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43화
27. 너라는 이유(7)
‘……음.’
이용익은 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듬 쓸어내려 보았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느낌으로 판단컨대 그렇게 나쁜 표정인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 그것도 반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순간 흔들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상황을 한 차례 정리했다.
“아니다, 의헌 씨. 오늘 끝나고 하는 일 있나?”
“아뇨, 딱히 없습니다.”
“그러면, 이거 마무리하면 우리 잠깐 나가서 볼까?”
“네!”
곧바로 씩씩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른이라서, 혹은 선배라서, 혹은 어떤 다른 이유로 불편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연기로 태도를 꾸며낸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본래 사람 성격 자체가 고민 따위가 깊게 이루어지지 않는 편인 것 같았다.
정의헌은 본인의 매니저처럼 보이는 사람을 불러 퇴근 상황을 조정했고, 촬영은 곧 재개되었다.
언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분위기는 활발하게 되돌아왔다.
동료들과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한편으로 이용익은 조금 전 들은 말을 생각했다.
대단한 오해는 아니었고, 대단히 감동 받을 만한 해소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좋았다.
당시에는 워낙 속이 상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본래 이용익은 그 시기를 회상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마치 뇌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무렵 일은 기억 자체도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또한 그날 레슨 중단에 관한 통화도 솔직히,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용익도 예민하게 받아들인 감이 있었으나, 언어 사이사이로 들리는 걱정하는 뉘앙스가 썩 달갑게 와닿지는 못했으므로.
오해가 백 퍼센트 이용익의 피해망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면, 온전히 그의 망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 시기에 얽힌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를 모두 미워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그의 마음을 가볍게 띄워 올렸다.
‘인사는 미리 해줄 걸 그랬나. 참, 그게 뭐가 어렵다고.’
이용익이 깔끔하고 빠르게 뉘우쳤다.
어차피 그 사건만을 인생에서 도려낼 수도 없었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에서부터 비롯된 변화가 결과적으로는 케이팝 프로듀서라는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는 주문으로 사건을 대하는 자세를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나.
‘그래, 이주는 잘못이 없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을 거리낀 것은 아니다, 그 정도의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었다.
한이주는 가르치기 쉬운 학생은 아니었다.
첫 수업부터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아이였지만, 이미 들여놓은 나쁜 버릇이 몇 가지 존재했다.
어디서 따로 배우지 않고 혼자서 연습을 오래 그리고 많이 한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용익은 문제를 하나씩 바로잡아 주고 어떤 기술은 새로 가르치기도 하며 꼬맹이를 키워나갔다.
‘이주야, 너 아예 아이돌로 나가보는 건 어떠니.’
‘왜요? 그런데 저도 제가 잘생긴 것 같아요.’
‘네 스타일이 케이팝 보컬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서 그래.’
‘저 국회의원 할 거예요. 원래 대통령 하고 싶었는데 그건 짝누가 하겠대요.’
‘짝누?’
‘작은누나요.’
……진실로, 가르치기 쉬운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어린 학생을 맡아본 것도 이용익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본업이 보컬 트레이너도 아니고, 그때까지만 해도 입시를 앞두거나 취미로 노래를 배워보겠다는 지인을 맡아본 게 다였으니까.
따지자면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달에도 몇 번씩 꾸준히 만나 가르친 학생은 한이주가 유일했다.
한이주는 집중력은 약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도 많이 하고, 난데없는 포인트에서 몇 분이나 웃어대고는 했다.
그 대화에서도 국회의원을 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알려주니까 삐져서 그 수업 내내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곤란하게 굴어도 아이는 아이였다.
‘어라. 생각해 보면 나도 케이팝에 관심이 생긴 게 딱 그 무렵 같은데.’
수업을 시작하고 몇 개월 뒤 이용익은 한이주의 부모님과도 논의를 거쳐 케이팝 댄스곡 위주로 레슨 방향을 틀었다.
레슨을 위해 노래를 분석하고 더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하면서 그도 케이팝이라는 분야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동시에 노래를 하는 방법, 악기의 쓰임, 특이한 리듬, 케이팝에서만 유행하는 보컬 방식 등.
가르치는 동시에 배워나가며 한편으로는 만들고 싶은 음악이 생겼고, 가수 쪽 일이 끊기자 자연스레 제작을 실행에 옮겼다.
처음에는 지인을 통해 익명으로 곡을 투고하다가 점점 유명해지고,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충분히 지지층이 생기자 세상에도 정체를 공개했다.
그 중간에도 여러 고난이 있었으나 아무튼, 실력을 재차 인정받은 그는 애증과도 같은 방송가에 다시 발을 들이밀었고…….
시간이 더 지나서, 지금 여기 있었다.
“앞에 타, 작업실로 가게. 구경시켜 줄게.”
주차장으로 가 차에 신호를 쏘며 뒤따라오는 정의헌에게 이용익이 말했다.
짧은 촬영이라 이용익은 오늘 자차로 출근했으며 매니저를 대동하지 않았다.
차가 도로를 달리고 두 사람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한이주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스테리나인, 경연 무대, 방송, 활동 등에 관해서도 말이 오갔다.
겉으로 보기보다, 그리고 정보만으로 알기보다 훨씬 넉살이 좋고 분위기를 편하게 풀 줄 아는 청년이었다.
“그러면 엄청 바쁘겠네. 개인 활동도 계속 병행한다면.”
“사실 체력이 제일 문제죠. 다른 건 재미도 있고 다 괜찮거든요.”
“활동 오래 할 거면 건강 신경 써야 돼. 의헌 씨는 춤도 추잖아.”
