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38화
27. 너라는 이유(2)
사실 나는 제작진이 이 코멘트를 대면식 당일 촬영 현장에서 바로 발표해 줄 줄 알았다.
참가자들끼리 견제하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고, 한마디씩 주고받는 장면도 보여주고, 그게 일반적인 서바이벌이니까.
그런데 〈밀리어네어 Z 트랙〉 제작진들은 아예 리액션과 코멘트를 한 번에 가공해서 각각 전송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
진정한 시작은 대면식 이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지, 예열하는 기간을 조금 더 길게 두는 것인지…….
뭐, 한편으로는 이 방법이 예능적으로 낫기 때문에 선택한 것 같기도 했다.
출연진 여덟 팀 모두 결과를 받은 즉시 기싸움이 가능한 예능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든가.
한마디로 출연진을 향한 제작진들의 은근한 불신과 확신이 동시에 느껴지는 시스템이었다.
“긴장되네요, 이거.”
“바로 보도록 할까요?”
하여간 결론을 말하자면, 당일 현장에서 발표보다는 순발력이나 눈치가 덜 필요한 방식이라 우리는 편했다.
리액션에다가 리액션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컷이 잘려 가편집된, 아직 자막은 들어가지 않은 영상이 연습실 빔 프로젝터 스크린에 투사되었다.
총 십 분이 조금 넘는 영상은 대충 세 가지 꼭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 아니! 반칙이지, 이건!
- 어우……. 쩐다. 엄청 역동적이다.
- 다들 춤을 너무 잘 추시는데?
첫 번째는 우리의 무대를 객석에서 보고 출연진들이 바로바로 내뱉은 실시간 감상 모음이었다.
처음에 카메라가 멤버들 얼굴과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장면을 보고 감탄하는 모습이라거나, 달리기 퍼포먼스 및 댄스 브레이크에 대한 반응 등이 담겨 있었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포착한 반응이라서 단어 사용에 유독 필터링이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가 처음 의도한 대로 활동적인 느낌과 비주얼, 춤에 대한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데프아〉 같은 데서는 이 무대에서 한 리액션을 저 무대에 가져다가 붙이는 등 장난질을 자주 쳤는데……..
이렇게 따로 영상 클립으로 만들어준 것을 보면 이번에는 정직하겠지만, 왠지 그때가 아련하게 연상되었다.
- 노래 자체가 굉장히 좋죠. 그동안 제가 본 스테리나인의 〈Run and Run〉 무대 중 제일 좋았어요.
- 사실 스테리나인이 보컬이 굉장히 좋은 그룹이거든요. 특히 메인보컬 라인의 밸런스가, 요즘 아이돌 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체제를 택하고 있어요. 한이주 씨의 파워풀한 허스키 보이스와 이영하 씨의 높은 미성이 서로 다른 개성으로 노래를 지탱하고 있죠. 이번에도 그 장점을 훌륭하게 이용하고 있네요.
- 보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하나하나 뜯어서 분석해 보면 의외성 있는 안무가 많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어요. 팔을 이렇게 움직인다거나, 무대에서 이동하는 방향이라든가. 그래서 ‘왠지 특이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이 많이 들죠. 물론 멤버 각자의 표현력도 그 느낌을 내는 데 한몫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두 번째 단락은 여덟 명의 심사위원들이 각기 남긴 코멘트였다.
이 또한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무대의 장점을 쏙쏙 골라서 정리해 주는 것에 가까웠다.
시청자들이 무대를 한번 보고는 깨닫지 못할 내용을 전문가의 시선에서 말로 설명해 준다고 해야 하나…….
‘여러분, 이 친구들 잘하죠? 그런데 뭐가 좋은지 설명이 잘 안 되죠? 저희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같은 느낌이었다.
