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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154화 (154/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54화

29. FLASH(5)

상태창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이게 등장했다는 것 자체도 내게는 꽤 위협적이었다.

왜냐하면 상태창이 눈에 보이지 않아야 정상 상황이라고 들었으니까.

이렇게 내게 직접 가시적인 신호가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야 물론 텍스트로 나타난 정보만 따져도 오싹하기는 했다.

페널티가 적용된다는 말. 구르면서 봐도 절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명확한 게 하나도 없군.’

다만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팝업된 정보는 긴장을 놓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우선 나는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단숨에 컵에 담긴 냉수를 마셔 없애자 찬 기운이 전신에 돌았다.

맛이나 냄새도 이상하지 않은 맹물이었고, 나는 조용히 식탁 위에 머그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탁.

예희가 컵을 놓았을 때보다 더 작은 소리가 났다.

컵에 프린트된 푸른 초목과 숲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예희와 눈을 마주쳤다.

차갑고 냉정하고 적대적인 두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입을 열지 않으면 살벌한 침묵만이 지속될 것 같아서, 결국 내가 운을 떼었다.

예희는 마치 이 허락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직구로 질문했다.

“건강 문제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병원 가보셨어요?”

말이 반사적으로 나갔다. 어떻게 되었을지 소식이 그렇지 않아도 꽤 궁금하던 터였다.

약간 핀트가 엇나간 반문이었는데, 예희는 묵묵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떤가요?”

“음……. 터놓고 말해드릴까요.”

“예.”

예희는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조금 언짢아 보였지만 태도는 성실했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느릿느릿했다.

“저는 문제가 없다더라고요. 혈압 수치만 조금 낮은 편이라던데.”

“아, 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간 쪽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대요. 빨리 발견했고, 크기도 3센티미터가 안 될 만큼 작아서 수술이나 내시경으로도 제거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수술이랑 내시경은 무슨 차이인데요?”

“정확한 말은 내시경이 아니라……. 아, 뭐라고 했더라. 복강경? 개복을 하지 않고 작은 구멍을 뚫어서, 그 부분만 절제를 하는 느낌이래요.”

의학 관련 지식은 나나 예희나 마찬가지로 바닥을 치는 것 같다.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다.

“구멍을 뚫는 게 흉터가 덜 남는대요. 장기 이식이 필요한 단계는 아니라고 하고.”

“아하……. 다행이네요. 다행인 거죠?”

“네, 그럴 거예요. 의사 선생님께서 원래는 이렇게 초기에 발견하는 게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간은 침묵의 장기라서 잘못되어도 알기 어렵다는 등 예희는 의사의 말을 거의 전부 내게 옮겨주었다.

개복 수술과 복강경 중에서 어떤 방법을 택할지, 의사의 조사와 추천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결론이었다.

어느 쪽이든 완전히 회복하고 재활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테지만, 주변에서는 천운으로 조기에 잘 발견했다고 좋아하고 있다고.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했건만 예희는 낭보를 전하는 것치고는 경직된 표정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그렇게 기뻐 보이지가 않았는데, 내가 그를 눈치채자마자 예희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눌렀다.

“질문에 답을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리고 두 손으로 눈가 밑 광대뼈 부근을 가리다시피 두드리며, 재촉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이었다.

“아뇨, 저도 암이라고는 생각 못 했죠. 진짜 검진해보실 줄도 몰랐고요. 예희 씨가 운 좋게 발견한 거예요.”

우선은 발뺌했다. 내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말이 되는 답변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희는 내 말을 토씨 하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살벌한 눈빛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키만 두고 보면 나보다 한 뼘도 넘게 작은 게 틀림없는데, 왠지 내려다 보이는 듯한 기분이 선연했다.

“주변에 비슷한 체질이었던 사람은 누구였어요?”

“그냥 아는 분이요.”

“어디서 만났는데요?”

“……여기저기서?”

슬슬 추궁하는 소리에 짜증이 섞이고, 나도 가볍게 회피하려고 하니까 멍청한 문답이 빙빙 제자리에서 돌았다.

그냥 모르는 척 집을 나가버릴까 생각하기도 했고, 가늘게 뜬 저 두 눈이 맛이 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상대는 예민한 데다가 날카롭고, 공격적이고, 예나 지금이나 하나부터 열까지 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또한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선 현위치가 상대의 홈그라운드라는 점도 마음에 걸리는 요소였다.

‘글자 그대로 집이기도 하잖아, 젠장.’

너무 아슬아슬한 상황이라 오히려 머릿속이 위기감을 잃고 이 집 강아지들 생각으로 길을 잃으려는 그때…….

예희가 팔을 뻗어서 냉장고 옆에 붙은 싱크대 서랍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예희의 손바닥보다 조금 긴……. 분홍색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네모난 케이스 중간을 당기면 딸깍, 하고 마찰 소리가 났다.

‘아……. 제발, 고예닮.’

손잡이와 안전 뚜껑이 분홍색인 과도.

얇은 칼날이 부엌 천장에 달린 노란 조명을 받아서 눈부시게 번뜩였다.

……겁이 나기 이전에 당황스러웠다.

“저기요.”

“집중하셨으면 해서요.”

“대화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예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동작으로 답을 대신했다.

골때리는 상황에 뇌내 계산기가 타닥타탁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신고하고 도주할까?’