첫 번째 경연 전에도 개인 팬 미팅이라든가, 자잘한 촬영, 연습 일정 따위가 빽빽하다는 듯했다.
정의헌은 엄살을 떨다가도 의젓한 말을 했고, 잘 차려놓은 작업실에 들어서면 눈을 빛내며 좋아했다.
벽에 늘어놓은 장식 그림이나 새로 들여놓은 신형 악기를 구경하며 감탄하는 모습이 이용익으로서는 꽤나 재미있었다.
이용익은 컴퓨터를 켜서 최근 발매한 노래의 B버전이나 시안 등을 들려주기도 하며 잠시 떠들다가, 이런 말도 꺼냈다.
“무슨 곡 계획 중인지 조금 들어나 볼까 싶은데.”
“〈너를〉, 〈사랑을 바란다〉, 〈Gift〉 세 곡 정도로 이주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 같아요.”
정의헌이 세 개의 곡명을 말했다.
〈너를〉은 이용익을 스타덤에 올린 대표곡으로, 세 곡 중 가장 유명한 정통 발라드였다.
〈사랑을 바란다〉는 〈너를〉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너를〉과 비슷한 느낌으로 만든 노래였다.
두 노래는 비슷하게 혹은 〈너를〉이 조금 더 유명했으나 난이도 자체는 〈사랑을 바란다〉가 조금 낮았다.
그리고 〈Gift〉는 이용익이 힙합 가수와 함께 작업해 인기를 얻은 곡으로 세 곡 중에서는 제일 춤을 추기에 좋았다.
노래 자체는 셋 다 완성도가 높았고, 대중적으로 유명했다. 이용익도 전반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곡들이었고.
“셋 다 딱 와닿는 느낌은 아니다.”
이용익은 고민하다가, 딱 잘라냈다.
“상상이 잘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세 곡 모두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느낌이 있어.”
복잡한 사정이 있었으나, 스테리나인은 어쨌든 이용익이 담당을 맡아보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팀이었다.
미안함과 추억, 불편하면서도 남아 있는 정, 이런저런 요소를 전부 떼어내도 기저에는 흥미가 깔려 있었다.
스테리나인은 실력도 괜찮았고, 제작진이 허겁지겁 구해온 대타라고 하기에는 커리어와 히스토리가 출중했다.
대화를 따로 나누어보지 않은 멤버들도 다들 예의가 바른 데다가 열심히 촬영에 임했고.
따라서 이용익은 스테리나인의 첫 서바이벌 무대가 조금 더 잘 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의헌 씨는 스나 그룹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장점은 팀워크와 에너지고요, 방송에서의 경쟁력은 비주얼과 퍼포먼스라고 생각합니다.”
즉답이 돌아왔다.
정의헌 나름대로 고민을 해본 모양이었는데, 이용익도 그 말에 동감했다.
“그렇지, 아이돌 중에서는 보컬 실력도 상위권이지만……. 약간 그렇잖아.”
“보컬 잘하시는 분이 되게 많으시죠.”
“내 말이 그 말이야. 달고나밴드라든지, 걸그룹 쪽도 실력이 너무 좋잖아.”
이용익의 의견은 결국 보컬 실력에 치중하지 말고, 무대에서 춤을 더 보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해야 스테리나인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여 자신이 프로듀싱한 보이그룹 곡 폴더를 열어보았다.
두어 곡 정도라면 스테리나인과 어울리는 노래를 이 자리에서도 골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폴더 속 파일을 구경하던 정의헌이 넌지시 질문했다.
“선배님, 혹시 〈One Day〉는 어떨까요?”
어쩐지 낯설게 들리는 제목에 이용익이 의자를 빙글 돌려 마주보았다.
“내 노래?”
“네, 제목이 비슷한 노래가 있어서 갑자기 생각났어요.”
“너희 내 노래를 그렇게 하고 싶어?”
“네.”
이번 대답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왜?”
“……이주가 하고 싶다고 해서요.”
이유를 묻자 잠시 고민하는 것도 같았으나, 답변의 단순성을 보면 크게 의미 있는 정적은 아니었다.
확신이 있는 말. 두 눈은 올곧게 빛났다.
오히려 이용익이 그 대답에 말을 잃었다.
그는 천천히 〈One Day〉의 멜로디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지금까지 나온 노래 중에서는 가장 리듬감이 있었고, 분위기가 밝았으며, 이용익 본인도 꽤나 즐겁게 부른 노래였다.
유명 드라마의 OST로 쓰여 이용익이 가수 생활을 접어도 노래방 차트 상위권을 몇 년이나 유지하는 등, 사랑을 많이 받은 곡.
하지만 이용익이 프로듀싱한 보이그룹 노래와 비교하면 여전히 보컬 난이도가 높았다.
춤을 춘다면 춤도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
굳이 그렇게 더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이주가 그렇게 하고 싶대?”
“네, 선배님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이용익은 더 생각했다.
암울했던 시기, 그리고 그날이 찾아오기 전, 그리고 십여 년이 흘러 다시 만난 지금.
시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에 관해서까지.
“그러면 이렇게 하자, 의헌 씨.”
“네?”
“이주한테 내가 이미 인정한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말고.”
그가 제안했다.
“그리고 나한테 보여줘, 결과로.”
알고 싶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노력하고자 하는지, 무슨 마음과 무슨 힘으로 그러는지.
보고, 들으면,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인정할 것이다.
아이돌도 가수라면, 아티스트라면.
제자가 아닌 동료라면. 그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