- 스테리나인은 〈밀리어네어 Z 트랙〉의 히든카드죠. 사실 보시는 분들은 무슨 그룹인지 낯설 수도 있겠지만, 섭외하신 분들은 이런 것을 기대하셨을 거예요. 에너지, 젊은 피! 잘생겼고, 파워풀하고, 군무 멋있고, 팡팡 터뜨리고. 그런데 기대한 대로 너무 잘 보여주었어요. 네, 스테리나인은 이런 팀입니다. 이런 것을 잘하는 팀이에요.
- 원래도 잘하기로 유명한 아이돌이었어요. 물론 아이돌도 아이돌로서 존중받아야겠지만, 스테리나인은 특히 아이돌이라고 막 무시해도 되는 그런 레벨이 아닙니다. 앞으로 〈밀리어네어 Z 트랙〉에서 무슨 모습을 보여줄지 참 기대가 됩니다.
이에 더해 심사위원들은 각 출연진의 커리어나 특징 등을 코멘트에 섞어 소개해 주기도 했다.
과연 출연진들의 이름값과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방송 같다는 감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데프아〉 1회 촬영 및 방송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
안승준과 예희가 겪은 〈틴스타〉도, 래퍼 경연인 〈웨이크 업 MIC〉도, 그 외 수많은 대형 오디션도 1회가 이러지는 않았다.
대개 일반인이나 무명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은 초반 전개가 ‘아니, 이런 사람이!’로 흘러가니까.
‘여기서 말하는 ‘이런 사람’이란 재야의 고수뿐만 아니라 관심종자나 기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출연진들을 하나하나 대단하다고 치켜세워 주고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오디션과 비교하면 정말 다들 대단한 라인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곧 우리와 경쟁해야 하는 이들이 모두 상당한 인물이라는 뜻으로도 통했다.
그 깨달음이 찾아오기 무섭게 영상의 세 번째 꼭지가 재생되었다.
그리고……. 영상 속 여러 목소리는 칭찬 세례로 잔뜩 올라간 우리의 어깨를 짓눌렀다.
세 번째 코너는 무대가 끝나고 대기실에서 이루어진 ‘리스펙트 트랙, 브레이크 트랙’ 선발이었다.
용어가 낯선데, 간단히 요약하면 출연자 자체 평가 되시겠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제일 잘한 베스트 한 명, 워스트 한 명을 뽑는 제도였다.
베스트와 워스트라는 단어가 강하게 들릴 우려가 있으므로 단어를 이렇게 모호하게 정한 것 같았다.
‘단순히 베스트, 워스트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이런 기준이에요. ‘리스펙트’ 딱지는 ‘내가 지금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겠다’, 혹은 ‘이기기 힘들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무대를 한 참가자에게 주면 돼요. 반대로 ‘브레이크’는 ‘이 정도는 내가 이길 수 있겠다’, 아니면 ‘이 사람과 붙으면 나도 할 만하겠다’입니다. 여러 명이라고 해도 한 명만 골라주세요.’
제작진은 그렇게 말했는데, 솔직히 한 명만 찍어야 한다는 것부터가 취지와 모순된 게 아닌가 싶다.
덧붙이자면 우리는 베스트는 연차가 있는 선배 걸그룹을, 워스트는 달고나밴드를 골랐다.
‘저희가 〈오디뮤〉 공연한 날 인사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우리 서로 라이벌이라고 하자고. 저희가 아직 그 약속을 안 잊었거든요. 그래서 ‘브레이크 트랙’은 달고나밴드 분들로 정했습니다.’
내가 인터뷰에서 속사정을 밝혔다. 그리고 베스트는 그냥 우리가 못할 것 같은 무대라서 뽑았다.
아무튼 공개된 집계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저희는……. 스테리나인 분들로 하겠습니다.
- 그러면 브레이크 트랙은 이 쪽으로……?
- 스테리나인……. 죄송합니다!
베스트인 ‘리스펙트 트랙’ 한 표, 워스트인 ‘브레이크 트랙’ 네 표.
리스펙트 트랙은 커버 음악을 하는 이튜버가 주었다. 원래 팬이었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브레이크 트랙 딱지는 각각 댄서 팀, 달고나밴드, 래퍼 한 명, 같은 아이돌 보이그룹에게서 왔다.
