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34화
26. BREATHE(4)
덧붙이자면 밀월은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만행을 작년 초 저질렀다.
사진을 찍어 올리는 계정에 ‘Rest’를 내걸고 잡담용 공개 계정도 핸드폰에서 로그아웃하는…….
지금 생각하면 진짜 과거의 자신을 한대 쥐어 박고 싶어지는, 그런 사건을 자행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정의헌과 서드림에게 교통사고가 벌어지고 조금 지나서였던 것 같다.
그야 사고가 애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후 소속사 대처는 열불이 터지기 짝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어나더뮤직은 밀월이 생각해도 객관적으로 나쁜 소속사는 아니었다.
‘어나더만큼 덕후랑 기싸움 안 하는 소속사도 없으니까…….’
그러나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한계로 그 어나더뮤직도 자잘한 못난 짓을 종종 범하고는 했다.
‘올해 시즌 그리팅 달력에 의승지 애들 생일 안 적어준 거 생각하면 진심 치가 떨린다.’
……그 외에도 밀월의 기분을 롤러코스터 태우듯 하강시키는 어나더뮤직의 원죄는 정말 많았다.
그중 하나가 그 교통사고 이후 활개치는 악플러들을 제때 신고 및 고소해 경찰과 법원에 넘기지 않은 일이었다.
원래 고소 공지 하나는 빠르게 올리기로 유명한 소속사였는데, 사고 수습이 바빠서인지 당시에는 고소가 조금 늦어졌다.
공지를 잘 올리던 회사가 갑자기 묵묵부답이니까 악플러들은 회사가 손을 놓았다고 또 콧대가 높아지고…….
안 그래도 속상한데, 스테리나인에 관심도 없으면서 말이나 한마디씩 얹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당시 밀월은 하루하루 말라갔다.
막내는 활동 중단을 할 정도라는데 최애는 어디를 얼마나 다쳐서 무슨 후유증이 있는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사이버 렉카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이튜브 영상이나 만들어대고, 자칭 사생들은 익명으로 루머나 쏟아대고!
그 겨울 밀월은 사랑이고 뭐고 스테리나인 때문에 제 정신력 소모가 너무 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스테리나인과 멀어지기로 결심하였다.
‘아냐, 그때는 진짜 힘들어서 휴덕하는 게 맞았어…….’
다만 비공개 계정으로 기어들어갔을 뿐, 신곡 나오면이 스트리밍도 하고, 음악방송도 챙겨보고, 영업글에는 댓글도 달고, 오프라인으로 보러 다니지만 않았을 뿐 방구석에서 할 일은 다 했다.
아무튼 최애의 〈데프아〉 출연 소식에 다시 불이 붙어서……. 온갖 사건 사고를 다 겪고 난 것이 지금.
결론적으로 밀월은 팬 사인회에서 정의헌을 만나지 못한 지 일 년이 훌쩍 넘었다.
물론 그도 〈데프아〉가 주최한 각종 이벤트와 에이레 공개 스케줄에서 미리미리 눈도장을 찍어두기는 했다.
게다가 탈덕 혹은 휴덕했다가 〈데프아〉 때문에 부활한 레디 수도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휴덕에 죄책감은 없었다.
그러나 짧게 눈인사하는 것과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서로에게(아마도) 와닿는 무게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헌아…….’
침대 천장을 보며 회상과 독백이나 하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그의 핸드폰으로 알림이 하나 도착했다.
STARRYNINE 공식 팬카페
[자유친목] 질문 하나만!!
공식 카페 새 글 알림이었다. 글 작성자는 정의헌.
그녀는 의식도 없이 클릭해서 우선 손이 가는 대로 ‘ㅎ’ 초성 하나를 댓글로 달았다.
댓글 순위권부터 선점해두고 본문을 다 읽은 뒤에 진심을 담은 댓글로 수정할 생각이었다.
잠시 정신을 놓으면 댓글이 9999개 달리고, 새 댓글을 달 수 없게 되는 일이 요즘은 허다해서 다들 그렇게 했다.
‘알림 오자마자 클릭했는데 328등이 말이 되나?’
