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40화
27. 너라는 이유(4)
* * *
한이주가 증언했다.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현위치는 조금 전 한이주가 김지상과 오순도순 드라마를 찍던 바로 그 작업실.
한두 명이 겨우 들어가서 컴퓨터나 악기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용 별실은 우리 회사에 딱 세 칸이 있었다.
그중 둘은 우리 바로 위 선배님들의 개인실이고, 나머지 하나는 필요한 사람이 대여해서 쓸 수 있었다.
말이 공용이지 요즘은 주로 강주찬이 사용했는데, 원칙적으로는 연습생을 포함해 관계자면 누구나 사용이 가능했다.
아무튼 공간은 형광등은 끈 채 강주찬이 놓아둔 간접조명만 켜두면 적당히 어둡고 좁아서, 취조실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래요……. 왜죠.”
아무튼 그래서, 나와 한이주는 이 공용 작업실에서 일대일 면담을 하는 중이었다.
실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마주보고 앉은 것은 아니고.
나는 컴퓨터 의자에, 한이주는 소파 겸 간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의자 방향만 돌려서 마주보려고 했는데, 한이주가 이상한 상황극을 시작해서 나도 일단은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때는 3월의 봄날……. 그 눈을 보고 알았어.”
“서론이 길다. 줄여.”
“하……. 죄송함다. 들켰습니다.”
“뭘?!”
순간 한이주가 어린 날에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싶어 심장이 철렁할 뻔했다.
그런데 나쁜 예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왠지 얘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 의문이 차올랐다.
크게 외치듯 물었지만, 목소리를 밖으로 낸 시점부터 나는 재빠르게 진정했다.
실제로 한이주가 즉시 김이 빠지는 대답을 내놓기도 했고.
“……형이 신발 사준 거 진섭이 형이 알아냈어.”
“장하다, 이놈아……. 이거 분명 들킨 게 아니라 한이주가 말실수했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한이주는 3월 14일 생으로, 며칠 전에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리고 나는 생일을 기념해서 큰 마음을 먹고 비싼 브랜드 운동화를 한 켤레 이주에게 선물해주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2월 말에 한번 크게 정산을 받았다는 점이다.
왜 이런 뜬금없는 시기에 정산이 이루어졌냐고 하면, 회사를 다시 어나더뮤직으로 옮기며 생긴 복잡한 문제들 때문이었다.
내가 〈데프아〉 이후 에이레 활동으로 받아내야 하는 정산 금액 및 이것저것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많지 않다는 것은 솟아날 구멍이 적다는 거지, 받을 돈 자체가 적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번 정리해볼까. 돈 생각은 언제 해도 흥미진진하긴 하니까.’
우선 〈데프아〉 제작사인 KMC 방송국은 내게 〈데프아〉 출연료와 〈데프아〉 콘서트 급여를 지급해줘야 했다.
이쪽은 연습생으로서 계약이 묶여 있기 때문에 어나더뮤직과 나눠 먹어야 하는 돈이었다.
그리고 ‘에이레’와 계약한 K14엔터테인먼트도 내게 입금해야 할 금액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에이레로 계약한 계약금, 에이레 리얼리티 〈WE ARE A:Re〉 출연료.
계약금은 제때 입금하지 않아서 밀린 돈이었고 출연료는 계산해보면 큰 금액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K14엔터는 별개로 에이레 데뷔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책임을 져야 했다.
뇌물로 팀 결성부터 문제가 있었고, 팀으로 맺은 광고 계약이나 앨범 플랜은 엎어졌고, 관계자들 모두 시간은 시간대로 쓰지 않았나.
물론 이 부분은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기도 해서 어떤 결과에 얼마나 배상 명령이 내려올지는 아직 모른다.
또한 2월 말은 내가 에이레의 데뷔 전 해체를 겪고 돌아와 완전체 활동을 시작한 무렵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광고 촬영이나 방송 출연 스케줄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그러니까 정산은 어떻게 되었냐면…….’