선정 사유는 각기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약간은 무시하는 투가 섞여 있었다.
실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아직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서’ 이길 수 있을 것 같단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우리가 좀 만만하지 않나?’
인지도가 있는 건 멤버 몇 명이지 팀이 아니니까 ‘팀의 매력은 모르겠다’는 명분도 있고.
우리 연차가 이 경쟁자들 중에서는 낮은 편이기도 하고, 연간 차트에 들어간 히트곡도 없고.
원래 남자 아이돌이라는 게 이런 대결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나쁜 편이기도 하고(같이 출연하는 다른 한 보이그룹은 ‘실력파 힙합’ 이미지라 처음부터 우리와 결이 조금 다르다).
심지어 우리보다 연차가 아래인 댄서 팀은 냉큼 ‘워스트’라고 외치기에는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그쪽은 댄서 체리본의 후배와 제자들로 구성된 팀이라서 실제로도 나이가 어리고 외적으로 약해 보였다.
겉모습이나 조건을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보이그룹이나 남자 래퍼가 미성년 위주의 여성 팀을 저격하면 그림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계산한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는 어른의 사정이 섞였겠다고 나는 적당히 판단했다.
‘탈락하는 투표도 아니고, 차라리 여기서 서사를 조금 받을까.’
그 서사도 제작진이 주셔야 받을 수 있다만, 아무튼 나로서는 신선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동안 〈데프아〉에서 나는 왠지 다윗이 돌팔매질로 쓰러뜨려야 할……. 아무튼 재수없는 위치를 점했으니까.
남들이 얕잡아 보는 도전자가 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멤버들이랑 팬들에게 미리 말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오늘 촬영이 끝나고 혹은 영상이 공개되면 할 일이니까, 지금은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표정 관리 잘 하고.
“아~ 말씀들이 좀 아픈데요.”
“저희 이런 취급이 말이 됩니까?”
나와 안승준이 투덜거렸고, 우리 얼굴을 찬찬히 카메라가 잡아주었다.
카메라의 움직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이용익 선배님은 주제를 환기했다.
“영상에서도 보셨다시피……. 나쁜 소식이 하나 있어요, 우리 멤버들.”
그리고 선배님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그룹 대표인 내게 건네주었다.
봉투 속에서는 빳빳한 까만 카드가 한 장 나왔다.
내가 대표 역할을 계속 수행하며, 카드에 적힌 연한 글씨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스테리나인의 대면식 순위는 8위…… 라고 하네요?”
“8팀인데 8위요?!”
“아, 네. 꼴찌입니다.”
천진섭의 새된 외침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 어깨와 등에 달라붙어서 카드를 훔쳐보는 녀석들의 체중이 무거워서, 슬퍼할 시간은 주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계속 카드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토큰 계산이 완료되었다고도 합니다.”
“와!”
“우리 토큰은 하나네요.”
빼곡한 글자 밑에는 전자파 차단 스티커 재질의 금색 원반 모양 토큰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원반이 아니라 LP나 CD 모양인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한 명칭은 ‘Z 토큰’, 여기 이 〈밀리어네어 Z 트랙〉이라는 방송의 특별 화폐였다.
토큰 스티커 하단에는 우리가 왜 하나의 토큰을 얻었는지도 표시가 된 채였다.
* 〈오렌지 디스크 뮤직 어워드〉 선공개 ‘나에게’ 무대 영상 조회 수 309만 회: +3개
* 리스펙트 트랙: +1개
* 대면식 최종 8위 핸디캡: -3개
우선 〈나에게〉 무대 영상을 백만 회당 하나씩 토큰을 베네핏으로 증정했고, 리스펙트 딱지 하나에 토큰 하나.
그리고 최종 8위 핸디캡으로 토큰을 세 개나 뺏어간다고 적혀 있었다.
‘네 표 받았는데, 네 개를 뺏지 않아서 다행인가?’
……정신승리 완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최종 토큰은 하나였다.
방송 시스템 속 토큰의 가치를 생각하면, 사실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