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안 그만두겠습니다 118화
23. ONE(8)
얼굴을 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순간 사위가 멍해졌다.
로딩이 제때 되지 않았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영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마구 메아리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영하는 몇 번이나 내게 사과하며, 마치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처럼 내게 부탁했다.
내가 들은 말 자체보다는 그 태도가 충격적이었다.
지나치게 저자세라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건……. 힘들다는 말이겠지.’
아닌 척을 몇 겹으로 하고 몹시 주저하기도 했지만, 듣는 입장에서 그렇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영하는 자신이 힘든 것을 절대 남에게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힘든 일이 다 지나가면 뒤늦게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라며 알리는 타입.
영하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한다. 같이 고민해 주고 해결책을 낼 수도 있는 동료인 우리한테까지.
‘그러니까, 보통은 그러는데…….’
여기서 이렇게 대놓고 말했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섰다는 의미일 테다.
아니면 내가 요즘 신경 쓸 일이 많다는 핑계로 이쪽을 살피지 못했던 걸수도 있고…….
평소에는 조용히 가서 상태를 물어보거나, 슬쩍 떠보는 식으로 내가 먼저 속내를 알아내려고 하니까.
‘아니……. 누구 탓은 아니야, 상황 문제니까.’
하지만 오히려 상황 문제라서 내가 해줄 말이 미묘하기도 했다.
뭐라고 대답해도 분위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석연치 않은 찝찝함을 남길 것만 같았다.
이영하는 좋은 애다.
대충 좋다고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진짜 개인적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이 많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영하가 있어서 스테리나인이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유지되었다고 본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영하는 모니터링과 피드백이 빠르고, 어떤 부분에서 조심해야 하고 또 무엇은 표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섬세했다.
잘하는 분야와 못하는 분야가 확실히 나뉘어 있고, 그 갭이 천지 차이로 상당한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영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아…….’
언제였더라.
인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연습생 시절.
‘오늘과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계절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여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영하는 3학년이었을 때.
……영하는 1월 생이라, 그때만 해도 한 학년 차이가 났다.
아무튼 그 무렵.
이영하는 연습생을 그만두고 어나더뮤직을 퇴사했다.
‘그때 데뷔 계획 하나 엎어졌을 때라…….’
전체적으로 퇴사하는 사람이 많았고, 영하는 그중 하나였다.
퇴사한 연습생 중에서는 다른 회사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고 아예 연습생을 그만둔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 영하는 후자를 결심했던 것 같다.
아이돌의 꿈을 접고 수능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었다고 했던가.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가고 이영하는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수생 신분으로 공부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어나더뮤직 지하 ‘암실’ 연습실.
한이주가 어디서 걸려 온지 모를 독감으로 갑자기 아팠다.
‘형, 이주가 아파. 열이 너무 많이 나……. 어떡해?’
‘……뭐라고?’
그리고 나는 왜인지 이영하에게 전화했다.
회사 직원분들이나, 병원이나, 그도 아니라면 엄마, 아빠나 이주네 부모님이나 도움 요청할 곳은 달리 많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당시 내 선택은 그랬다.
상황이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 게……. 패닉 때문에 기억이 좀 흐릿해진 것 같다.
그때쯤이면 내가 다소 예민하고 주변에 까칠하게 굴고는 했는데, 전화하면서는 그러지도 않았다.
글자 그대로 울며불며 연락했던 것 같다.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 어디……. 어디 가야 돼? 병원?’
‘……그, 우리 역 쪽으로 가면 순두부집 4층에 내과 있어. 거기로 가.’
‘내과면 돼?’
‘응, 열 있으면 내과야. 먼저 가 있으면 나도 갈 테니까, 진찰부터 받아.’
그렇게 병원 대기실에서 덜덜 떨면서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주변 사람이 조금만 아파도 불안했다– 나는, 일 년 만에 이영하를 만났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것도 아닌데, 그날 이후 영하는 어나더뮤직에 재입사했다.
회사 직원분들과 무슨 논의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이영하 속에서 무슨 결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영하가 다시 연습생이 되어 일 년 사이 들어온 연습생들과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한 가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나로서는 걔가 좀 필요했다는 것을, 필요하다는 것을.
‘음.’
하나 다행인 건 상대의 부재가 나에게만 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라는 점일까.
내가 없는 상황에 영하가 적응하지 못했다는 건 또 묘하게 기껍기도 했다.
죄책감과 동시에 스멀스멀 차오르는 이중적인 감정이었다.
축축한 것도 같고 건조한 것도 같은 정적을 뚫고 나는 영하의 이름을 불렀다.
“영아, 영하야. 이영하.”
“응.”
“그 말은 내가 조금 더……. 오래, 깊게 생각해 볼게.”
우선……. 이영하 말을 들으면 좋은 일이 생기지 문제는 발생하지 않으니까, 새겨듣기로 하자.
그러나 당장 영하의 감정 자체를 내가 해소하거나 맺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왠지 옳지 않은 일 같았다.
잠시 생각해봤는데, 뭐라고 말해도 기만처럼 들릴 것 같아서 이 점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말해준 것도 그렇고 그동안도 그렇고 종합적으로…….”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하지.”
