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29화
25. Outsider(5)
예희는 재미 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지금 엄청 이상한 사람처럼 말씀하고 계세요.”
말투는 가벼워서, 진지하게 힐난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조금 급발진한 것 같기도 해서, 괜스레 민망한 마음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까불었네요.”
“아니에요. 관찰력이 좋으셔서 놀랐어요. 소화 잘 못 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거짓을 꾸며내면 더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거기서부터는 진실의 농도를 꽤나 높였다.
“치즈위키에서 읽었습니다.”
“위키에 그런 내용 없을 텐데.”
“전에 〈퀘스트보드〉 나왔을 때 말씀하신 거 봤어요.”
OTV 웹 예능으로, 아이돌 등 스타가 출연해 본인 TMI 말하는 방송이다.
“어……. 잘 아시네요.”
“팬이에요.”
각오 덕분에 반쯤은 뇌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아무 말로 대화가 이어졌다.
달고나밴드의 노래를 좋아하고 자주 듣기도 하니까, 일단 팬은……. 맞을지도 모른다.
방송은 며칠 전에 우연히 30초 클립으로 보게 된 건데, 우연이 겹쳐 천만다행이었다.
“……팬이었구나…….”
하는 게 나은 오해는 일단 하게 두고,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내 마음이 다급한 건지 단지 오랜만에 일대일로 봐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본새 안 나는 말을 갑자기 쏟아낸 건 사실이므로 더 이상하게 보이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그렇게 내가 결정한 방향은, 실수는 실수로 인정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때우기였다.
“아무튼 초면에 이상한 소리 한 건 사과드릴게요. 주변에 비슷한 체질인데 큰 병으로 고생하신 분이 계시거든요.”
“아아…….”
“그분 생각이 나서 되게 섣부르게 말씀을 드렸네요. 뜬금없었죠? 가족력 이야기한 건 그분이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서 그랬던 거고요.”
“아니에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증상이 어땠는데요?”
그래도 예희가 대화에 적극적인 사람이라서 말이 꼬이는 일은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는 과거 예희에게 들은 모친의 병증을 스리슬쩍 끼워 넣어 증언했다.
에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귀담아들었다. 기계적인 반응 같기도 했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주변 사람이든 본인이든 몸이 안 좋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시간도 많이 들잖아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렸어요.”
“예, 고마워요. 저도 신경 쓰도록 할게요.”
이 말을 듣고 예희가 당장 내일 온 가족을 모시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가지는 않겠지만…….
더 말하거나 간절히 당부하기도 애매하여 지금은 더 오버하지 않고 가만히 두기로 했다.
누가 들어도 뜬금없는 소리였겠지만, 오늘날의 예희라면 정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걱정이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동료랑 사이도 좋으며, 활동도 잘하는 시기이지 않나.
‘어차피 〈밀제트〉 방송하는 도중에는 매주 만나게 될 얼굴이니까…….’
구질구질하게 더 회상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도 될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떠올려 보려고 해도 좋은 일이 별로 없었다.
‘뭐가 불만인데? 자연스럽게 나온 말을 어쩌라고. 나 음악 이제 안 해. 사실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방송인데 그런 비하적인 말을 하면……. 아니, 가지 말고 좀 들어.’
‘시끄러워! 간섭하지 마. 네가 뭘 그렇게 잘났다고 떠들어!’
그 모질고 날카로운 외침도 아직 이명처럼 귓가에 남아 있었으나, 나는 애써 무시했다.
‘새삼 예희도 기분이 태도가 되는 인간이었군…….’
자극적인 기억이 오래가는 사람의 뇌는 얄궂게도 예희가 패악을 부리는 면면만을 회상하게 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때 예희가 착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때 여기서 깍듯한 태도로 대화하는 예희와 몇 년 후의 예희는 결국 같은 사람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환경과 상황 차이가 변화가 만들어냈을 뿐.’
예희가 워낙 겉과 속이 다르고 사연이 복잡해서 나도 잠시 헤매었는데, 요약하면 간단하다.
