를 호소하는데 팬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바네사는 SNS나 브이로그 등으로 방송을 기대하는 티를 모든 출연진을 통틀어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내고는 했으니까.
바네사 장은 억울했고,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으로 표출했다.
본인의 탈락이 공개되자마자 바네사는 본인의 SNS, 인리얼그램 속 ‘스케치’ 기능을 사용했다.
인리얼그램 스케치는 24시간이 지나면 글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짧은 글을 올릴 수 있는 기능이고…….
다시 말해 그분은 게시물 배경을 까맣고 회색 그라데이션으로 설정하고, 하얀 글씨로 주어를 쏙 빼놓고 글을 올렸다.
‘더 요약하면.’
바네사 장은 본인 SNS 계정을 통해 제작진을 저격했다.
‘아, 저격하게 될 거라는 의미다.’
아직은 아니다.
바네사가 서바이벌에서 탈락한 다음 그 난리가 날 텐데, 오늘 방송은 탈락자가 나오지 않는 1라운드라서 말이다.
내가 사건 발생 타이밍을 알고 있는 까닭은 이미 2라운드 및 탈락자 발표 촬영이 끝나서, 스포일러를 전해들었기 때문이고.
제작진의 행실도 그대로고, 저번 촬영부터 바네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으므로 예측대로 일은 전개될 가능성이 높았다.
인리얼그램 스케치 저격, 바네사 팬들의 분노, 인터넷 속 공론화, 인터넷 뉴스 기사화 등등.
〈밀제트〉를 실시간으로 시청하지 않은 내가 바네사 장의 폭로 사건을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일이 큰일이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여기서 하필, 바네사가 방송이 아니라 이튜브로 인기를 얻은 스타라는 점이 일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구독자 연령층이 너무 어리거나…….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을 잘 몰라.’
당장 〈밀제트〉 출연자 중에서도 아이돌인 우리나 래퍼, 아니면 심사위원이 같은 내용으로 스토리를 올렸다면 반응은 뻔했다.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방송 일을 하냐, 쪽팔리게 왜 스토리로 올리냐, 돈 쉽게 벌면서 불만만 많네, 옛날에 KMC에는 무대 준비에 메이크업에 당일 리허설까지 다 시켜놓고 무대 못 하게 만드는 서바이벌도 있었는데 약한 소리나 하네, 이런 말을 들었을 터.
그런데 바네사 장 채널의 구독자들은 가수를 공격하는 대신에 제작진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바네사는 케이팝 혹은 팝송만큼이나 애니메이션 주제가나 일본 음악을 많이 커버했기 때문에, 팬들도 대개 그쪽이었으니까…….
방송을 만들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바네사의 대처가 미흡했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다. 그런 일이 계기가 되어야 제작진도 자정하지.’
소속사도 없고, 방송이 익숙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바네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수습하느라 불행해질 제작진들의 사연과는 별개로.
아무튼 각 분야에서 MZ세대에게 유명한 아티스트를 모아오겠다는 제작진의 기획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서로의 분야가 너무 달라서 팬덤도 존중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
과연 제작진이 몰랐던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이러고 우리가 바로 나오네?”
“이렇게 경연만 보여주는데 재미가 있나……?”
천진섭과 김지상이 여느 때처럼 평범하게 투덜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나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습실 스크린을 내려 빔 프로젝터를 연결하고 OTT 플랫폼을 스트리밍하는 중이라서 영상 화질이 말이 아니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우리들끼리 이야기하는 장면과, 〈One Day〉 무대 준비를 하는 장면이 아주 짧게 삽입되었다.
‘그래, 폭로보다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우리에게 그 폭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조금 더 간단히 말하자면 폭로 후에 제작진들이 〈밀리어네어 Z 트랙〉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폭로 사건이 단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만큼 규모가 커지고, 제작진은 빠르게 입장문을 발표한다.
어떻게 방송을 바꾸어 나갈지, 앞으로 출연진을 어떻게 보호할지, 그리고 바네사 장에게의 보상 계획까지 적어서.
‘새삼 제작진들도 이 방송에 공을 많이 들였지.’
방송이 3주만에 고꾸라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빠르게 문제를 파악하고 피드백한 것이다.
보통 다른 데서 이런 일이 생기면 폭로만 이슈가 되고 이후 대처는 어떤 방향이든 묻히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제작진의 대응과 사과가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거의 며칠만에 프로그램 시스템을 갈아엎는다는 대범한 결론을 내고, 논란거리도 전부 틀어막은 셈이었다.
