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148화 (148/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48화

28. Jopping(5)

Carpe Diem.

라틴어 구절이라고 하는데, 듣자 하니 무슨 옛날 영화에 인용된 후로 유명해졌다고 하더라.

의역을 조금 넣어서, ‘현재를 즐겨라’. 오늘 놀아라, 눈앞의 행복을 잡아라.

진부할 수도 있는 문장이었으나 무대 위에서만큼은 그저 쉽고 간단한 것이 좋았다.

퍼포먼스는 무조건 이해보다 느낌이 선행해야 하니까.

내 파트가 끝나면 바로 두 번째 후렴이었고, 나는 손을 총 모양으로 바꾸어 반대쪽 무대를 가리켰다.

머리 위 조명이 어두워지며 오른쪽 끝에서 무대에 오른 이영하에게로 빛이 돌아갔다.

태양이 타고 별빛이 들면

조그만 나도

하늘 높이 날아오를 꿈 꿨지

이영하가 마이크를 손에 들고 노래하며 무대 중앙을 향해 걸었다.

이미 그쪽에 자리 잡은 멤버들은 댄서로서 장단을 맞추고, 네 사람은 가볍게 리듬을 타며 웃었다.

영하는 소매 없는 진회색 윗옷에 팔을 다 가리는 토시를 착용하여 마이크를 잡은 손이 더 눈에 잘 들어왔다.

키가 자라고 어른이 돼도

숨길 수 없는

마음속의 한마디가 있었어

후렴의 두 번째 소절은 중앙보다 조금 오른쪽에서 두 메인보컬이 만나서 같이 불렀다.

서로 더블링으로 보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어려워도 본격적으로 댄스와 라이브가 함께 들어갔다.

팔을 큰 동작으로 사용하는 후렴 안무가 메인보컬 둘을 앞에, 다른 멤버 셋을 뒤에 세운 구도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동안 나를 포함한 왼쪽 셋도 가만히 대기하지는 않았다.

우리끼리 서로 떠들고 노는 척 소리 없이 표정과 동작만으로 연기를 해야 했으므로.

꿈의 미래 과거 현재 지나가도

네게 닿고 싶다는 맘 있어

이제 굳이 더 숨기지 않아 내 진심

그리고 다섯이 점점 왼쪽으로 이동하는 후렴이 끝나면, 마지막 순서로 강주찬이 무대에 등장했다.

후렴을 맡은 다섯은 자연스럽고 재빨리 좌우로 갈라지듯 퍼져 센터를 내어주고…….

이번에는 왼쪽에 선 우리가 춤을 백업할 차례였다.

본래 랩이 아예 없는 곡이라 편곡으로 파트를 추가했고, 래퍼 강주찬과 안승준은 본인 파트 가사를 새로 썼다.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 사운드가 슬그머니 조용해지고 드럼 박자만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순간.

강주찬과 안승준이 무대에 앉다시피 해 랩 벌스를 주고받았다.

강주찬의 볼 캡 모자와 안승준의 길게 늘어진 인조 가죽 목걸이 액세서리가 꽤나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왜 혼자서 나는 매번 그리워할까

그 누구도 몰라주는데

랩 파트가 끝나면, 다시 가창 벌스로 돌아올 차례.

원래 보컬만으로 구성된 노래고, 편곡으로도 랩 비중을 일정 이상 높일 수 없었기에 오늘 서난영은 노래를 했다.

세 명의 랩 담당 중 그나마 가장 보컬이 되는 것이 그 녀석이라서 말이다.

서난영은 능청맞게 재킷을 슬쩍 내려 어깨와 팔을 보이고는 다시 고쳐 입었다.

왜 떠돌게 될까 잊어버린 것 같아

우리를 잇는 중요한 것을

천진섭이 다음 파트를 받아 노래한 뒤부터는 전원이 무대 정면에 나섰다.

그러면서, 무대에 배치한 드라마 오마주 요소를 곡 진행과 동시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밴드 연주의 강약, 소품 사용, 무대 위에서의 연기를 통해 우리는 드라마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멤버들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엑스트라가 되기도 했다.