과거에 나와 고예닮, 즉 예희는 친분이 있었던 사이다.
사실 성격이 잘 맞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대화를 제법 나누었다.
예희는 이러나저러나 해도 딱한 사정이 없지 않다.
닥쳐올 미래와 비밀들이 신경 쓰이기는 하나, 당장 이 이상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수상하고 뻣뻣한 행동이나 말은 적당히 그만하자.
‘나도 그때랑 비교하면 형편이 꽤나 나아졌으니까.’
예희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때 다가서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서먹함을 느낄 새도 없을 만큼 짧은 침묵 후, 예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 저기 카메라.”
아직 준비가 덜 된 세트를 지나 비하인드 영상을 촬영하는 스태프가 다가왔다.
예희가 카메라에 고갯짓하더니, 등에 멘 기타를 앞으로 돌려 현을 부드럽게 퉁겼다.
이제까지의 비즈니스용 웃음도 빛이 바랠 만큼 환하고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가창하는 노래는, 속삭이는 투로 흥얼거리는 달고나밴드의 히트곡.
정신이 절로 맑아지는 목소리였다.
‘그래, 생각 잘하자. 당장 중요한 게 뭔지.’
1번, 광고 촬영.
운동화는 예쁜데 남성용 모델도 굽이 높아서, 신자마자 시야가 쑥 올라가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2번, 곧 녹화 예정인 〈밀리어네어 Z 트랙〉 대면식.
노래는 작년 봄 발매한 6번째 미니앨범 타이틀곡 〈Run and Run〉으로 정했다.
서드림이 없었던 8인 앨범이었는데, 〈밀제트〉에서 처음으로 9인 버전을 보여줄 것이다.
임팩트 있는 결과를 내고 싶어서 기획을 꽤나 고민했는데, 서난영의 조언 및 예희의 농담으로 가닥이 잡혔다.
서난영 가라사대, 그냥 아홉 명이 같이 있으면 완전체다.
예희께서 말씀하시기를, 스테리나인은 전반적으로 춤 실력과 비주얼이 좀 되는 아이돌이다.
결론.
스테리나인이 아이돌로서 잘하는 거 하자.
춤이나 노래 말고 꼼수 하나 써서.
‘……즉, 얼굴 자랑하자.’
사흘이 채 되기 전에 나온 해결책이었다.
* * *
방송작가 허윤아는 벌써 반년이 넘고 일 년이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정의헌과 같은 방송에 참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어떻게 예측했겠는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세 번째 프로그램이었다.
맨 처음 〈데프아〉부터 시작해서 〈데프아〉의 데뷔 그룹 리얼리티 〈WE ARE A:Re〉, 그리고 지금 〈밀리어네어 Z 트랙〉까지.
〈밀제트〉의 경우 막바지에 프로덕션에 합류한 김미진 PD보다도 늦게 참가해, 최초 기획 단계에는 그야말로 숟가락만 얹었지만 말이다.
본래 허 작가는 KMC와 다음 프로그램 계약을 맺기로 〈데프아〉가 끝날 때쯤 구두 약속까지 해둔 상태였는데…….
‘KMC가 그렇게 되다니!’
KMC가 망해서 새 프로그램도 산새처럼 포르르 날아갔다.
인제 KMC는 새 기획은커녕 있는 있던 방송 녹화도 제대로 하지 못해 재방송이나 히트한 방송을 –이 히트한 방송에는 놀랍게도 〈데뷔 프로젝트: 아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짜깁기한 스페셜 방송이나 줄곧 틀어대는 중.
정말이지 폐업만 하지 않은 수준이었는데, 주주들이 들고일어났다고 하니 여기서 더 찌그러지는 것도 시간문제 같았다.
졸지에 밥줄을 하나 잃은 허 작가를 주워 새 프로그램에 꽂아준 것은 반전 없이 김 PD였다.
‘서바이벌 또 하면 저 욕을 너무 먹어서 300살까지 장수하게 될 것 같은데요…….’