“너는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이대로는 대화가 빙빙 돌 것 같아서 주제를 틀었다.
“나도 너 없으면 못 했을 일 많아.”
“…….”
“난 그렇게 느꼈어, 그동안.”
공간은 여전히 새벽, 사람들은 가족과 보내고 있을 한때, 겨울의 강변.
숨을 내뱉으면 하얀 입김 자국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어떤 문제는 남이 해결해 줄 수 없고 오래오래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약속 하나쯤은 흔쾌히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강을 보며 중얼거렸다.
문득 몇 달 전 서드림과 말했던, 동해와 태평양의 차이에 관해 생각했다.
여기 강 너머는 여전히 서울이지만, 강물이 가 닿는 곳은 바다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다 비슷한 이야기 같았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버티고 싶어 하는 마음.
각자의 입장은 사실 그 한 점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부터는.
“……이제 어디 안 갈게, 나.”
새로운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단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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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스테리나인 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향후 활동 안내
안녕하세요, 어나더뮤직입니다.
먼저 스테리나인과 미니 7집 《Letters to》 활동에 보내주신 팬 여러분들의 성원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최근 보도되었듯 그룹 ‘에이레(A:Re)’의 해체가 결정됨에 따라, 당사는 아티스트와 추후 활동 방향 및 계획에 따라 다방면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나누고, 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군의 의견을 존중하여 향후 활동 계획을 확정지었습니다.
스테리나인은 현재 활동 멤버 이영하, 강주찬, 서난영, 천진섭, 한이주, 서드림 군에 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군이 합류하여 9인 체제로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휴식 기간 없이 그룹 복귀가 당사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스테리나인 멤버들 상호 간의 두터운 신뢰와 세 멤버들의 빠른 활동 재개 의사로 인해 이러한 ‘그룹 합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스테리나인 아홉 멤버는 첫 활동으로 오는 2월 11일 개최되는 제13회 〈오렌지 디스크 뮤직 어워드〉 참가를 위해 ‘스페셜 스테이지’ 무대 준비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후 OTV의 방송 〈밀리어네어 Z 트랙〉 역시 9인 체제로 참여하게 될 계획입니다.
당사는 앞으로도 정의헌, 김지상, 안승준 군을 비롯한 스테리나인 멤버들의 그룹 및 개인 활동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팬분들과의 소통, 아티스트의 권익 보호, 스테리나인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스테리나인의 행보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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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여기 인사 좀 해주세요…….”
“드림이~ 뭐 찍으세요?”
“브이~ 브이~ 비하인드 브이로그~”
스테리나인 막내, 서드림이 셀카봉 끝에 달아놓은 촬영용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렸다.
안승준은 초점이 다 나간 영상의 초점을 다시 맞춰주며 서드림을 옆구리에 끼웠다.
〈오디뮤〉 무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다들 다급하게 연습에 몰두하는 시기였다.
며칠 전부터는 게다가 회사 연습실도 아니고 대형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참여하는 사람 동선이나 카메라 동선, 세트 위치 등을 파악해야 해서 자리를 옮긴 것인데…….
“차라리 처음부터 이쪽으로 나와서 하는 건?”
“그런데 돌출에는 세트를 세울 수가 없잖아.”
“들어 봐, 노래를 부르면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갈 수가 없다니까?”
현재 저 한쪽에서는 의견 충돌로 난리가 났다.
그 주인공은 안무 창작에 조예가 있는 정의헌과 서난영, 그리고 보컬의 기술적인 면을 잘 아는 이영하 세 사람.
저러다가 어떻게든 결론을 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지켜봤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다인원 그룹의 장점이자 단점…….
‘싸우면 싸운 놈들 빼놓고 놀기 때문에 알아서 해결해야 함’이었다.
“저분들은 지금 뭐가 문제인 건가요?”
서드림이 세 사람을 화면에 담았다가, 안승준에게로 카메라를 돌리며 물었다.
“아, 〈오디뮤〉 스테이지가 돌출 무대가 있거든요. 알파벳 ‘H’자 뒤집은 것처럼 무대가 생겼어요. 1번 가로 무대 있고, 런웨이? 복도처럼 생긴 세로 긴 무대 있고, 2번 가로 무대가 있는 구성인데…….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대화 중입니다.”
안승준은 단순히 요약했지만, 사실 상황은 그보다는 복잡했다.
이번 〈오디뮤〉 무대 영상은 〈오디뮤〉 뿐만 아니라 〈밀제트〉 팀에서도 촬영을 해간단다.
그리고 〈밀제트〉 카메라가 돌출 무대 쪽에 몰려 있으니까, 웬만하면 가까이 와서 무대를 해달라는 요청이 뒤늦게 들어왔다.
그래서 뜯어 고치고 있는 상황.
마치 풍선 인형마냥 이쪽을 누르면 저쪽에서 문제가 튀어나오고 저쪽을 누르면 이쪽이 튀어나와서 문제였다.
“좀 구경해 보기로 할까요, 드림 씨?”
“네엥.”
이십 분 넘게 셋이 떠드는데 중단하거나 아무 결론이나 맺어버리거나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좋은 촬영 소재가 될 것 같아서, 안승준은 서드림을 옆에 끼고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다.