무대 역시 교실 안에서 놀이터로, 놀이터에서 가로등 빛이 드리우는 겨울날의 골목길로, 골목길에서 다시 옥탑방으로 시시각각 탈바꿈했다.

전체가 중앙에 서기도 하고 여섯 명, 네 명, 세 명만 유닛 안무를 하기도 하고.

네모난 석고 구조물 위에 앉았다가 일어서거나, 징검다리처럼 뛰어넘거나, 계단처럼 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One Day〉, 언젠가 그 하루, 그 안에서는 아홉 명의 서로 다른 등장인물이었다.

키가 자라고 어른이 돼도

숨길 수 없는

마음속의 한마디가 있었어

그리고 세 번째 후렴부터는 더 섬세하게 소리를 섞고 안무의 각을 맞추고자 했던 것 같다.

객체에서부터 단체로. 팀워크가 더욱 잘 와닿게.

우리의 연출 의도는 간단했다.

서사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지만 캐릭터를 강조해서.

〈공주님과 문제아들〉에서 강조한 러브라인을 전부 들어내고, ‘공주님’ 없는 ‘문제아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언젠가는 그 공주님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만, 그전에도 그들은 시시껄렁하게나마 잘 지냈으니까.

서로를 만나고, 그럭저럭 즐거운 감정을 나누고, 비밀을 말하고, 친근하게 일상적으로 어울리는 것.

그런 것들은 꼭 연인 관계가 아니어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사랑이 아니라 우정 버전.’

아무튼, 떠들썩한 분위기를 지나 노래가 가장 고조되는 하이라이트 고음 애드리브 파트가 이어졌다.

언젠가 우리는

만났던 거야

그때부터 널 좋아했어

One Day

당연하지만 이번 곡의 애드리브는 한이주에게로 기회가 돌아갔다.

그리고 이영하도 쉬지 않고 목소리를 겹치며 멜로디 라인을 풍부하게 키워주었다.

징징 울리는 기타 사운드까지 경쟁하듯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듯 힘을 부딪쳤다.

키가 자라고 어른이 돼도

숨길 수 없는

마음속의 한마디가 있었어

마지막 후렴구를 지나며 노래 분위기가 점점 내려앉았다.

밴드 사운드 또한 차차 약해지며, 우리는 바닥에 놓인 상자 모양 구조물 위에 앉거나 허리를 기댔다.

곡이 결말을 향하는 도중 나는 문득 멤버들의 면면을 살폈다.

설계에 따라 무대 위에서도 짧게 숨을 돌릴 수 있는 노래가 있었고, 이 곡은 지금처럼 끝날 때가 타이밍이었다.

마음속의 한마디가 있었어

〈One Day〉는 현실의 표면에 살포시 닿아 스며드는 분위기로 맺는 노래였으므로.

나는 한이주에 시선을 멈추었고, 한이주는 깔끔하게 목소리를 내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양 뺨이 열기에 상기되어 꽤나 행복한 듯한 얼굴이었다.

처음에 말한 목적 따위 깡그리 잊어버린 것처럼 녀석은 그저 기뻐하고 있었다.

하기야 노래를 저렇게 잘하면 매 무대가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이주가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무대를 해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다.

폭죽이 터지지도 않고, 특수효과도 사용하지 못하고, 댄서나 예쁜 세트도 없는 무대였지만…….

그곳에서도 우리는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우리야말로 우리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 * *

주사위가 던져졌으니 주사위의 눈을 확인해야 할 때.

방청객들은 모조리 퇴장하고, 무대도 다 정리한 뒤 세트에는 출연진 여덟 팀만 남았다.

심사위원도 대개 퇴근했으나, 이용익 선배님을 포함한 몇몇은 통로 근처에서 기웃대며 결과를 구경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숨어서?’

하여간 따지자면 무대는 만족스러운 편이었으나(무슨 무대든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다), 평가는 상대적이었다.