‘이번에는 그런 거 아니야, 윤아야. 무려 이번 기획은 편집 잘못하면 바로 모가지 날아간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또 무서운데요?!’
그리고 허 작가는 이미 짜여 있다는 기획과 확정된 출연진 목록을 주워듣고는 왜 ‘모가지’라는지 바로 이해했다.
라인업 각자의 팬덤 규모가 너무 커서 조금이라도 악의적으로 편집하면 욕먹고 장수는 무슨, 살이 날아와 급사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 이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았나’ 감탄이 나올 만한 사람들이었다.
락밴드, 래퍼, 아이돌, 댄서, 노래 커버 이튜버 등 각자 분야에서 랭킹을 갈아치우는 신예들이 여덟 팀이나 되었다.
심지어 전에 없었던 시스템을 갖춘 방송.
포맷을 더 재미있게 다듬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과 약간의 자금난이 허윤아 작가를 〈밀리어네어 Z 트랙〉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이 정도 수정인데, 많이 안 고치지?”
“와아……?”
거기서 시간이 더 지나서, 〈밀제트〉의 첫 무대 녹화를 열흘쯤 남겨둔 오늘.
허윤아 작가는 〈밀제트〉 0회 방송 녹화를 위해 카메라 감독 및 PD들과 어나더뮤직 연습실을 찾아왔다.
‘0회’란 정식 1회 방송 전 편성된 광고용 특별 회차였다.
이 회차에서는 심사위원 패널들을 불러 기대 평을 말하게 하고, 여덟 팀의 출연진을 소개하고 이력을 나열하며, 나아가 대면식 무대 준비 영상을 짧게 편성하여 스포일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평범하게 기대감을 높이는 전략이었다.
출연진 소개 촬영 전에 무대 스포일러를 겸해 콘셉트 회의에 참관하기로 했는데…….
정의헌이 핸드폰으로 셀프 촬영한 춤 영상을 틀어 보여주며 발표하고, 멤버들은 밍숭맹숭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 등장하고 퍼질 때 우리가 이렇게 설 거야.”
정의헌이 아까 빌려 간 스태프의 스케치북을 한 장 넘겼다.
대충 이름만 적어넣은 동그라미 아홉 개가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스케치북을 확인한 김지상이 중얼거렸다.
“센터가 드림이네?”
“와, 이 형 센터부터 봤다.”
“우우, 욕심쟁이.”
순식간에 한이주와 안승준이 한마디씩 얹은 것은 덤이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 뒤에서 지켜보며 허 작가는 조용히 웃었다.
분위기는 엉망진창으로 떠들썩했지만 그게 오히려 예능적으로 보기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 다른 팀 혹은 개인의 준비 과정도 촬영했지만, 사람이 많아서인지 스테리나인의 분위기는 톱쓰리에 들 만큼 좋았다.
기본적으로 다들 텐션이 좋고 오디오도 좀처럼 비는 일이 없었다.
듣자 하니 〈밀제트〉 제작진 중 몇은 스테리나인이 ‘레벨이 달린다’고 섭외에 난색을 표했다는데…….
‘무슨 의도로 그렇게 반대했는지는 이해하지만~’
스테리나인은 음악방송 1위 경험도 없고, 음원 성적이나 앨범 성적도 아직 부족했다.
인기는 많았지만 그것도 몇몇 멤버에 한해서며, 그룹이 무엇을 이루었냐고 하면 당당하게 보여줄 성과가 영 애매했다.
그러나 이렇게 막상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하자, 허 작가는 실감했다.
이 방송이 재미있어지기 위해서는 스테리나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상이가 잘 말했어. 드림이 센터로 할 거야.”
“나……?”
“할 수 있겠어?”
정의헌의 뚜렷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허 작가는 머릿속으로 다른 출연진들과 이 아이돌의 입지 및 캐릭터를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재미있는데?’
구속된 〈데프아〉 총괄 PD가 그렇게 원하던 그림이 여기 있었다.
그럴싸한 언더독 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