이때다 싶어 비약하자면 제작진 대응이 훌륭하다고 입소문을 타서 방송도 시작보다 더욱 흥행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바네사 장의 갑질 폭로 사건이 발생하면, 〈밀제트〉의 서바이벌 포맷은 곧 내가 잘 아는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 스테리나인에게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당한 호재였다.
하지만 시간을 건너
네 손끝에 닿을 수 있다면
〈One Day〉 무대는 방송 중.
리허설이나 촬영 때 간단히 모니터링했던 것보다 화면이 더 밝고 예쁘게 나오고 있었다.
사운드도 더 잘 들리게 후보정을 했는지, 미묘하게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음량도 모두 조절된 채였다.
“나도 좀 보자.”
나는 핸드폰 화면을 슥슥 내리고 있는 이영하에게 슬그머니 다가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송을 보며 실시간으로 커뮤니티나 팬들 반응을 살피는 것은 안승준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영하 쪽이 다양한 의견을 보기에 좋았다.
늘 강조하지만 이영하의 서치 능력은 온라인 브랜드 평가 데이터베이스를 다 뜯어온 수준이었기 때문에…….
– 한이주가 스나 메보임? 노래 실력이 아이돌이 아닌데
– 정의헌 새삼 춤 진짜 쫀득쫀득하게 잘춘다 얜 별명중에 아기가래떡 없음?
– 근데 이 노래는 음색이 너무 이용익이라 비교가 안될수가 없는데 ㅋㅋ
– 아 ㅋㅋㅋㅋㅋ 노래 개신나!!!!!!
– 헤메코 진심 잘받는다 얘들은
– 헤메코 잘 받는 게 아니라 잘생긴거임
영하가 TV 스크린과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 보며 익명 게시판을 새로고침하면, 우리처럼 실시간으로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재잘재잘 남기는 글이 순식간에 여러 개씩 로딩되었다.
불호 의견도 간간이 보였지만, 호불호가 갈릴만한 지점이라고 예측한 부분만 언급되어서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이 정도면 악플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우리 무대가 끝나고 다음 순서 출연자 분량이 화면을 채워도 게시판에는 〈One Day〉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확히는, 실시간 의견 사이로 〈공주님과 문제아들〉 드라마에 관해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생겼다.
– 유치뽕짝이라고 욕 많이 먹어도 공문 내 인생드야...
– 공문 지금 생각하면 왜 황성준 남주 아니었나 싶음 ㅋㅋㅋ
– 공문 솔직히 레전드였어 온국민이 홀려있었음
– 원데이가 은근 힐링송임 벗 노래방에서는 못부르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드라마 이야기였지만, 주목할 부분은 있었다.
방송이 진행되는 도중이고 원래 이들은 실시간으로 방송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라는 것.
흐름이 이쪽으로 넘어온 셈이다. 우리 무대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었으므로.
화제성의 승리였다.
“무거워.”
이영하가 밀어낸 덕분에 그 다음 반응은 살피지 못했지만, 어차피 이후로는 우리의 분량이 딱히 많지도 않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리액션 컷을 제외하면 우리가 다시 등장한 시점은…….
여덟 번째 무대까지 끝이 나고, 방청객들의 투표 및 응원 장면이 짤막하게 삽입된 직후였다.
방송을 보면, 대기실에 도착한 출연자들은 각각 빳빳한 종이로 만들어진 보드판이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발견한다.
- 이거 뭐예요?
- 헐, 설마 이거 또 해요?
호들갑을 떨며 출연자들이 한마디씩을 남기고, 1회 방송 때 이미 사용되었던 설명 그래픽이 이번에도 화면을 가득 채웠다.
‘리스펙트 트랙’과 ‘브레이크 트랙’.
출연자 자체 평가.
스스로 생각했을 때 가장 잘한 팀 하나, 가장 못한 팀을 하나 고르는 것.
화면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그룹이면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한 명이면 혼자 고민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모든 참가자가 고심 끝에 결정한 투표 결과는]
그 다음에는 까만 화면에 자막이 나오고, 중간광고가 30초.
멤버들이 다 같이 말을 잃은 마당에 우리의 투덜이들 천진섭과 김지상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이게 왜 또 이렇게 이어지지.”
“순서를 이렇게 바꿔서 재미가 있나?”
방송이 시작될 때쯤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재방송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당황한 까닭은 다른 게 아니었다.
제작진들이 편집으로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
- 스테리나인은 총 4개의 ‘브레이크 트랙’을 받았습니다.
이 결과의 맥락 또한 정반대로 달라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