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56화
29. FLASH(7)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을 곱게 접어두고, 나는 먼저 확인부터 했다.
“이름을 발견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내 이름으로 메일이 도착했다면 당연히 도용이었다.
나로서는 보통 메일로 연락하는 일이 없고, 웬만한 일은 메신저로 전달하는 편이었다.
내 기준 이메일 아이디는 핸드폰에 클라우드를 연락하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단순히 보낸 사람 이름이 나라면 동명이인이 수십 수백 명인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내 이름이 아무리 특이하더라도 이 정도 대응은 섣불렀다.
“제가 본 메일 내용 이야기예요.”
예희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외삼촌의 받은 메일함에는 십 년 넘게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 수백 통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스팸 메일이나 광고성 메일이었지만, 내용이 있는 메일도 백 중에 한둘씩은 섞여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예희는 메일을 보낸 사람을 더 추적해 보았는데,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은 전부 동일 아이디였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비주기적으로 도착하는 ‘정산 보고’ 메일.
본문 내용은 없고 첨부된 파일은 인물 목록이었다. 사람 이름과 나이, 직업, 간단한 지역 정보 등이 포함된.
“……그 리스트에 제가 있었다고요?”
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많은 일반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목록 속에서 단 한 명 아는 이름이 있었단다.
작년에 도착한 메일이었으므로 작년 기준 23세, 이름 정의헌, 가수, 서울 거주. 그렇게.
‘연예인 보호 좀 해주지…….’
나는 심지어 본명 세 글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특정되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의미 불명 목록에 나까지 포함되어 있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그놈의 ‘기적’과 연관된 사람이라든가, 나아가 ‘천사’와 접촉한 사람 목록.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고요?”
“인터넷 검색 결과로는 딱히 정보가 없었어요.”
“괜찮다면 그 메일을 저도 한번 보고 싶은데요.”
바로 알겠다는 말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희는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순히 말을 들어서 잠시 방심했다. 과연 조금 달래는 것만으로 다 해결되는 상대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조금만 더 좋게 굴려보면 일시적인 협력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손에 더 정보를 많이 쥐고 있는 쪽은 예희가 아닌 나였으니까 말이다.
“……제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희가 완곡하게 거절하는 척 조건을 달았다.
“뭐든 보여주세요, 제가 믿고 이야기할 수 있게.”
시간을 되돌아온 일에 관해 예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증거도 없을뿐더러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사건이었고, 비밀을 공유할 만큼 신뢰가 쌓인 관계도 아니었다.
내가 이 회귀에 관해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에는 가까운 사람에게는 슬쩍 말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위험한 비밀일 수도 있어서, 당분간은 숨기는 게 나을 듯했다.
조금 더 알아보고, 혹은 그러다가 혼자 헤쳐나가기 힘들 것 같다면.
아니면 누군가 정말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다면……. 어찌되든 말해야겠지만.
“저는 솔직히 진지한 사연은 없어서요. 부모님 계시고, 여동생 두 명 있고…….”
나는 대충 고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요식업을 하시고, 음. 요리사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운 것 같네요.”
“아버지는요?”
“……선생님?”
“방금 그 정적은 뭐예요?”
대답 전에 머뭇거렸더니 칼같이 태클이 들어왔다.
“그냥 말하면 너무 특정이 쉬워서 보통 선생님이라고 해요. 원래 직업은 시인이십니다.”
“선생님이랑 시인은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아요?”
“문예창작과 교수라서…….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닙니다.”
뜬금없는 소리를 대체 왜 이렇게 길게 했냐는 비난이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둘째는 이제 대학 들어갔고, 막내는……. 이제 고등학생인데, 요즘 오디션 보고 다녀요.”
“오디션?”
“인리얼그램 계정을 만들었더니 아이돌 기획사 쪽에서 캐스팅 연락이 계속 온대요.”
일단 꿋꿋하게 정보를 죄다 털어주고 보니까, 정말 쓸데없는 소리 같기는 했다.
