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57화
29. FLASH(8)
경고 메시지를 눈으로 읽고 채 이해하기도 전에 손바닥에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하고도 딱딱한 유리판에 손바닥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피부가 빨판이라도 된 것처럼 단단하게 붙어서 어깨에 힘을 줘 떨어뜨리려고 해도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
그리고 손에 닿은 그 유리판이 불에 달구어진 것처럼, 지독한 열기가 손바닥 전체를 휘감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는 비명조차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악다문 이 사이로 거친 숨결만이 새었다.
손바닥도 손바닥이지만, 유독 새끼손가락 마디가 옭죄듯이 아팠고 그 위치에는 공교롭게도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더욱 우연찮게도 그 손가락은 조금 전 바구니 속 물건에 긁혀 상처가 나지 않았는가.
상처가 터졌는지 핏방울이 중력을 타고 아래로 실 같은 길을 그리며 흘렀다.
그러나 핏물은 거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붉은 길은 손바닥이 마주 닿은 상태창으로 가 닿았고, 마치 그곳에 흡수되듯이 끊겼다.
‘……뭐야, 이건.’
기이한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분홍색에서부터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홀로그램 창 모습이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몇 초나 지났을까, 드디어 손을 잡아당기던 힘이 풀렸다.
관성으로 인해 내 어깨가 뒤로 밀리고 자세가 흐트러졌지만, 나동그라지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면 상태창 맨 위로 올라온 새 팝업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MISSION FAILURE」
「미션 실패 페널티 정산 완료」
……라고, 상태창에는 적혀 있었다.
저릿한 오른손 손목을 탈탈 털어내며, 아무도 거실로 나오지 않은 사이에 나는 상태창을 더 살펴보았다.
수십 가지 쓸데 없는 스테이터스 목록이 손톱만한 스크롤바를 자랑하며 길게 늘어져 있었고 클릭하면 세부 내용도 볼 수 있었다.
몇 달 전 천사가 읽어준 공격력이나 방어력 따위의 점수뿐만 아니라 가창력, 댄스 같은 본업 관련 능력에도 점수가 붙은 채였다.
‘나라는 인물을 하나하나 분석해놓은 것 같네.’
그러나 그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미션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왼쪽 하단에서 미션 목록을 불러오자 가장 상단에 반짝반짝 빛나는 미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릭해서 확인해보면, 그 내용은 남소리 선배님이 말했듯이 ‘5차 경연 이상 생존할 것’.
그 아래에 쌓인, ‘퀘스트’라고 이름붙은 다른 미션은 회색으로 비활성화되어 있거나 ‘성공 완료’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밀제트〉에서의 생존이 분명했고 남소리 선배님은 내게 진실만을 말했다
또한 걱정거리였던 ‘미션 실패 페널티’ 역시 어떻게든 값을 지불했다. 그 정도 확인이면 충분했다.
끼이익.
그때 마침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나는 급히 반지를 벗겨냈다.
반지를 착용하고 있던 새끼손가락에 반지 모양으로 둥글게 흉이 남은 것 같았다.
화상 흉터처럼 거무죽죽하게 붉은색인 그 자국은 놀랍게도, 공기 중에 노출되기 무섭게 사라져갔다.
이것도 저것도 더 조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만약 이 상태창이 타인의 눈에 보인다면 낭패였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이 반투명한 창을 켜놓고 타인과 제대로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예희는 다 됐대? 의헌이도 준비 다 했으면 나갈까?”
욕실에서 옷을 다 챙겨입고 나온 달고나밴드의 매니저 형이 짧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말했다.
“잠시만요,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어, 그래. 드라이기 어디 있냐고도 좀 물어봐주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대화를 끌어내면서 나는 플라스틱 바구니에 늘어놓은 물건을 주워담았다.
감람석 반지만 제외하고. 이 반지에 관해서는 예희와 따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예희가 모르는 사이에 슬쩍하고 싶었지만, 남의 유품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기에…….
작은방에 노크하고 들어가 예희와 오늘의 마지막이라도 해도 좋을 대화를 짧게 나누었다.
“물건은 다 확인했어요?”
예희가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냉큼 대답하기 딱 좋은 질문이었다.
“아직이요. 몇 개만 가져가서 봐도 괜찮을지 허락을 받고 싶은데요.”
“뭐를 가져가시게요.”
“아, 사진첩이랑……. 이 반지요.”
들고 온 감람석 반지를 예희의 손 위에 올려주었는데, 옮기며 반지에 박힌 보석 하나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아니, 나는 보석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분명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으니까.
그러나 예희가 반지를 형광등 빛에 비추며 관찰하는 동안 자세를 숙여 살펴보아도 보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음?’
보석 하나가 사라졌다. 보석 알은 보이지 않고 바닥을 쓸어보면 반짝이는 가루가 손에 묻어났다.
방에 놓인 옷이나 잡동사니 사이로 튕겨 나갔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반지를 옮길 때의 감각 등을 종합해 생각하면…….
어쩌면 조금 전까지는 굳은 보석이었던 것이 가루가 되어 부스러져 흩어져버린 것 같기도 했다.