충격적인 숫자에 혀를 내두르며 밀월은 본문을 읽어내려갔다.
편지 게시판이 아니라 일반 잡담 게시판에 작성한 글이라 그다지 격식은 없는 글이었다.
* * *
[자유친목] 질문 하나만!!
레디!!
저 주말에 팬싸 오시는 분들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미안해요 이런 미시적인 질문... ????)
혹시
저
팬싸 조금
길게 해도
...
괜찮을까요??
인당 2분에서 2분 30초 정도로 계획하고 있어요!! 다 하면 4시간 반에서 5시간쯤 걸릴 것 같아요 ㅎㅎ
사실 대관은 이미 다 했고 이건 통보...? 공지...?? 예고...? 선전포고??? ㅋㅋㅋ 그런 느낌이네요
미안합니다...
대신 회유책(?)이 좀 있으니까 들어보세요!!
1. 밥 있음 (도시락+주스, 간식은 지금 정하는 중. 제가 직접 나눠드려요!)
2. 좌석마다 충전기 코드 있음!! (대신 220v 아니고 USB만 1개 있어요)
3. 중간에 쉬는 시간 있음 15분 정도? 대관처 화장실 많고 깨끗하대요!
4. 할 말 없으면 대화 중간에 폰으로 저 사진 찍으셔두 됨!! 포즈 요청 가능!
5. 중간 퇴장 및 재입장 가능
???????????????????? 어때요?!
엄청 오랜만이기도 하고 저도 레디도 이야기하고 싶은 거 많을 것 같아서 준비해봤어요.
끝나고 포토타임 당근 있고 같이 밥먹으면서 토크도 하고 오시는 분들은 재미있는 시간 보내봐요!! ㅎㅎ
이 이야기는 당첨되신 분들 문자로도 따로 갈 거고요!
문자 받으신 분들 중에 못 먹는 음식, 알레르기, 비건 등 저희가 주의해야 하는 점 있다면 문자 답장으로 보내주세요!
도시락 준비할 때 참고할게요!
미리 따로 말씀드리는 사유는 일찍 아시면 일정 조정하기 편하실 것 같아서 & 제가 기획한 만큼 약간 생색내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아깝게 못 오시는 분들은 팬싸 끝나고 따로 라이브 켤 테니까 그때 같이 놀아요~~ ㅋㅅㅋ 시간은 9시쯤 예정!
다들 고마워요! 많이많이 사랑해!
[카페에서 찍은 사복 셀카 2장]
연락 또 할게요. 그날 봐요!! ????????????
+ 아아 맞다 제 근황!! ㅋㅋㅋ 밥 잘 먹고 방송 준비하고 팬미팅 준비하고 스케줄 하고 연습하고 지내구 있어요 점심은 제육덮밥 먹었고 저녁은 햄버거나 숙소에서 간단히 먹을 예정 ~ 레디도 밥 꼭 잘 챙겨먹고 오늘 남은 하루도 화이팅!! ????????
댓글 1142개 [열기]
* * *
글을 읽으면서 새로고침을 한 번 했더니, 그사이에 댓글이 천 개 가까이 새로 쌓였다.
밀월은 깔끔하게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잽싸게 달아두었던 댓글 내용을 수정했다.
사랑과 칭찬을 가득 담고 주접을 한 스푼 첨가해서 자판을 두드리고 나면, 댓글 수는 또 천 단위가 바뀌어 있었다.
이는 물론 응모 기간 중에 올렸다면 더 좋을 글이지만, 밀월이 판단하기에 늦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당첨자 수도 백 명이나 되는 데다가 이벤트 응모에 고액을 지불한 사람들은 사실상 전부 당첨된 듯했으니까.
‘줄 세우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었겠지…….’
정확한 커트라인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위 몇십 명은 구매 수 순위대로 줄을 세워서 무조건 당첨 처리를 했을 것이다.
반면 밀월처럼 평균보다 낮은 구매 수로 운 좋게 당첨된 사람도 한두 명은 아닐 게 분명했다.
더불어 팬 사인회 당첨 인원 수는 제법 넉넉했으며, 이벤트 날짜 역시 평일이 아닌 주말이었다.