가장 먼저 나는 〈데프아〉 출연료 및 콘서트 수입으로 미약한 마이너스를 기록하던 내 기존 활동비를 전액 삭쳤다.
K14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여태까지도 계약금이나 출연료, 위자료를 지불하지 않았으니 이쪽 계산은 아직 0원.
그리고 어나더뮤직에서는 광고와 엠버서더 계약금만 따로 빼서 미리 내게 정산해 지급해주었다.
어차피 내가 받아야 하는 돈이기는 했지만, 예기치 않은 시기에 큰 돈이 수중에 들어오니까 기분은 꽤나 좋았다.
만약 회사에서 내 동기부여를 위해 슬쩍 통장에 찍어준 동그라미 여덟 개라면 그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딱히 돈을 많이 벌면 꼭 사겠다고 점찍어둔 물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돈으로 한이주 선물을 샀다.
큰 돈을 막 쓰고 싶은 그때 내 마음과 생일 축하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확실히 명품이긴 했다.
개인 활동으로 이런저런 격차가 생기고 험한 일도 있었는데, 그룹 활동하면서 따라와준 게 개인적으로 고맙기도 했고…….
그리고 들어간 돈이 아깝다는 생각 따위 털끝만큼도 들지 않을 만큼 한이주는 최고 텐션으로 반응을 해줬다.
‘발밑에 두고 살고 싶지 않아. 머리에 쓰고 다닐래.’
‘어, 그러고 다니는 거 꼭 인증해라.’
그 호들갑을 한번 겪어보니까, 일곱 번쯤 더 맛보고 싶은 욕심이 괜스레 내 허파를 부풀렸다.
……그래서 나는 이주에게 웬만하면 멤버들에게는 내가 줬다는 것은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조용히 귀뜸했다.
한데 한이주는 그 경고 아닌 경고를 살짝 왜곡해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진섭이가 뭐래?”
“왜 그 키로 굽 있는 거 신고 다니냐고 욕먹었어.”
“그러게……. 머리에 쓰지 그랬어.”
“그러면 더 커지지 않나……? 아니, 그보다…….”
한이주가 뭘 잘못 집어먹은 털동물처럼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진지하게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는 데뷔 전에 서로 생일 선물을 따로 챙기지 말자고 다 같이 약속을 한 적 있었다.
생일 축하 멘트 정도는 해주되 모바일 상품권을 포함해 웬만한 물건도 주고받지 말기로.
그 시절이면 멤버 중에 미성년자도 많고, 그 외라고 해도 겨우 갓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아니, 우리 데뷔 전에 정한 건 다들 대체로 가난했어서 그런 거고…….”
본인을 빼면 일 년에 이벤트는 여덟 번이나 되었다.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도 있고 환경이 제각각이었으므로, 미리 정해두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단지 서로에게 부담을 가지지 말자는 합의였다, 그건.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냥 받아~”
“어……. 진짜?”
“왜 못 믿지? 좋았어, 안 좋았어?”
“좋았지! 그런데 못 믿는 것도 일리 있지 않아?”
한이주가 언제 움츠러들었냐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질문했다.
이주는……. 내성적인 멤버가 한 됫박인 스테리나인 내에서도 안승준과 쌍벽을 이룰 만큼 활발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안승준과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분위기를 기민하게 파악하고 묘하게 신랄하게 말을 잘하는 안승준과 달리 한이주는, 뭐랄까.
“뭐가 일리 있는데?”
“형 그때 악귀 들렸을 때잖아…….”
“어쭈.”
“헉, 도망가자.”
……뭐랄까.
…………깜찍하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많은 말을 생략하게 된다.
진짜 문을 열고 작업실을 나가려는 한이주의 뒷덜미를 잡아서 도로 앉혔다.
“그 일 때문에 부른 거 아니니까 있어봐.”
“뭔데, 그러면?”