‘이유는?’
이 대목에서 타당한 의심은 내가 상태창을 보았기 때문에.
근거 없이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이 점은 차근차근 검증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반지가 있었네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저는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가져가서 더 조사를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예희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내게 반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허락이었다.
기시감을 내가 먼저 언급한 만큼 예희가 남소리 선배님의 비밀을 알아채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였다.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잘 지내는 모습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으나 그 반대라고 해서 잘 그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배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어차피 숨길 수도 없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예희도 나름대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었기에 이 정도는 곧 알게 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는 내가 감람석 반지를 손에 넣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미션이라는 것이 끊이지 않고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아픔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외상은 남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주변 사람이 미션 실패 대가를 거두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답장이 오면 연락할게요.”
예희는 조용히 말하며 작은방을 먼저 나섰다.
웃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다시 연락하기까지 짧은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 + +
예상과 달리 예희는 그로부터 며칠 지나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남겼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가 돌아온 것은 아니고, ‘내부 회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천천히 기다리라는 답장이 왔다’는 말이 다였다.
그래도 무턱대고 마음 졸이는 것보다는 훨씬 매너 있는 대처라고 생각하여……. 잠시 신경을 덜 쓰기로 했다.
감람석 반지도 다른 반지가 많은 액세서리 상자에 일부러 섞어서 집어넣어 보관했다.
‘사용 횟수 제한이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제대로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진짜 횟수 제한이 있다면 낭비할 수 없었다), 겉모습을 관찰하니 정말 보석이 하나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남은 보석은 모조리 멀쩡했다. 처음 살펴보았을 때 분명 금이 간 보석이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말이다.
금이 가는 게 한 단계, 보석이 부서지는 게 한 단계라고 해도 남은 보석 수가 얼마 없었다. 좋게 봐줘야 기회는 대여섯 번.
‘다른 문제가 없다면 상태창은 미션을 완료한 다음에 다시 불러오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속의 규칙을 정한 이후, 나는 정말로 상태창을 불러오지 않고 이후 스케줄을 소화했다.
아무튼 시간은 계속 흘렀고 꾸준히 방송 일정이 잡혀 있는 이상 그쪽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광고 끝났다!”
연습실 방향에서 한이주가 목청 좋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오늘은 〈밀리어네어 Z 트랙〉 2회 방송일.
2차 경연 1라운드 연습을 하던 우리는 잠시 연습을 중단하고 연습실에 TV를 연결해 다같이 시청하기로 했다.
어떤 심각한 일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든 일상을 포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 일상에 수많은 사람이 얽혀 있다면 더더욱.
한이주가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정수기에서 물만 떠와서 연습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우리 좀 나올까 모르겠네.”
서난영이 연습실 바닥에 아저씨처럼 옆으로 누워서 말했다.
말마따나 1회 ‘대면식’ 방송에서는 우리 출연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애초에 〈밀제트〉가 출연진의 연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 방송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적은 편이었다.
리액션이라든가 8위 이후 반응은 길게 잡아주면서도 화기애애한 모습을 전부 잘라내 우리끼리 소소하게 불만이 많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Run and Run〉이었다. 그것도 처음으로 보이는 9인 무대.
– 개오바임 실력파 아이돌 좋아하는 이유 그자체인 무대... 노래 개잘하는데 춤도 개잘춤...
– 저 얼굴에 실력까지 좋으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평.생 예뻐하고 칭찬하고 사랑하는 거지
– 저 무대를 걷고 뛰고 춤추고 구르고 앉았다가 일어나는데 노래가 1나개도 안흔들림 이게머죠?
– 또봐야지 백만번봤지만 또봐야지
– 그냥 좋은게 아니라 이 노래가 원래 9명을 위해 만들어졌구나 , 이런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아 ㅠㅠ.ㅠㅠ 이게 진짜 런앤런의 완전판같아... 더 마스터피스 오브 런앤런 이런거임... ㅠㅠㅠㅠ
팬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꽤 좋았다는 이야기다.
‘흠…….’
이 반응은 원래 우리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목표와 상당히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제 막 스테리나인을 알게 된 팬들에게 우리를 더 보여주고, 그룹을 잘 모르는 대중에게 그룹을 알리는 것.
무대 반응도 좋았지만, 〈밀리어네어 Z 트랙〉이라는 방송 자체의 반응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잘 될 줄은 제작진들도 몰랐을 거야.’
주말 오후 가족 예능의 시청률 전쟁에 출사표를 던지고, 첫 회부터 좋은 성적을 낸 것이다.
경쟁 상대인 주말 예능 중 하나의 메인 PD가 최근에 바뀌었다는 점도 호재로 작용했다.
‘전보다 재미 없다’는 평을 받는 그 프로그램을 자랑스럽게 시청률로 제치고, 신선한 포맷에 관해 좋은 기사도 쏟아졌다.
‘이 다음 위기를 제작진이 어떻게 넘길지가 관건이지.’
그리고 우리가 출연진으로서 그 문제를 극복하는 것도 문제였다.
시기상 곧이었다. 제작진 갑질 폭로 사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