방청객은 200명이 조금 넘었고 심사위원은 특별 심사위원을 포함해 10명, 그러나 멘토는 제외해서 총 9명.

심사위원 점수는 몇 배 더 높게 계산하므로 만점은 300점 혹은 아슬아슬하게 그 아래였다.

“1위부터 공개하겠습니다.”

기존 MC의 개인 스케줄 일정으로 인해 순위 발표는 특별 심사위원 게스트, 남소리 선배님이 발표하게 되었다.

제작진과 어떤 합의를 거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MC 경력이 있는 만큼 멘트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1라운드 순위는 1위부터 8위 순서로 지체 없이 공개되었다.

순위 발표만으로 한 회차를 채우는 방송도 아니고, 글로벌 시청자 투표도 없는 콘텐츠라서 이러는 것 같았다.

“〈밀리어네어 Z 트랙〉 대망의 첫 경연, 첫 번째 1위는 달고나밴드입니다!”

호명이 시원시원했다.

누구 하나 이름이 불리면 다들 일어나서 손뼉을 치고 ‘와아아’ 소리를 내는 등 환호도 해주었다.

확실히 달고나밴드라면 실력이 있었고, 호불호도 타지 않는 참가자였다.

커버한 노래도 2000년대 유명 발라드로 편곡과 소화력이 좋았기에 고득점을 거둔 듯했다.

‘직관적으로 멋이 있었으니까.’

MC는 1위 소감을 들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2위를 발표했다.

이 빠른 속도감에서 ‘무대 분량만으로도 2시간은 충분히 채울 수 있다’는 제작진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2위는 총 257점을 획득한, 스테리나인입니다.”

스테리나인의 1라운드 순위는 2위.

박수와 가벼운 함성이 정수리 위를 휙 지나가며, 가볍게 실내를 훑었다.

“이어서 3위는……. 어, 김지상 씨?”

그룹 이름이 불리는 동시에 김지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MC가 놀라 물었다.

……보니까 〈데프아〉에서 순위가 밝혀지면 소감을 발표하는 버릇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았다.

오히려 녀석은 지목을 당하니까 당황했다.

“앗……. 어?”

“아니,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게 습관이 되어서.”

“저희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네.”

나와 안승준이 적당히 데리고 들어오면, 이후 순위 발표도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적당히 리액션하며 나는 잠자코 〈데프아〉보다는 절제된 MC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면식 8위에서 이번 라운드 2위라면, 무려 여섯 계단을 단숨에 오른 셈이었다.

게다가 1위인 달고나밴드의 점수도 273점. 우리와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또한 이대로라면 2라운드 준비 없이 여유롭게 다음 경연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달고나밴드를 꺾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상승이었고……. 솔직히 기뻤다.

‘잠깐, 생각해 보면 이거 그냥 〈데프아〉 사전투표 때랑 비슷한 상황인가?’

투표나 방청 등 귀찮은 일에 참여하는 전체 인원 수가 적은 상황에서 기존 팬덤 덕택에 순위가 높아진 현상…….

나는 시니컬한 가능성으로 흘러가려는 생각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심사위원 점수가 낮으면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됐어. 좋아할 일은 계산하지 말고 좋아하자고.’

아무튼 MC 남소리는 7위와 8위 발표 전에만 호흡을 조절하고, 그전까지는 쉬지 않고 결과를 공개했다.

이후 4위부터 8위까지는 며칠에 어디 모여서 2라운드 패자부활전을 해야 하는지 공지도 내려오고…….

2라운드가 종료되면 진행될 2차 경연 미션 등 자잘한 추가 안내를 더 받으면, 기나긴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흠.’

그리고 나는 촬영 도중이나 쉬는 시간, 그리고 촬영이 끝났을 때 여러 번.

‘천사’인 남소리 선배님과 눈이 마주쳤다.

언뜻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정보를 읽힌 것이다.

내 예측은 반전 없이 맞아떨어졌고, 톡 메시지는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기조차 전에 도착했다.

[남소리 선배님: 오늘이나 내일 시간 될 때 통화 한번 해요]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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