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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안 그만 두겠습니다-135화 (135/192)

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35화

26. BREATHE(5)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누가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벌인 일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보다는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일을 처리하다가 실수했다고 여기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실수일 수도 있고 부주의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건 아무튼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아직 피해자가 생긴 건 아니잖아. 뭐, 운 좋게 일찍 발견한 거지만.’

문제는 공식 카페에서도 말했듯 이번 도시락이나 이벤트 등을 정의헌이 주도했다는 점이었다.

그야 본인이 알레르기 관련 연락을 받아서 내역을 정리하고 업체에 연락해 주문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밀월은 적어도, 이 옆자리 팬이 무슨 사유로 곤란해하는 것인지는 희미하게나마 추측이 되었다.

“혹시 처음 오셨어요?”

“아, 네.”

밀월이 질문하자, 그 사람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눈을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밀월은 그 대답으로 감을 잡았다. 처음 왔으니까……. 그럴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이벤트가 좋은 흐름으로 완벽하게 진행되었으니까, 이 흐름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든가.

아니면 원래 사람 자체가 싫은 소리를 하기보다는 참고 넘어가는 성격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밀월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러한 이벤트가 처음도 아니었다.

물론 개인 스케줄도 처음이고, 이 광고 업체와의 이벤트도 처음인 데다가 팬 사인회도 오랜만이었지만…….

한때는 매주, 나아가 한 주에도 몇 번씩 스테리나인을 쫓아다녔고 그 경험으로 인해 아는 것이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신뢰라고 해야 할까.

‘걔는 누가 못 말하고 숨기면 더 속상해할 것 같은데.’

정의헌은 그런 사람이리라는 묘한 믿음 겸 캐릭터 해석이 있었다.

그리고 별로 이것은 정의헌이 잘못해서 생긴 불편도 아닐 테고, 받기로 한 것은 받는 게 맞는 일인 데다가, 다른 사람과 도시락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고…….

기타 복합적인 사유로 밀월은 이 건을 직원에게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가타부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밀월은 이런 건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제가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옆 자리 팬에게 이야기한 뒤, 그의 도시락을 받아 밀월은 장내를 관리하는 직원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렇게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시설 관리자일 뿐이라는 그 직원은 매니저를 불러왔고, 매니저가 다시 사실 확인을 했다.

그리고 오 분도 되지 않아서 말썽거리는 단락을 맺었다.

“우선 도시락부터 교환해 드리고, 원인은 저희가 파악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혹시 자리가…….”

“제가 75번이고요, 제 옆자리 분이셔서 76번이실 거예요.”

사인회장의 어두운 구석에서 성사된 대화. 밀월은 줄지은 좌석 뒤편을 고갯짓하며 대답했다.

밀월이 상기했듯이 어나더뮤직은 그다지 팬들과 기싸움을 하거나 트러블 원인을 팬에게 덮어씌우는 회사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왜 본인이 오지 않고 옆 사람이 왔는지에 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조금 기다리고, 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사과 방송을 한 뒤 전체적으로 누락 제보를 받는 절차가 있었다.

다행히도 요구사항이 누락된 도시락은 76번 팬의 것이 유일했다.

해명하기를, 팬의 메시지가 대행사로부터 어나더뮤직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나 뭐라나.

그리고 50번대 팬들이 사인을 받기 시작했을 때쯤 76번 팬은 제대로 된 도시락을 받아냈다.

제조 과정을 확인한 결과 문제가 없는 빵과 과자, 과일, 주스류는 그대로 두고 밥과 반찬 도시락만 교환했다.

일련의 흐름을 모두 지켜본 밀월이 76번 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네……! 그, 진짜 감사해요. 저 이런 게 처음이라…….”

“혼자 오셨어요? 아예 덕질이 처음이신 건가……?”

또한 밀월은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 사귀기를 망설이지 않는 편이었다.

“혹시 툿투 계정 있으시면……. 아, 그런데 저 그룹 팬인데 괜찮으실지…….”

“어?! 아뇨, 저도 올팬이에요! 〈데프아〉 이후에 입덕하기는 했는데…….”

대화를 터보니까 덕질 성향도 그럭저럭 잘 맞는 사람 같았다.

진성 팬만 모인 개인 스케줄인데 그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밀월은 진정한 ‘레디’는 100명 중 자신이 유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심지어 완전체 무대를 보러 해외에서 개최한 〈오디뮤〉까지 다녀왔다는 사람을 만나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 친구와 떠드는 겸사겸사 카메라 화면을 틈틈이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면, 곧 60번대 사람들까지 사인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밥 시간에 이어서 두 번째 쉬어가는 타이밍.

곧 화이트데이라면서 좌석을 돌아다니면서 제비를 나눠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제비를 잘 뽑으면 최대 상품은 사인 폴라로이드, 꽝은 막대사탕 하나…….

미리 말해준 적 없는 깜짝 이벤트였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포토네컷!!”

쪽지를 펼친 밀월도 잔뜩 흥분해 소리쳤다.

사인 폴라로이드 급은 아니었지만 포토네컷 사진 원본이면 3등상 안에는 드는 경품이었다.

얼마나 좋은 상이었냐면, 근처에 앉은 팬들 및 아이돌 본인, 그리고 따라온 팬매니저까지 짝짝 손뼉을 쳐주었다.

그 자리에서 선물 증정이 끝나고, 순서는 그 옆에 앉은 76번 팬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팬이 네모난 아크릴 상자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기를 기다리며……..

정의헌이 그 주변에나 겨우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질문했다.

“도시락 잘 먹었어요?”

“아…….”

“괜찮았어요? 죄송해요, 중간에 문자 보내주신 게 전달이 안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사정을 다 알고 묻는, 신중한 목소리였다.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서 밀월은 슬쩍 눈치를 보았고, 76번 팬은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다.

