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21화
24. Never Ever(3)
예열 목적으로, 상투적이면서도 정중한 멘트가 짧게 삽입되었다.
“최근 케이팝은 ‘케이컬처’의 서두로서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K-드라마’, ‘K-예능’ 등도 ‘케이컬처’의 일환으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데요.”
MC가 영어로 해외 팬들 앞에서 말하면, 대형 스크린에 자막과 MC 얼굴이 함께 등장했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반은 듣고, 나머지 반은 눈을 가늘게 떠서 자막을 읽던 익명의 레디였지만…….
“다음 순서는, 네 번째 월드와이드 밀리어네어 아이콘……. 스테리나인입니다.”
그 문장은 나오자마자 지체 없이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번역이 필요한 단어 조합도 아니었다만, 이름이 머리에 곧장 내리꽂히는 감각이라고나 할까.
즉시 익명의 레디는 MC가 선 공간에서부터 시선을 돌려 조명이 꺼진 본무대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분명 스태프들일 테지만, 그 준비 과정조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완전체!’
이 역사적인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 함께할 수 있다니.
가만히 서 있는데도 감정이 울컥울컥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익명의 레디는 밀려나지 않게 스탠딩 펜스를 있는 힘껏 붙잡았다.
펜스를 잡지 않은 손에 들린 응원봉 라이트가 밝고 어두운 푸른색이 번갈아 반짝반짝 빛났다.
에이레였던 멤버들은 무대에 선 모습이, 팬들 앞에서의 모습이 벌써 한 달만이었다.
돌출 무대 앞인지라 본무대는 작게 보였지만, 작은 형체라도 보기 위해 익명의 레디는 눈을 부릅떴다.
MC가 멘트를 정리하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고…….
자동문 비슷하게 생긴 무대 장치 중앙이 열렸다.
비장하게 선 사람들의 실루엣.
그녀는 자연스럽게 인영의 개수를 세었다.
‘……여섯 명?’
카메라에 각각의 얼굴이 담기고, 익명의 레디는 그들이 ‘의승지’가 아닌 멤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기존에 〈나에게〉 활동을 한 여섯 멤버.
하늘하늘한 재질의 셔츠와 화이트진. 손목이나 목에 리본을 매단 멤버도 있고, 신발은 구두가 아닌 운동화였다.
뮤직비디오 의상과 비슷한 듯도 했으나, 그동안 음악방송에서는 니트나 캐주얼룩, 코트 차림까지 다양한 의상을 시도했기 때문에 산뜻한 착장이 익명의 레디로서는 오히려 반가웠다.
왜, 클래식한 선택만이 줄 수 있는 멋이 있지 않은가.
카메라가 멤버들의 표정을 한 명씩 클로즈업으로 훑었다.
‘분위기 뭐야…….’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는, 굳은 면면이 스크린에 짧게 잡힌 뒤.
따로 편곡한 인트로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고, 멤버들은 서정적인 비트에 발을 맞추어 스테이지로 걸어 나왔다.
이번 〈오디뮤〉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밸런타인데이.
콘셉트를 무시하고 멋대로 달리는 출연자도 없지는 않았으나, 대개는 달달한 커플 분위기를 추구했다.
〈밀제트〉 특별 무대를 제외한 스페셜 스테이지 기획도 대개 그리 꾸며졌으니까.
스테리나인도 그 콘셉트를 지킬 셈인지, 세트는 포근포근한 실내 느낌이 나도록 연출된 채였다.
소파라든지 쿠션이라든지 책상 등, 밝은 무대 LED 디스플레이와 조화롭게 맞물려 제법 보드라운 감이 있었다.
‘앗.’
무대 디스플레이가 순간 암전되었다.
멤버들의 그림자가 각자 자리에 가 앉거나 서는 것이 보였다.
위치를 찾았다면 전부 멈추고 몇 초 동안 홀드.
그리고 전주가 들어오며 조명이 다시 무대를 채웠다.
어느덧 한밤중이 되어, 주변은 온통 어두웠으나 무대만은 환했다.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첫 소절은 원곡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누운 서드림이었다.
무려 핸드마이크로 라이브. 정박에 바른 음정이었다.