본인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주는 완전히 풀어졌는지 아예 소파에 기대듯이 몸을 눕혔다.
뺀질뺀질한 꼬라지가 괘씸해서 나는 더 이상 조심하지 않고 직구를 바로 꽂아넣었다.
“너 이용익 선배님이랑 뭐 있지.”
“……엇.”
이주가 누운 자세에서 스르륵 다시 일어나서 앉았다.
“사실대로 말해라.”
“설마 오늘 NG 때문에……?”
“영하한테 불편하다고 했다면서?”
“아니, 안 그랬어!”
즉답이 돌아왔다.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었다.
역시나 그 발언은 이영하가 혼자 생각하다가 부풀린 모양이었는지, 한이주가 더듬더듬 해명을 내놓았다.
“불편하다고 한 것까지는 아니고 약간 신경이 쓰인다고는……. 했지.”
“뭔데, 그거. 썰 좀 풀어봐.”
“아니~ 그렇게 심한 건 아닌데. 음, 심한가?”
한이주가 제 머리카락을 한번 헝클어뜨리더니 신발을 벗고 소파 위로 무릎을 세웠다.
애초에 키가 큰 녀석이라 쪼그라들어봤자 많이 작아지지는 않았다.
이주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민망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으……. 용쌤이 우리 아빠 친구의 친구분이신데.”
횡설수설 어지러운 장광설을 내놓은 다음 겨우겨우 요약해 주제를 전하는 평소 화법과는 달랐다.
한이주답지 않게 두괄식이었고, 선배님을 향한 호칭은 낯설었다.
“진짜 어렸을 때 있잖아, 초등학생 때.”
“응.”
“내가 보컬 기초를 쌤한테 배웠거든.”
“진짜?”
“거짓말이겠냐고~”
차분하게 들으려고 했는데,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한이주의 과거사에 질문이 먼저 나왔다.
‘와…….’
한이주는 노래를 꽤나 잘한다.
그냥 우리 그룹 내에서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현역 아이돌 중에서도 수준급이었다.
소리를 낼 때 몸 안의 공간을 상당히 잘 쓰고, 성량부터가 나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연습생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기술과 감각이 뛰어났는데, 심지어 어린 나이에 입사하기까지 했다.
‘엄청난 원석인데 갈고 닦을 시간까지 많았다는 거지.’
우리 팀에는 선물과도 같은 메인보컬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영하는 선생님들께 ‘데뷔조가 나오면 네가 메인보컬이다’ 말을 듣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이주는 입사하자마자 그런 말을 들었다. 내가 메인댄서라고 찍혔던 것처럼.
더구나 이주도 본인 역시 보컬 실력에 자부심이 있어 다 게을리 굴어도 보컬에서만은 최선을 다하는 편이었다.
연습 기간 동안 정말 잘 갈리고, 정말 잘 닦인 한이주는 스테리나인의 음악 수준을 한 계단 끌어올리는 주축이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곧 가수가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말이었다.
한이주 덕분에 스테리나인은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풍부하고 또 공격적으로 곡을 소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멤버들이 다 자극을 많이 받았어.’
막내가 실력이 좋아서, 그 위 나이인 연습생들도 어떻게든 더 잘하려고 투지를 불태워댔다.
내가 춤 이상으로 보컬 연습에 힘을 쏟은 원인에는 분명 한이주의 존재도 높은 비중을 차지할 테다.
‘그런데 저 괴물을 누가 발굴해서 키웠나 했더니.’
생각해보면 한이주와 이용익, 두 사람의 창법이나 발성에는 은근히 접점이 있었다.
지금은 회사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며 이것저것 트렌디한 기술이 섞였지만, 옛날에는 분명 모창 수준으로 비슷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라면 내가 이주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모르는 게 이해는 되었다.
우리가 지난 생에서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계기 없이 말을 꺼내기에도 애매하니까.
“그때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
“좋은 의미로 신경이 쓰인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난데없는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궁금한 것을 다시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