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42화
27. 너라는 이유(6)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이용익은 본인의 소속사 대표에게 부탁을 한 가지 받았다.
회사에 출근해 한 층을 전부 사용하는 작업실에서 기계를 만지고 있는데 대표가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야, 용아. 이것 좀 봐주라.’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대표는 서류 더미를 건네주며 그렇게 말했다.
A4 종이를 묶어놓은 파일철에는 소속사에서 제작비 일부 투자를 결정했다는 방송 프로그램 기획안이 들어 있었다.
‘음? 저번에 봤던 거잖아?’
‘아니야, 거기, 어디냐. 7페이지 쯤에. 출연진 변동이 있다더라.’
이용익은 다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놓아둔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종이를 슥슥 넘겼다.
그러는 한편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점 뉴스를 달구어대던 사건을 회상하기도 했다.
출연을 섭외해놓은 보이그룹 멤버 중 하나가 마약 투약 문제를 일으켰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류의 일곱 번째 페이지에는 그 보이그룹이 출연을 취소했다는 전언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일곱으로 시작하면 나 잘리나?’
‘한 장 더 넘겨 봐라. 지금 제작진이 출연진 섭외 문제로 엄청 고생한다더라.’
‘나는 그러면 보고 뭘 이야기해줘야 되니.’
‘제일 괜찮아보이는 게 누구인지. 다양한 의견이 최대한 많이 필요하대.’
팔랑. 페이지가 하나 더 넘어갔다.
그곳에는 출연이 취소된 보이그룹 ‘러키세븐’을 대신할 만한 출연진 목록이 적혀 있었다.
약 여덟 개 그룹 혹은 개인의 사진과 간단한 이력, 특징 따위를 조사한 문서가 그 뒤 몇 장이나 이어졌다.
공석이 생긴 포지션이 보이그룹인 만큼 리스트는 보이그룹 위주였으나 차마 섭외하지 못한 일렉트로닉, 재즈, 알앤비 가수 등도 보였다.
이용익은 문서를 찬찬히 읽어보다가 남은 커피를 전부 비웠고, 대표는 십여 분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애매하다, 애매해.’
목록을 전부 읽고 다시 한번 검토까지 해낸 이용익이 탄식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훌륭한 라인업이었으나 이미 섭외해놓은 다른 팀과의 밸런스나, 프로그램의 취지가 신경 쓰였다.
<밀리어네어 Z 트랙>은 본래 ‘엠제트’라고 줄여 부르기를 원한 만큼 예상 시청자를 10대에서 최대 30대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더 유명하고 각 분야에서 대중성과 팬덤이 동시에 공고한 출연진을 희망했다.
한데 군대 공백기가 지난 보이그룹이나 매니아층만 존재하는 재즈 가수는 이것저것 약한 감이 없지 않았다.
전자는 팬덤 연령이 타게팅하는 나잇대보다 높았고, 후자는 대중성이 부실했다.
‘좀 더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실력도 되고…….’
이용익은 서류를 다시 대표에게 돌려주며 중얼거렸다.
‘혹시 걔들은 안 되나? <데프아>로 데뷔하는 애들. 잘 모인다면 투입해도 될 것 같은데.’
‘어휴, 아서라. 지금 얘기 도는 꼴 보면 그쪽은 해체 안 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니까, 두고 보다가 말이나 해보면 좋잖아. 특별 무대 선공개는 못 하더라도 첫 촬영 때는 결정되겠지.’
대표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용익은 상상해보았다.
<데프아> 방송을 열성적으로 챙겨본 것은 아니나 분석을 위해 무대와 노래는 감상해본 그였다.
발매곡도 아직 하나 없고 대개 경험이 부족하므로, 물론 출연하더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화제성을 당겨 오기에는 <데프아> 데뷔 그룹만큼 좋은 카드가 없을 것 같았다.
방송에서 얻은 캐릭터만으로 10위 안에 든 멤버도 있기는 했으나, 상위권은 대개 실력이 좋은 편이기도 했다.
‘나오면 참 좋을 텐데, 아쉽네.’
이용익은 입맛을 다시며 그가 괜찮다고 생각한 멤버 한두 명을 마음에 계속 두고 있었다.
그들이 기존에 그룹이 있고, 그 그룹 이름이 스테리나인이라는 사실쯤은 이용익도 처음부터 알았다.
<데프아>에 나와서가 아니라 케이팝 프로듀서로 일한 경력 때문에 전부터 커리어를 눈여겨본 것이다.
그러나 <데프아> 해체 이후 각 멤버의 행보는 좀처럼 예측할 수 없어서……. 같은 프로그램 출연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그리고 이용익은 뉴스로 <오렌지 디스크 뮤직 어워드> 출연진 기사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핸드폰을 보다가 얼마나 큰 소리를 냈냐면, 사실혼 관계인 그의 배우자가 무슨 일이냐며 놀라 달려올 정도였다.
이용익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스테리나인의 <밀제트> 출연 소식을 배우자에게 전했다.
‘잘된 거 아니야? 그 그룹에 자기 제자도 있다면서.’
배우자가 웃으며 좋아했고, 이용익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당히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그때의 인연과 개인적으로 그룹을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을 더해 특별 담당을 맡겠다고 자처했을 때도.
촬영 현장에서 그들과 인사하고 사인된 앨범과 편지를 받는 등 대화를 나누면서도.
무대를 보고, 성장한 옛 학생의 실력을 두 귀와 두 눈으로 느끼고 나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다단한 감정이 이용익에게 끈적끈적 따라붙었다.