혼자 되뇌어 보면
변한 건 없고 똑같은 날도
뭔가 달라진 기분
서드림이 자세를 일으켜 소파에서 내려왔다.
앞으로 걸어나오며 카메라와 눈을 맞추고, 소절이 끝나면 그는 자연스럽게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카메라가 시선을 따라 넘어가며 다음 파트인 천진섭이 의자를 밀고 책상 옆으로 나왔다.
어제보다 불안하고
많이 속상했어도
1절 파트를 잘게 쪼개고, 멤버들이 한 명씩 참여하며 노래는 점점 두터워졌다.
세 번째로 받은 사람은 이영하.
그는 쿠션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천진섭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야
이제 내일이 오잖아
〈나에게〉 안무는 본래부터 독무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러니 한 명, 두 명 혹은 유닛으로 춤을 추고 그들에게 카메라를 몰아주는 식이었는데…….
오늘 역시 무대가 비어 보이는 단점마저도 연출 일부로 소화하고, 개개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도 카메라를 몸에 부착하고 무대 위에 올라서 멤버들의 단독 쇼트를 잡아내기 위해 애썼고 말이다.
Honestly 나에게 말해
나보다 나를 더 믿을 순 없다고
여섯 명이 모두 프레임에 잡히는 첫 번째 후렴.
멤버들의 발치에 흰 연기가 뭉게뭉게 감돌았다.
두 명씩 등을 기대어 서서 춤을 추고, 여덟 명쯤 되는 백업 댄서들이 무대에 들어와 군무 스케일을 키워주었다.
여섯 명 모두 핸드마이크를 사용했기 때문에 안무 동작에는 어느 정도 제한은 있었으나, 기본적인 볼거리가 많은 데다가 익명의 레디는 입으로는 응원법을 따라 하고,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느라 바빠 그런 사소한 단점 따위는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까만 빈 종이 밑에
펜 끝을 긁어내면 그 아래 무지개
그려내 봐 이제 로맨틱한 미래
강주찬과 서난영이 주고받듯이 부르는 랩 파트가 끝나면, 1절이 완전히 끝났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접하지 못했던 편곡으로 음악이 전개되었다.
잔잔한 백보컬과 가상악기 소리가 섞이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반주가 루프 반복되고.
카메라 스태프 및 댄서가 죄다 빠지고 본무대 조명이 몇 개 색을 어둡게 바꾸었다.
‘어……?’
그리고 익명의 레디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로 눈앞 돌출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 것이다.
‘으악!’
공포영화였다면 점프 스케어였다.
본무대와 본무대 옆 화면만 시야에 담기 위해 애썼는데, 난데없이 눈앞이 밝아지다니.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리프트를 타고 돌출 무대로 올라오고 있었다.
세 개의 리프트.
익명의 팬은, 그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두근거렸다.
Honestly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리프트가 완전히 멈춘 후.
핸드마이크를 입가에 대고 중앙의 정의헌이 한 마디 노래했다.
춤 실력 덕에 평가가 절하된 감이 있었는데, 그는 실은 보컬도 비슷한 연차의 아이돌 중에서는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가창은 길어지지 않고, 대신 짧은 댄스 브레이크가 삽입되었다.
최대한 힘을 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정의헌 특유의 팝 있고 센 동작들이 돋보였다.
무대에서 흥이 오르면 힘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춤이 더 강해진다던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홀린 것처럼 보고 있으면 그 손목에 매달아놓은 리본까지도 정확하고 절도 있게 흔들리는 듯했다.
무용처럼 전신을 다 사용하는 우아한 동작에, 센터를 중심으로 바람마저 살랑살랑 퍼지고 모이는 것 같았다.
‘미쳤네…….’
보는 이로서는 아무런 지저분한 사념도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주인공을 한 명 골라야 한다면, 단언컨대 정의헌이었다.
처음부터 여기가 자신의 위치였다는 양.
어울리고, 어우러지고, 아우르는.
스테리나인의 리더. 이끄는 사람.
생각해 보면 그는 새삼스레 원래부터 그래왔다.
‘의헌이는, 늘 그랬어.’
언제나 기대를 뛰어넘었다.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리고는 모든 걱정이 무의미했다는 듯이 멀쩡히 돌아온다.