게다가 오디션 이야기는 시작된 지 한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정말 따끈따끈한 TMI였다.
“환경 자체는 평범한 편이었다고요.”
“흐음.”
“……그래서 비밀 이야기로 돌아가면, 메일을 보낸 분도 외삼촌분도 제 지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상이 되는 건 있거든요.”
예희가 계속해 보라는 투로 턱짓했다.
“상대는 개인이 아니라 단체일 가능성이 높아요. 어쩌면 외삼촌의 친구분들은 그 소속이었을 수도 있죠.”
“친구분들 연락처는…….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겠네요. 지금 저와 연락하는 분은 없어요.”
“그야 따로 확인해 보면 되겠죠. 어쨌든 저도 사실 그 단체의 관계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몇 가지 정보는 제외하고 예희가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단체는 세상에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일을 연구하는 단체인데, 음모론 추종자보다는 시사적인 느낌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고객이나 이용자 같은 느낌이고, 작년 여름쯤에 그 사람들과 연락해 메일에 언급된 것 같다.
아빠를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는 수준의 과장과 생략이었지만, 아예 사실대로 밝힌 것도 없지 않았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저도.”
“……그래요?”
“실마리는 거의 없지만, 제게는 나름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전후 관계를 뭉뚱그렸으나 내가 특정 인물을 찾고 싶어 한다는 점만은 진실이었다.
나를 과거로 되돌려 보내준 바로 그 팬.
생각해 보면 예희의 외삼촌보다도 정보가 없는 사람이었다.
불리한 정보를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예희에게 샅샅이 말해주었다.
그 사람은 내 팬이고, 그래서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며 티를 내가며 찾을 수도 없다, 닉네임만 알고 본명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내게 해준 말과 행동뿐.
“……제 경우 그분 덕에 그 단체와 얽히게 된 셈이네요.”
그 말도 중간을 건너뛰어서 그렇지 새빨간 거짓은 아니었다.
예희는 삼십 초 정도 말이 없다가, 천천히 앉은 자리에서부터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예희가 거실을 가로질러 앞서가더니 작은방 문을 열었다.
작은방은 컴퓨터가 놓인 옷방으로 거실에 비해 영 어지러운 느낌이었는데, 불을 켜면 바닥에 앉아 있던 강아지들이 일시 기립했다.
내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강아지들을 데려와 북북 쓰다듬어주는 사이, 예희는 책상 위 낡은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켰다.
로그인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는데, 어깨너머로 보니까 아예 노트북 주인이 포스트잇에 볼펜으로 포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메모해 붙여놓은 것 같았다(멀리서 대충 봐도 예희의 필체가 절대 아니었다).
“와서 보시겠어요?”
손바닥만 한 화면에 예희가 앞서 설명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메일함 모습이 펼쳐졌다.
데이터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몇백 통의 읽지 않은 스팸 메일.
분류해 놓은 메일은 제목이 ‘2014년 정산 1’처럼 딱딱했고, 첨부 파일도 가독성 없게 리스트 업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따지니 왠지 모르는 사람의 업무 메일을 훔쳐보는 기분이라, 괜스레 머쓱해지기까지 했다.
‘……이 메일만 봐서는 정말 모르겠는데. 언급된 일반인들을 찾아봐야 하나.’
아니다, 그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보낸 사람의 메일 주소가 남아 있었고, 그 사람은 마침 작년까지도 꾸준히 메일을 전송했으니까.
잘 보면 회사나 특정 단체도 아니고 개인 메일 주소였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했죠.”
“네.”
잠깐 생각하다가, 나는 곧 대담하게 행동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마우스 커서를 옮겨서 받은 메일 하단의 ‘답장’ 버튼을 클릭한 것이다.
“……뭐하시는 거예요.”
예희는 앉은 자리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진정 당황한 듯 목소리를 떨었다.
나로서는 어깨를 한번 으쓱여 줄 뿐이었다.