즉 진지하게 참여하고 싶어서 가산을 탕진한 사람은 어차피 다 당첨되었을 거라는 점이다.
게다가 언급했듯 이번은 〈데프아〉 이후 첫 사인 이벤트였고, 그 다음 팬 사인회 시기는 불분명했다.
정말 정의헌을 보고 대화하고 싶어서 사활을 건 사람들은 대개 억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억울하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사인회 당일 일정을 통으로 빼둔 밀월은 좋기만 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밥도 준다잖아~’
밀월은 느긋하게 생각하며 주말을 기다렸다.
열심히 학교도 다니고 그날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구상하기도 하고, 선물할 액세서리나 장난감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날 입고 갈 새 옷도 사면서 말이다.
옷도 잘 입고 얼굴에 그림도 그리고 장난감도 챙겨 출발하려는데, 문가에서 마주친 밀월의 언니가 기겁을 했다.
“너는 연예인을 보러 가는 거야, 연예인 오디션을 보러 가는 거야?”
“소개팅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어.”
각오도 다졌겠다, 밀월은 그렇게 지하철과 택시를 번갈아 타고 서울 소재 모 아트홀에 도착했다.
줄을 서서 신분증을 확인하고 사인 용지를 받은 뒤에는 순번 추첨 차례.
그녀 손에 들어온 쪽지에는 75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애매하다…….’
열 명이 한 줄에 앉는다면 일곱 번째 줄 가운데일 것이다.
회장 조명 문제로 아이돌도 가운데에 앉고, 카메라도 가운데에 두면 사진이 예쁘게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70번대는 너무 뒤가 아닌지, 불만스러운 마음도 들기는 했다.
‘쩝.’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지정된 자리에 가 앉는 것 말고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인회 회장은 영화관처럼 마치 푹신한 의자가 줄지어 놓인, 단차가 있는 구조였다.
들고 온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세우고, 집에서 미리 준비해온 포스트잇을 사인 용지에 붙이고…….
본격적인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앞줄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 서로 사인 받는 영상도 찍어주기로 약속하면 준비는 끝이었다.
그리고 아이돌의 입장.
“의헌아~”
“헌아!”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람들과 목소리를 높여 어그로를 끄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에게는 곧바로 팬매니저의 철퇴가 내려졌다.
그렇게 각종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작은 다 같이 씩씩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밀월은 개인 팬 사인회가 처음이라 텐션이 괜찮을지 걱정했는데(그녀도 참 별 걱정을 다 했다), 현장은 생각보다 화목했다.
시키는 것은 시키는 대로 다 해주고, 가수도 팬도 기분 좋아 보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은 어쩔 수 없고.
30번까지 끝나면 짧은 휴식을 겸해서 정의헌이 직접 좌석을 거닐며 도시락을 배부해주기도 했다.
도시락은 밥에 고기반찬, 샐러드, 과일 주스에 빵과 과자, 과일까지 들어가 몹시 호화로웠다.
“무거워……!”
“사랑이 담겨서 그래~”
밀월이 묵직함에 당황해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자, 정의헌이 웃으며 지나갔다.
우선 인형과 함께 사진부터 찍고, 도시락 뚜껑을 연 그때.
‘……?’
옆에 앉은 사람이 머뭇거리면서 도시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2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에 파란 별 모양 머리핀을 꽂은 여성이었다.
뒷 번호를 받은 사람들은 다들 식사를 시작했는데, 영 불편해 보이는 옆 자리 팬이 밀월은 신경 쓰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말을 걸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제가 대두 알레르기가 있는데…….”
그 사람은 낯을 가리는 듯 서먹하게 대답했다.
밀월은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말대로 도시락 곳곳에 박힌 콩과 두부 따위가 보였다.
이렇게 망설이는 것을 보면 대충 빼고 먹지 못할 만큼 조심해야 하는 경우가 아닐까. 밀월은 생각했다.
“문자 하셨어요?”
“네, 저 보냈는데……. 음…….”
옆 자리 사람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어……. 누락인가?’
밀월은 빙그르르 눈을 돌려 정의헌이 사인 중인 무대 쪽을 쳐다보았다.
여러모로 난처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