아니, 멀쩡할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성과를 손에 쥐고,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로.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깝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높이에 선다.
그렇지만 그를 그렇게 올려다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은 왜일까.
‘아…….’
익명의 레디가 탄식했다.
지미집 카메라가 허공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세 사람이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달렸다.
본무대 쪽을 향해.
동시에 통로 무대를 통해 걸어오던 여섯 멤버들도,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화 밑창이 무대와 거듭거듭 맞붙었다.
중앙보다는 돌출 무대에 가까운 곳에서 그들은 만났다.
아홉 명이 부딪히듯이 뒤섞이고.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언제 전신으로 반겼냐는 듯 대형이 정리되고, 음악은 두 번째 후렴으로 흘렀다.
Honestly 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내게 다 보여줄래
다시 아이돌의 본업이 시작되었다.
달음박질로 흐트러진 호흡은 몇 소절 지나가면 금방 제자리를 되찾았다.
2절 파트는 세 명 위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우친 느낌은 또 아니었다.
우리 이제 손을 걸고 약속해
Believe me and Let’s go high
서난영의 파트를 안승준이 받아와 랩을 하고…….
고개 들어 날 봐
이제 슬퍼하지 마
후렴으로 가기 전, 정의헌이 토스를 올렸다.
같은 가사였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달랐다.
여섯 명의 〈나에게〉는 독백처럼 들리기도 하고, 기도처럼, 위로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홉 명의 〈나에게〉는, 그런데 그보다는.
더 가까이에서.
더 직접적으로.
언제든 기억해
웃는 얼굴로 전하는 악수.
마음은 부풀어 올라 두근거리고.
좌절한 이도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게 하는 것.
듣기만 해도 정신이 고양되는 것.
여기 내가 있어
그래서.
더, 응원 같았다.
깔끔하게 올라가는 고음과 새로운 대형으로, 그러나 질서 있게 펼쳐지는 후렴 군무.
폭죽과 함께 터진 얇은 종이 꽃잎이 무대 아래까지 흩날렸다.
까만 허공에 뻗은 손, 새하얀 조명을 받아 더욱 희게 빛이 나는 의상과 액세서리.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이는 무대 효과.
아홉 명의 아이돌.
애드리브 때문에 두 메인보컬이 옆으로 빠져 동작을 자제하는데도, 움직임이 풍부했다.
Honestly 나에게 말해
아무도 나를 흔들 수는 없다고
처음부터 이런 의미로 프로듀싱한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꽉 찬 구성이었다.
모든 요소가 스토리텔링의 일부 같았다.
“와아아아!”
노래가 끝나자 무의식적인 환호성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그때 카메라가 ‘엔딩요정’을 멤버 한 명씩 잡아주기 시작했다.
〈밀제트〉 출연자들만 겪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 OTV에서 기획한 특별 연출이었다.
멤버 소개를 겸해 지나가는 클로즈업 쇼트에 스테리나인 멤버들은 가만히 있거나 간단히 애교를 부렸다.
김지상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고 안승준은 손인사를 했다.
마지막 순서는 정의헌.
대형 스크린에 얼굴이 잡혔을 때.
‘……!’
그의 목에 건 볼로 타이 단추에 조명이 번쩍 반사되었다.
봉황 문양이 새겨진 금빛 단추였다.
카메라에 반사광이 잡힌 것은 아니었으나, 익명의 레디 눈에는 빛이 바로 들어왔다.
무심코 눈을 찡그렸다가 떴다.
‘……아.’
가늘게 좁아진 시야를 통해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입모양으로 이야기하는 정의헌의 모습이.
그는 마치 소년처럼 웃었다.
행복하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모국어를 말했기에 그녀로서는 입술을 읽어낼 수 있었다.
중계를 보고 있을 수많은 사람도 분명 이해했으리라.
정확히 다섯 글자.
‘보고 싶었어.’
카메라 포커스가 흐려졌다.
그러나 감정만은 선명하게 솟아올라 흘러넘쳤다.
감동 이상의 즐거움이 그 순간에 존재했다.
이 모습을 보면 결국에는 모두가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옳은 흐름이라고.
바야흐로…….
화려한 귀환이었다.
긴 여행을 끝내고.
싸워서, 이겨서.
시작점으로.
그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