경찰도 오 분이면 올 수 있는 도심이고, 소리만 질러도 옆 방 사람들이 일어날 테고.

일전에 활약한 녹음기는……. 숙소에 놓고 왔다. 그냥 평소에 일 없어도 계속 들고 다닐걸.

하지만 어떻게 대응한다고 해도 여기서 얼굴이나 급소를 칼날에 그이면 끝장이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전략상 후퇴. 내가 양손을 들어올리자 예희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의심이 들 수밖에 없지. 거짓말하고 있잖아.”

왠지 반말이었다.

“숨기지 말고 말해. 사람 바보 취급하지 말고……. 너, 뭔가 아는 게 있지?”

목소리에는 떨림이 한 점 없었다. 칼자루를 쥔 손도 마찬가지였다.

손은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칼날이 많이 기울었고, 손잡이도 바투 잡은 채.

나를 해치려는 방식의 협박이 아닌 듯 보였다. 그보다 나를 더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진정 좀 해봐요, 다친다고요.”

“상관없어.”

하지만 나로서는 상관이 너무나도 있었고, 예희가 이 상황을 노리는 것은 명백했다.

가만히 두면 진짜 손목이라도 그을 것 같아서 나는 잠시 이마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

어찌되었든 생각을 해야 했다.

시간이 없기에 짧게 돌이켜보았다.

내가 예희를 〈밀제트〉와 광고 촬영을 위해 만나서 한 말은 건강 검진을 받으라는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방송이나 매체에서는 정신줄을 꽉 잡고 말을 조심하고 있고.

당연히 팬들만 보는 라이브 방송에서도 내가 아는 미래에 관해서는 함구할 뿐 아니라 신경 써서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대체 예희가 어디에서 정보를 얻어 와서 나를 의심하는지 불분명하는 의미가 된다.

‘정보……?’

내 평소 행동거지가 수상해서 나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면?

예희만 알고 있는 다른 정보가 있고, 만약 그 정보와 연결되는 말이나 행동을 내가 보여준 거라면.

적어도 예희는 내가 미래에서 왔고 미래를 안다는 사실은 확신하지 못한 것 같았다.

추궁 역시 어딘가 두루뭉술한 감이 있었다.

‘얘도 모르는 게 있어. 다만 내가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조사하고 싶은 거야.’

내 예측이 올바르다면, 내가 알아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예희가 내 개인사 정보를 얻었는가였다.

어디서 매뉴얼을 얻었고, 어떤 추리 과정을 거쳐서 내가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고 진단을 내렸는지.

그렇게 생각하자 내 태도를 수월하게 정할 수 있었다.

내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린다면, 예희도 이렇게까지 까칠하고 무섭게 굴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중요한 지식을 이 사람이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높고.

나는 그쯤 계산을 중단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서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알겠다고요. 우리 대화를 해봅시다.”

의심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제안했다.

“이게 조금 당혹스러운데……. 저도 사람인 만큼 당연히 비밀은 있고, 다 말해줄 수는 없거든요. 미심쩍어 보일 수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

“그래도 궁금한 게 있다면 최대한 공유할 수 있는 선에서는 다 대답해 보도록 할게요.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게 뭔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역시 최대한 도울 테니까, 어때요. 얘기를 한번 해봐요.”

살살 달래듯이 이야기하자, 내가 기대한 선에서는 최대한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예희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은 것이다.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 뒤로는 잘그락거리는 마찰음이 이어졌다.

머그컵에 과도를 집어넣어, 날이 그릇 벽과 부딪히는 소리였다.

“길어도 괜찮아요?”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면, 어느덧 깊은 새벽인데…….

수습해서 늦지 않게 돌아갈 방법과 숙소에서 기다릴 친구, 동생들을 생각하면서도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맥을 끊어버리면 또 언제 예희가 이야기할 마음을 먹을지 애매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타야 했다.

의외로 고예닮은 기분파에,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었으므로 은근히 파고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제정신이 들면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간이 걸려도 지금 다 듣는 게 나았다.

“저는 아버지가 없거든요. 처음부터 없었어요.”

……물론 나도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할 줄은 몰랐다.

내 리액션이 고장나든 말든 예희는 꿋꿋하게 사연을 풀어나갔다.

“대신 엄마가 있고 외삼촌이 있었죠. 엄마의 남동생인데, 어렸을 때는 셋이 같이 살았어요.”

그리고……. 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가 나왔다.

외삼촌 이야기.

예희가 미혼모인 어머니와 단둘이서 힘들게 어린 나날을 보내왔다는 것은 애초에 유명했다.

처음 예희가 이름을 알린 〈틴에이지 스타〉 방송에서 아예 그 사연이 등장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예희는 불행하지만 꿈을 가진 씩씩한 소녀 가장 캐릭터를 얻었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우승자가 되었다.

예희의 어머니는 〈틴스타〉 파이널 생방송에 방청객으로 참여해 뜨거운 눈물을 보이며 딸을 응원했고…….

예희 본인 자체가 정보가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아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에 거리낌없이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참 뒤 어머니 건강이 나빠지고, 돌아가시고, 그런 이야기는 제법 대중에 숨기려고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희가 외삼촌이라는 사람은 한 번도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완전히 새로운 등장인물이었다.

“인제는 없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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