밀월은 이해했다. 처음 왔으면 그럴 수 있었다.

원래 미남과 이 거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민간인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었다.

“그게 사실 저 먹으려고 빼둔 거라서, 혹시 식었다고 느끼실까 봐 좀 걱정했거든요.”

“네, 네네……. 아니에요……. 오히려 좋아요…….”

“괜찮으셨다면 다행이고요. 긴장 풀고! 이따가 더 이야기해요.”

인사를 끝으로 정의헌이 성큼성큼 지나가고, 밀월은 76번 팬이 쪽지를 펼치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쪽지 안에는 정의헌의 자필로 ‘꽝’이라고 적혀 있었고, 팬매니저가 딸기우유맛 막대사탕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탕을 손에 쥐고 무슨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잘생겼다…….”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밀월도 그쯤 되자 손이 너무 떨려와서 핸드폰으로 영상을 촬영하던 것을 중단했다.

그런 문답을 들으니까, 정의헌이 제게 말을 걸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옆 사람의 긴장이 전염된 것 같기도 했다.

‘안 돼! 하고 싶었던 말 다 해야 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 15분의 휴식 시간 중에는 눈을 감고 명상까지 하며 그는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그가 이러는 데에는 ‘준비한 말 다 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유뿐만 아니라 다른 원인도 있었다.

오늘 팬 사인회 환경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다들 신이 나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즐거운 리듬은 흐지부지 끊겼다.

밀월은 뒷줄인 만큼 앞 사람들의 분위기가 피부로 죄다 전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설치해 둔 카메라 화면을 들여다보면, 다들 웃고 넘어가는 모양새는 아닌 듯 보였다.

화가 난다든가 불만이 있다든가, 짜증스럽다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은 결코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다들 울었다.

밀월도 그들 눈물의 까닭을 전부 알 수 없었다. 각자의 사연이 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추측건대……. 아무래도 오랜만이니까 그런 것 같았다.

또한 아무래도 이곳에는 〈데프아〉를 통해서 정의헌을 응원하게 된 사람이 많을 테니까.

밀월과 친한 고인물들은 대개 미당첨의 고배를 마셨으니까, 95명 이상이 〈데프아〉 입덕일 게 틀림없었다.

‘〈데프아〉 다 봤으면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어…….’

사실은 누구보다도 밀월 본인이 그랬지만, 밀월은 애써 객관적인 척 셈했다.

저 사람들도 〈데프아〉 이후 에이레의 결성과 해체를 각기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구구절절한 순정으로 해주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밀월은 (자신도 비슷한 심정인 만큼) 팬들의 눈물에 공감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똑같고 싶지 않았다.

단체 팬 사인회도 아니고 일대일 이벤트고, 누가 울기 시작하면 결국 정의헌이 다 달래주어야 했으니까.

물론 정의헌은 곤란한 티도 내지 않고, 햄스터를 핸들링하듯 조심스럽게 대하며 한 명 한 명 다정하게 굴어주었지만…….

밀월은 어떤 의도고 어떤 진심이든 좋아하는 사람에게 부담스러운 역할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밀월은 현재 정의헌 팬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네임드기 때문에 행동을 사려야 하기도 했다.

계정에 셀카 한번 올리지 않았음에도 팬덤 내 많은 사람이 밀월이 누구고, 어떻게 생겼고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공공연히 다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튀는 언행을 보이면 퀴즈폼 익명 질문으로 괴상한 욕이 바가지로 날아들었다.

견딜 수는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어그로꾼들에게는 먹이를 주고 싶지 않았다.

“75번분까지 오셔서 앞에서 대기할게요~”

현장 스태프가 밀월을 포함한 팬들을 이끌고, 앞 순번 팬들이 하나씩 단상 위로 올랐다가 내려갔다.

71번부터 74번까지 팬 중에서도 아이돌과 대화하다가 눈가를 훔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일흔다섯 번째로 밀월이 팬 사인회장 무대에 발을 올렸다.

밀월은 의자에 앉아서 마주 보아야 하는 상황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사족으로 사인회장에 팬들이 앉는 의자는 〈Run and Run〉 활동 후반부터 준비되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온 정의헌이 사라진 문화, 팬들이 무릎을 꿇고 사인을 받아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회사에 건의한 결과였다.

하여튼, 시간이 왔다.

“혜주 누나~ 오랜만이다, 그치?”

밀월이 윤혜주로 돌아올 시간이.

장난스러운 웃음이 담긴 음성으로 정의헌이 먼저 알은척을 해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무슨 대화를 했더라. 윤혜주는 일 년 전을 회상해 보려고 애썼다.

사실 어제, 팬 사인회 대본을 준비하면서 저장해두었던 최근 이벤트 영상을 미리 돌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일 분 내내 서로 농담이나 주고받고 있어서 건질 정보가 없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오래 못 볼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자주 만나던 시기였으니까.

“의헌아…….”

윤혜주는 그렇게 농담하던 것이 바로 어제인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뜻대로 자연스럽게 웃으며 떠들지는 못했다.

목소리가 목에서 막힌 듯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능숙하게 사인 용지를 받아들고 포스트잇 내용을 확인하던 정의헌이, 고개를 든 순간.

“아이구……. 누나 울어?”

“어……?”

질문하는 내용을 들은 뒤에야 윤혜주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눈가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타이밍 좋게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상했다. 눈물샘이 고장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했다……. 감각은 예민하고, 시간은 느릿하면서도 아주 빠르게 달려가는 듯 실감이 되지 않았다.

원초적인 당황스러움에 머리가 핑핑 돌고,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진실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맞은편 그의 두 눈동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실은 그래서 더…….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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