“연락을 해보죠.”
“네……?!”
“못할 이유도 없잖아요. 솔직하게 쓰는 거예요.”
마우스에 이어 키보드까지 뺏어든 나는 메일 초안을 작성해 예희에게 보여주었다.
‘안녕하세요, 메일 주소의 주인 고땡땡 씨의 조카 고예닮입니다’라는 문장이 첫 줄이었다.
그 뒤로는 외삼촌이 오래 전 실종되었다는 말, 우연히 아이디를 발견해 메일함에 접속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외삼촌의 행방을 알고 싶다, 연락처를 남길 테니 답장 바란다’는 말로 짧은 메일은 끝났다.
“이 사람들이 메일을 계속 보내는 것이 실수든 고의든, 그들이 저희보다 많은 것을 아는 건 확실해요.”
“그건 그렇겠죠.”
“만약 이 사람들이 정말 외삼촌 분의 지인이었다면, 예희 씨를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위험해지지는 않을까요?”
예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나는 말을 골라내다가, 금방 포기했다.
“……감당해야겠죠, 그런 건.”
* * *
예희가 전송할 메일 내용을 다듬는 동안, 나는 작은방에서 바구니를 하나 받아 거실로 나왔다.
문방구에서 팔 것 같은 천 원 내지 이천 원짜리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온갖 자그만 잡화가 뒤엉켜 있었다.
“어, 의헌 씨가 아직 안 갔네?”
그리고 내가 소파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바구니 속 물건을 하나씩 꺼내 보려고 할 때…….
예희의 매니저가 잠에서 깨 큰방 문을 열고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말마따나 처음 회식 자리를 파하고 나섰을 때부터 계산하면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게다가 제삼자가 보면 집주인과 손님이 따로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수 있었다.
“차 청소 좀 하고 왔더니 이 시간이더라고요. 끝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우선 나는 되는 대로 대답한 다음, 나갈 때 같이 나가자며 매니저를 즉시 욕실에 집어넣었다.
청소가 덜 된 차에 무면허 혹은 숙취 운전을 할 수는 없으니 이동 수단은 야간 택시가 되겠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혼자보다 동성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백 배는 나았기 때문에 잽싸게 꼬드겼다.
‘저 형이 씻는 동안 빨리 살펴보고 끝내자.’
욕실 물소리와 예희가 키보드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양옆에서 들려오고, 나는 바구니를 더 뒤적여 보았다.
목적은 감람석 반지였는데, 겸사겸사 몇 장 있는 사진 속 외삼촌의 얼굴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
바구니에 손을 넣고 한참 휘적이면 손가락 끝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꺼내어 보니까, 날카로운 잡동사니에 살갗이 긁혀 새끼손가락 근처가 얇게 찢어진 것 아닌가.
결국 감람석 반지는 바구니 물건을 하나씩 전부 꺼내고 나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맨 밑바닥에서 달그락거리는 반지를 나는 낚아채듯이 건져냈다.
‘찾았다.’
초록색 반지. 보석에 금이 가 있고 밴드도 녹슬었지만, 내가 보고 강주찬이 말한 디자인과 완전히 동일했다.
핏방울이 맺힌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슬그머니 끼워보았다.
‘……뭐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태창이……. 이러면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내가 의문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홀로그램 창이 시야에 등장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팝업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하던 것이 서서히 선명해지듯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상태창 레이어 맨 위에 위치한 것은 마지막으로 나타난 ‘경고’였다.
「WARNING」
「미션 실패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인터넷 창을 닫듯이 오른쪽 상단의 엑스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물에 닿을 때처럼 출렁이며 통과할 줄 알았던 손이 유리창에 부딪힌 것마냥 턱 막혔다.
「WARNING」
「미션 실패 페널티를 최종 계산 중입니다」
그때 상태창이 하늘색에서 연한 분홍색으로 변했다.
상태창에 나타난 글씨 역시…….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