“……선배님! 커피 괜찮으신가 해서요.”
그때 생기 있는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부르며 회상을 중도에 끊어냈다.
이용익은 겨우 정신을 차려 테이블 아래에 놓인 커피 컵을 꺼내들었다.
얼음이 다 녹아 반이 조금 넘게 된 아메리카노가 아직 남아 있었다.
“촬영 끝나고 마셔도 될 것 같아요.”
컵을 흔들어서 보여주고 나서는 휴식을 겸해 오늘 촬영에 관한 잡담을 나누었다.
나름대로 제작진이 추리고 추려서 가져온 질문일 텐데도, 정의헌에게 돌아가는 질문 수는 다른 출연진에 비해 꽤 많았다.
제작진 내부에 팬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잘한 질문도 상당했고 말이다.
“우리 의헌 씨가 고생이 많아요.”
“아니에요, 선배님이 잘해주셔서 편하게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립서비스든 아니든 예의 있는 태도와 말은 듣기에 좋았다.
정의헌은 능청맞고 여유롭게 굴어대는 성격이었는데, 얼굴에는 차가운 면과 친근한 면이 공존했다.
그 낯을 보고 있으면 이용익은 프로듀서로서, 요즘 남자 아이돌 중에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멋과 낭만을 추구하는 느긋한 인물상이 경쟁 프로그램에서 1위를 거머쥔 현상이 놀랍기도 했다.
한마디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다른 아이돌이나 연예인과 정의헌을 비교해보려고 해도 어떤 잣대에 이 청년을 겨누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용익은 자연스러운 호감을 느끼며, 한 배를 탄 출연진이자 후배를 조금 더 챙겨주기로 했다.
“준비하는 건 조금 괜찮아요?”
“아직 노래 고르는 중이에요. 명곡이 워낙 많으셔서…….”
“남자 아이돌 노래도 꽤 작업했으니까 그중에서 찾아봐요.”
이용익이 조언했다.
규칙은 ‘멘토의 노래’였지만, 심사위원도 출연진도 장르가 다양한 만큼 후보가 될 수 있는 곡의 폭은 넓었다.
예컨대 이용익은 전직 가수에 현재는 프로듀서로서 활동하고 있으므로, 어느 쪽을 골라도 상관 없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프로듀싱한 보이그룹 노래를 스테리나인은 선곡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저희가 선배님이 부르신 노래 중에서 고르려고 하는데요…….”
그러나 정의헌이 돌려준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어? 괜찮을까?”
“저희 멤버 중에 선배님 엄청 팬인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가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뀔 수도 있기는 해요. 걔가 한이주라고 노래 잘하는 동생인데…….”
“…….”
“엄청 의욕적으로 선배님 노래를 찾아보는 중이에요.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지금 꽤 주도적으로 하고 있어요.”
정의헌이 말끝을 가볍게 흘리며 이용익의 눈치를 살폈다.
그 태도에 이용익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주가 의헌 씨에게 뭐라고 말을 해줬어요?”
“사실, 네. 어렸을 때 보컬 가르쳐주신 스승님이라고 하더라고요.”
수긍이 빨랐다.
“팬이라고 하던가요?”
“네, 선배님이 알은척 안 해주신다고 서운하대요.”
그리고 가감 없이 일러바치는 것도 빨랐다.
이용익은 그러나 의외로, 덕분에 그동안의 긴장을 모조리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이용익에게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고, 그 문제는 사실 이제까지도 이용익을 꼬리표처럼 쫓아다녔다.
그는 어느덧 십 년은 된 것 같은 오랜 과거를 짧게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차피 정의헌도 모르고 있을 일은 아니었으므로 이용익은 대놓고 말해주었다.
“그때 레슨을 그만두었을 때가 사실, 내가 조금 힘들었을 때예요.”
이제야 ‘힘들었을 때’라고 농담처럼 요약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아니었다.
이용익이 발라드 가수로서 쌓아가고 있던 커리어를 버리고 긴 휴식을 가진 까닭이 있었고…….
프로듀서로서 처음부터 일을 다시 시작해 방송가에 다시 진출하고도 떼어내지 못한 편견이 있었다.
십 년 전, 가수 활동을 하던 어느 날 인터넷 뉴스에 그가 동성애자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는 진실이었으나 명백한 아웃팅이었다.
일거리가 끊기고 소속사와 개인 연락처로 전화가 쏟아졌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피곤하게 굴어댔다.
또한 대학 동기의 친구의 아들이라는 먼 인연을 가르치게 된 일도 그때쯤 중단되었다.
학부모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원인을 명백히 말해주었으나, 이용익의 귀에는 그 말도 핑계처럼 들렸다.
그리고……. 오해는 정정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무엇을 알았겠냐만은, 이용익으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뉴스를 보고 자신을 피한 사람의 가족, 그리고 그 시절이 떠오르는 인연.
“그 시기쯤에 연락이 끊긴 거라서……. 먼저 말을 걸기가 어려운 게 있었어요.”
“……어……. 그때 이주가, 온 가족이 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
“어쩔 수 없이 관뒀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눈치 좋게 정의헌이 대신 해명해주었다.
여기서 이용익이 일컫은 ‘힘든 일’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는 신호기도 했다.
“……진짜로요?”
이용익은 얼굴 표정이 굳는 기분을 느꼈다.
웃는 채였지만, 카메라가 돌지 않는다고 해도 촬영장이었다.
연예인으로 오래 살아온 그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동요해서는 안 된다는 수칙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왠지 반사적으로.
정말 별것도 아닌 말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